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합창단 ‘뜨거운 씽어즈’가 5월 6일 열린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축하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나문희가 JTBC 예능 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에서 한 말이다. ‘뜨거운 씽어즈’는 시니어 배우들의 합창 도전기를 담은 프로그램. 나이 총합 990살, 연기 경력 500년에 이르는 참가자들이 100일 동안 훈련을 거듭한 끝에 영화 ‘위대한 쇼맨’(2017) 주제곡 ‘This Is me’를 라이브로 선보이는 모습을 담아 뭉클한 감동을 줬다.
이 프로그램에는 프로 뮤지컬 배우, 천둥 같은 성량을 자랑하는 가수 출신들도 참가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가장 깊은 울림을 준 주인공은 나문희, 그리고 그보다 네 살 더 많은 배우 김영옥이었다. 후배들이 목청 좋게 합창곡의 하이라이트를 불러 젖힐 때 백발이 성성한 김영옥은 이렇게 읊조린다. “힘에 겨울 땐 고갤 떨구렴. 겁에 질리면 눈을 감으렴. 네 눈물, 그 아픔 모두 너의 노래야.” 한 음절 한 음절 정성스럽게 건네는 그의 내레이션에 객석에 앉은 기라성 같은 스타들 눈이 하나같이 촉촉이 젖었다.
잔소리하는 대신 경청하는 새로운 시니어의 등장
김영옥·나문희·박정수가 MC를 맡아 젊은이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진격의 할매’(왼쪽)와 시니어 프로그램의 원조격인 ‘꽃보다 할배’ 포스터.
국내 최고령 현역 배우 김영옥이 등장한 예능 프로그램은 또 있다. 5월 종영한 tvN ‘조립식 가족’. 혼인·혈연 등으로 엮이지 않은 젊은이들이 한집에 모여 사는 모습을 담은 이 프로그램에서 김영옥은 메인 진행자로서 젊은이들과 소통했다. 그는 노인이라면 흔히 할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 예를 들어 “혼기가 꽉 찼는데 왜 결혼할 생각 안 하고 친구끼리 사느냐”라든지 “오래 사귀었는데 동거 그만하고 결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같은 뻔한 말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뭔가 조언하고 간섭하는 대신 각각의 이유로 한 지붕 아래 모여 사는 청년들의 새로운 주거 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성의껏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많은 시청자의 찬사를 받았다.
김영옥에 앞서 ‘쿨한 시니어’로 각광받으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배우 윤여정의 인기 이유도 비슷했다. 지난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그는 트렌디한 패션 스타일, 젊은이들과 격의 없이 농담을 나누는 열린 태도 등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내로라하는 세계 영화계 셀럽들 앞에서 “내 이름을 똑바로 발음해달라”고 요구하고,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 불리는 기분이 어떤가”라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나는 제2의 누구가 아니라 윤여정”이라고 하는 등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 또한 ‘윤여정 신드롬’의 배경이 됐다.
6월 5일 종영한 tvN 예능 프로그램 ‘뜻밖의 여정’은 윤여정의 이런 매력을 또 한 번 확인시킨 작품. 나영석 PD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시상자로 참석한 윤여정의 미국 일정에 동행해 그의 일상을 관찰했다. 이 프로그램에서 윤여정은 이면지에 빼곡하게 영어 문장을 적어가며 인터뷰를 준비하고,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염원하며 수어를 연습하는 등 여전히 치열하고 도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나영석 PD를 비롯한 제작진이 나이 듦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 “내가 그 나이 지나봐서 아는데…”라는 말로 거들먹거리는 대신 “나도 70대는 처음”이라는 말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젊은이의 고민 상담을 빌미 삼아 자신의 성취를 과시하려 하는 대신 “나 역시 같은 처지”라며 세대 간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인생에 목표가 없어지곤 하잖아요. 그런데 여정 언니가 보여줬죠. 무언가를 이루기에 우리가 결코 늙지 않았다는 걸요.”
윤여정의 친구로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재미 애니메이션 디렉터 김정자 씨가 한 얘기다. ‘달마시안’ ‘심슨’ ‘빅 히어로 6’ 등 걸출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해 에미상까지 수상한 68세 현역 김정자 씨 또한 멋진 시니어의 표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이들을 대중 앞에 불러낸 나영석 PD는 2013년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를 통해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 등 당대의 노배우를 핫한 예능의 주역으로 ‘소환’했던 시니어 예능 선두 주자. ‘꽃보다 할배’는 “노인이라면 모름지기 어떠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부수고 그들도 여전히 개성 강한 존재임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화 ‘코다’로 제94회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조연상을 받은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왼쪽)가 시상자 윤여정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의 세대 갈등은 날로 첨예해지는 모양새다. 공적인 공간에서 어리다고 무시당하는 이들은 뒤돌아서면 기성세대를 ‘라떼’ ‘꼰대’라는 말로 조롱한다. 이들 앞에 머리가 희게 셌지만 여전히 어떤 부분에서는 자신이 서툰 존재라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분야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긴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니어의 존재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시니어들이 신체의 노쇠함에 굴복하지 않고 마침내 목표를 이뤄내는 모습은 젊은이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을 용기를 줄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 최근 예능 시장에서 시니어 배우들이 각광받는 이유일 터. 어쩌면 젊은이들은 자신이 무엇인가 배울만한 어른을, 그들에게 받는 위로를, 더 나아가면 세대를 넘어서는 소통을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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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뉴시스
사진제공 백상예술대상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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