1980년대생 부부 작가 조정은(33)·최승윤(38). 개성 짙은 작업으로 마니아층이 두꺼운 이들은 부부 아니랄까 봐 웃는 모습 등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 닮았다. 하지만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전혀 다르다. 조 작가는 타공판을 설치한 벽에 캔버스를 걸어 사물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그림을 세밀하게 그린다. 최 작가는 캔버스를 바닥에 뉘어 붓과 스퀴즈 등 여러 도구를 사용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다른 주파수의 두 사람이 최근 마음을 맞춰 하나의 그림을 탄생시켰다. 9월 1일 ‘함께 그리는 무지개’전 오픈 당일 서울 북촌에 위치한 ‘청엠아트컴퍼니’에서 이들의 합작품을 만났다. 최 작가의 오일 물감 작업 속에 조 작가가 숨겨놓은 팬지 꽃 요정들이 더없이 귀여워 보였다. 이번 전시는 9월 30일까지 열린다.
조 작가는 동국대 서양화과 출신으로 2012년부터 개인·단체전을 비롯해 핑크·바마 아트페어 등에서 꾸준히 이름을 알렸다. 최 작가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조형예술학과를 나와 매년 3~4회 이상의 개인전을 열고 있다. 또 삼성·현대카드 등 대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올해로 작가 경력 10년 차에 접어든 이들 부부에게 더 이상 ‘신진 작가’ 타이틀은 어울리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기보다 각자 추구하는 예술 세계관에 좀 더 천착할 때가 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부부다. 결혼 3년 차에 접어든 이들은 작업 방식에 변화를 주고 새로운 연구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예민함을 존중하며 호흡을 맞춰가고 있다.
한 사람은 밖에서, 다른 한 사람은 집에서
작업실 전경.
작업실 도구.
최 | 저는 유화 작업을 해서인지 작업실에서 냄새가 많이 나요. 냄새 때문에 여기에 있지 못할 때도 있어요. 또 캔버스를 눕혀서 작업하는 방식이라 넓은 공간도 필요해서 외부에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조 | 저는 아크릴 물감을 써서 강한 냄새는 없지만, 오래 작업하는 스타일이라 집에서 하는 게 효율적이에요. 외부에 작업실을 둔 적이 있는데, 보통 늦은 오후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작업하다 보니 밤에는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방 하나를 작업실로 사용하는 건가요.
조 | 네. 결혼하기 전에는 친정집에 딸린 반지하방을 작업실로 사용했어요.
두 분이 공동 작업실을 사용하는 건 어떠세요.
조 | 건물 1, 2층을 각자 작업실로 쓰면 좋을 것 같아요. 같은 공간을 나눠서 사용하는 작가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저희는 힘들어요. 나중에 큰집을 지어서 일상생활도 하고, 아래층과 위층은 둘의 작업실로 쓰고 싶네요.
근교와 도시 작업실 중 어떤 곳을 더 선호하세요.
조 | 전 도시가 좋아요. 주로 밀키트로 밥을 해 먹어서(웃음). 현실적인 작가 부부예요. 가까이에 편의시설이 있어야 작업하기 편해요. 작업 외적인 데서는 에너지를 최대한 아끼려다 보니 배달 잘되는 곳이 좋더라고요.
최 | 저도 서울이 좋아요. 근교 레지던스에서도 있어봤는데 왔다 갔다 힘이 많이 들더라고요. 도시와 떨어져 있으니 단절된 느낌도 들고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조 | 2015년에 ‘도도새’로 유명한 김선우 작가 개인전에서 처음 봤어요. 당시 인사 정도만 했는데 그 이후에 제가 승윤(남편) 작가님이 있던 작가 모임에 우연히 들어가면서 가까워졌어요.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생활 패턴이 서로의 작업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요.
최 | 정은(아내) 작가님이 결혼하면서 저 때문에 생활 패턴이 변했어요. 전 원래 밤낮이 바뀌어 있었거든요. 직장인과 결혼했으면 생활 패턴이 안 맞았겠지만, 직업 특성상 서로 자유롭게 시간을 배분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죠.
조 | (생활 패턴이) 거의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요. 연애 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늦게 잠들진 않았어요. 오후 1~2시쯤 하루를 시작해서 새벽 5~6시쯤 잠들곤 해요. 그보다 더 늦을 때도 있고요. 그래서 저희는 외부 약속을 주로 오후 3시 이후로 잡아요.
“화가 부부는 서로에게 무지개를 그려줄 수 있어”
조정은 작가와 그의 그림들.
최승윤 작가와 그의 그림들.
조 | 전시회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그린 1번 작품이요. 두 사람의 작업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 있어요. 그림 속에 두 명의 팬지 꽃 요정을 넣어서 함께 그린다는 의미를 표현하려고 했어요. 필요한 요소가 다 들어가 있고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최 | 전시를 구상하면서 가장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린 작품이에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전시 공간을 먼저 와봤어요. 전시장 2층 한쪽에 소파가 있었는데, 바깥에서 햇볕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이곳에 앉아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서 그림이 딱 떠올랐어요.
합작품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나요.
조 | 어떤 콘셉트로 작업할지 분위기나 색감 정도를 의논한 다음에 승윤 작가님이 먼저 그림을 그리면 제가 그 여백에 맞춰서 작업해요. 작년 ‘러브도트’ 2인전에서는 제가 먼저 작업을 시작하기도 했는데, 그 반대일 때 그림이 더 조화롭더라고요.
정은 작가님의 그림은 디테일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작업한 건가요.
조 | 사물의 이미지를 수집해서 그리고 싶은 것을 디지털로 콜라주해봐요. 그다음 캔버스에 젯소(캔버스의 애벌 처리를 위해 테레빈유로 바르는 흰 물감) 칠을 열 번 이상 하고 사포질을 해서 최대한 매끄럽고 부드러운 단면을 만들어요. 그 위에 묘사를 시작하죠. 세밀한 묘사를 위해 이미지를 확대 출력해 관찰하기도 해요. 오래된 사물의 감성을 소중하게 여겨서 사물의 질감과 구조를 생략할 수 없더라고요.
팬지 꽃 요정의 다리를 불에 타들어가는 성냥으로 표현했는데요.
조 | 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사라져가는 사물을 표현하고 있어요. 어릴 적에 봤던 오래된 사물을 만나면 소꿉친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에요. 그 사물들이 사라져가니까 아쉽고 안타까웠어요. ‘그럼 내가 그림 안에서 새로운 쓸모를 만들어줄게’라고 생각한 거죠. 마치 인형 놀이를 하듯 정지된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한 거예요. 또 성냥이 불에 타는 시간처럼 꽃봉오리가 활짝 피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들잖아요. 그렇게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순환을 얘기하는 캐릭터예요.
왜 팬지 꽃인가요.
조 | 우리나라 화단에 가장 많이 심는 꽃이 팬지예요. 방한 식물이라서 겨울을 이기는 꽃이기도 하고요. 한겨울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갔는데 눈 속에 팬지가 생생히 피어 있었어요. 그런 강인함에 감동받아서 그리게 됐어요. ‘나를 기억해달라’는 꽃말이 이 시대에 살던 사람과 사물을 기억해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고요.
그림을 담은 앤티크한 액자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조 | 액자 시리즈 작품들인데요. 평소 앤티크한 오브제 모으는 걸 좋아해요. 액자도 오래된 사물로 보이더라고요. 사물 그림에 맞게 작업한 액자를 작품의 일부로 여긴 시리즈예요.
승윤 작가님의 그림은 시원하게 흐르는 폭포 같아요. 어떻게 작업하고 계신가요.
최 | 계획을 갖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림이랑 대화하고 합의해가면서 작업해요. 계획을 세우면 계획대로 하기 싫어지고, 계획대로 흘러가지도 않아요. 계획과 계획이 없는 선이랄까요. 그 지점에서 주제에 따라 다르게 작업해요.
직접 유화를 만들어 쓰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최 | 일반 유화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질감이나 흩뿌리는 느낌을 낼 수 없더라고요. 작업 도구도 그렇고 기술적인 연구를 많이 했어요. 작업에 따라서 시원한 움직임을 요구할 수도 있고, 크게 그려야 할 수도 있고, 표현에 필요한 도구가 다르잖아요. 붓 하나로만 그림을 그리면 표현이 한정되더라고요. 2m짜리 스퀴즈를 직접 만들거나 포장지, 휴지 등 여러 도구를 사용해서 작업해요.
지난 8월 프린트베이커리 한남점에서 열린 승윤 작가님 개인전도 그렇고, 이번 전시에서도 유독 파란 계열 색이 자주 보여요.
최 | 특별히 푸른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파란색은 차가움과 뜨거움 두 가지 의미를 지녀요. 일반적으로 차가운 색이라 생각하지만, 가스 불을 보면 고온 부분이 파란색이에요. 별도 가장 뜨거운 별이 파란색이고요.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지닌 역설이 ‘반대의 법칙’이라는 제 작업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죠.
선의의 경쟁자, 동료로 사는 법
최승윤 작가의 작업 모습.
조 | ‘러브도트’ 전시 당시 기획을 주관한 ‘갤러리 다온’ 관장님이 저희 둘 작가 노트가 비슷하다고 하셨어요. 승윤 작가님은 움직임을 정지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반대의 이론에서 그림을 그리고, 저는 사물이 사라지지만 다시 생겨난다는 생각으로 작업하거든요. 합동 작품도 그 관장님이 먼저 제안해주셔서 시작했는데, 이번이 벌써 세 번째가 됐어요. 이 또한 재밌어요. 결혼하기 전에 승윤 작가와 함께 2인전을 연 적이 있는데, 합작품까지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그림을 합쳐서 보면 꽤 잘 어울렸거든요.
작가 부부로서 장점이 있다면요.
조 | 저희는 승윤 작가님이 주로 리드해요. 이번 전시 주제를 미리 생각해둔 게 있었는데 승윤 작가님이 전시 공간을 보고 밝게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완전 수정했어요. 그런데 항상 보면 승윤 작가 말이 맞아요(웃음).
최 | 스케줄 말고 다른 의견 충돌은 없어요. 정은 작가 님이 조금 느린 편이라 “(이렇게 해서) 완성이 되겠냐” 하고 장난으로 핀잔을 주곤 하죠(웃음).
조 | 옆에서 닦달을 많이 하고 엄마 역할, 매니저 역할을 해줘요.
부부이기 전에 작가 동료로서 서로의 어떤 점을 존경하나요.
조 | 저는 큰 사이즈의 그림을 잘 못 그리는데요. 승윤 작가님은 캔버스가 크면 클수록 자신 있대요. 그 말이 멋지게 들렸어요. 진짜 자신감이 묻어났거든요. 본인이 원하는 크기의 멋진 작품을 많이 그려서 전시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최 | 정은 작가님의 성품이요. 작은 거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는데, 그게 그림에 영향을 미치거든요. 별게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부분이에요. 가족에게 잘하는 거라든지, 힘들지만 중요한 일을 잘해서 좋아요.
판매율이 전시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최 | 판매도 물론 중요하죠. 판매가 안 되면 갤러리 쪽에 미안하니까요. 그래도 저는 판매가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모든 작품에는 주인이 다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림이 (꼭 맞는) 주인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죠. 빨리 팔리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시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와 갤러리 대표, 큐레이터가 함께 만족하면 이미 좋은 전시라고 생각해요. 누구한테 보여줘도 당당하고 뿌듯한 전시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아트페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예요. 페어는 며칠 안에 판매가 돼야 하잖아요. 급하게 판매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제 그림들이 다 주인을 찾을 거라고 생각해요(웃음).
조 | 저는 지난 전시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전 할 때마다 새로운 테마와 주제로 전시하려고 하는데, 분명한 건 전과 비교해 달라진 게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고민하면서 전시를 준비해요.
2022 키아프·프리즈 아트페어가 뜨거운 관심을 받았는데요. 정은 작가님은 ‘키아프 플러스’에 출품하셨죠. 유명한 대규모 페어에 출품해보니 어떠셨어요.
조 | 페어는 짧은 기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기 때문에 홍보 효과가 크더라고요. 제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페어에서 처음 보고 마음에 들어 하기도 하고요. 전시는 관람객이 이미 제가 누구인지 알고 찾아오는 반면, 페어는 불특정 다수에게 제 그림을 선보일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제 그림을 좋아할 미래의 누군가를 만난다는 게 의미 있죠.
신진과 중견 작가 사이에 있는데, 어떤 점에 집중해서 작업하나요.
최 | 자기 세계관에 빠져 있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미술 시장의 변화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단기간의 성과에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하죠. 작품이 팔리든 안 팔리든 내 작품의 가장 소중한 평가자는 자신이거든요. 어떤 게 좋은 작품인지 고민할 것도 많고요. 흥행 여부에 신경을 안 쓸 수는 없겠지만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되죠. 더 성공하고 더 잘나가면 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이클 잭슨같이 노래와 춤,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는 유명한 사람도 그 위치에서 온갖 루머와 비판에 시달렸잖아요. 트렌드를 더 잘 반영한다고 해서 내 그림이 잘 팔리고, 내 멘털이 회복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주변 시선에 개의치 않고 나만의 세계관에 집중하면서 발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국내 컬렉터들 사이에서 승윤 작가님의 작품이 인기가 많은데요.
최 | (운이 좋게도) 국내에서 작품이 많이 팔리긴 했는데, 그렇다고 작품 가격을 갑자기 높이고 싶진 않아요. 해외에서는 절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거든요. 작품 가격을 올리는 건 조금 더 나중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유롭게 작업에 집중해서 저변을 넓히고, 전 세계에 제 작품을 알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앞으로 작품에 어떤 요소를 더 담아내고 싶으세요.
조 | 제가 살고 있는 시대요. 아날로그같이 저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완성하고 싶어요. 사라지는 것을 그림으로 남겨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최 | 전 두 가지가 목표가 있는데요.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 됐으면 하고, 저의 모든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으면 좋겠어요. 소장한 작품을 창고에 두는 경우가 있어요. 내 작품이 유명한 그림이라면 창고에만 두진 않을 거란 말이죠. 그림도 오래 보관하면 썩어요. 그런 면에서 자식 같은 작품들을 책임지기 위해 작가에게 좋은 그림을 그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제 작품을 벽에다 소중하게 걸어둘 수 있게요.
#조정은작가 #최승윤작가 #여성동아
작가’s PICK
조정은 작가가 고른‘함께 그리는 무지개 2022-1’, oil&acrylic on canvas, 73x61, 2022.
최승윤 작가의
‘함께 그리는 무지개 2022-2’, oil&acrylic on canvas, 97x194, 2022.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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