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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놀란이 놀란했다” ‘오펜하이머’ 감상 포인트

심미성 프리랜서 기자

2023. 08. 22

손꼽아 기다리던 놀란의 신작이 도착했다. 한국 관객들이 특히 사랑하는 그의 첫 전기영화. 

‘오펜하이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토대로 기획된 전기영화다. 왜 오펜하이머에게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이를 이해한다면 한 인물에 바친 이 영화가 가게 될 향방을 대략 점쳐볼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신의 이름이다. 그는 그 이유로 코카서스산맥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된다. 인류에게 원자폭탄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던 이론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숙명에 빗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는 별칭이 나왔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필름 촬영을 고수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필름 촬영을 고수하는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는 다소 어지러울 수 있는 3개의 시점을 바삐 오간다. 선형적이지 않은 여러 시점을 교차해나가는 방식은 그간의 작품을 고려해봤을 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기라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펜하이머’에서 전개되는 3개의 시점 교차는 그다지 특별한 기교는 아니다. 오히려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3가지 사건을 담담히 제시하며, 당시 그를 향했던 세상의 서로 다른 시선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오펜하이머가 미국 주도의 핵무기 개발 계획을 일컫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돼 원자폭탄 개발에 힘쓰는 첫 번째 시점. 그리고 원폭 개발에 성공해 국제적 명성을 얻자마자 매카시즘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사상 검증대에 놓인 오펜하이머의 비밀 청문회가 두 번째 시점. 그로부터 몇 년 뒤, 오펜하이머와 종종 갈등을 빚었던 스트로스의 장관직 청문회가 세 번째 시점이다.

이 세 번째 시점만이 유일하게 흑백 화면으로 표현되는데, 시기상으로는 과거가 아니라 가장 후반부 시점에 해당한다. 이를 흑백 화면으로 구분해둔 것은 오펜하이머에게 앙심을 품어왔던 스트로스의 내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시기상의 시점보다는 인물의 시점을 강조키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내로라하는 물리학 거물들이 제2차세계대전 전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것만큼이나 화려한 캐스팅도 눈길을 끈다. 그동안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페르소나로 활약해왔던 킬리언 머피는 유약하면서도 강단 있는 인물인 오펜하이머의 절제된 고뇌를 탁월하게 연기하며 놀란 영화에서의 첫 주인공 역을 훌륭히 해냈다. 또 오펜하이머와의 크고 작은 대립으로 쌓인 질투심과 피해의식의 끝에 보복을 감행하는 스트로스 제독 역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한 그로브스 장군 역은 맷 데이먼이 맡아 굵직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의 연인이자 공산주의자 진 태트록 역에 플로렌스 퓨, 생물학자 출신의 아내 키티 역에 에밀리 블런트가 분해 이들 역시 완벽히 새로운 인상으로 새겨진다. 그뿐 아니라 베니 사프디, 라미 말렉, 데인 드한, 케네스 브래너, 케이시 애플렉이 짧지만 인상적인 순간들을 빚어내고, “내 손에 피가 묻었습니다”라는 오펜하이머의 고백에 심기가 불편해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역할에 게리 올드먼이 깜짝 출연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시민 케인’의 꿈을 꾸는가

전작 ‘테넷’을 촬영한 직후 놀란은 ‘테넷’의 주연 배우였던 로버트 패틴슨에게서 오펜하이머 연설집을 선물 받았는데, ‘테넷’의 차기작으로 ‘오펜하이머’가 만들어질 줄은 패틴슨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놀란의 첫 번째 전기영화의 주인공이 된 오펜하이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놓였던 인물일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물리학에 대한 순애보적인 열망도, 행정가 혹은 정치가적인 리더십도 그의 일면이다. 연구원들의 노조 설립을 주장하면서도, 당원을 통해 수년간 스페인의 공화국군에 기부금을 냈음에도 공산당에 입당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역시 그의 일면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적임자를 찾던 그로브스 장군이 오펜하이머에 대해 수집한 평판 역시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그를 내성적이지만 열렬한 물리학도로, 누군가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자로 칭했다. 이러한 평판 앞에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자신에 찬 모습으로 “내가 적임자다”라며 응수하는 오펜하이머의 모습은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쩌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펜하이머’를 통해 21세기의 ‘시민 케인’(1941)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영화 역사상 최고의 작품이라 칭송받는 ‘시민 케인’은 한 언론 재벌의 일생을 다각도로 다룬다. 윤리와 정치, 철학이 서사에 한데 어우러져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한 킬리언 머피가 첫 주연을 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에 자주 출연한 킬리언 머피가 첫 주연을 맡았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향한 엇갈린 평가가 그에 대한 성패를 어느 정도 요약해주고 있다. 놀란이 택한 인물 오펜하이머는 전기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오펜하이머라는 20세기 프로메테우스는 제2차세계대전의 종식을 위해 원자폭탄을 나치보다 더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미 정치적 아이러니라는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이었고, 원폭 이후의 세계 질서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게 뻔했다. 오펜하이머의 업적은 위대함과 파국의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전쟁은 종식됐으나 세계 질서는 핵무기의 위협과 불안으로 재편됐다. 오펜하이머는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라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처럼 무거운 죄책감을 짊어질 운명이었다.

북미에서 R등급(17세 미만은 부모 동반이 필요한 등급) 관람가를 받았던 것과 별개로 국내에서는 15세 관람가로 개봉해 논란이 됐다. 노출 수위에 맞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논쟁의 여지는 관람 등급이 아니라 여성 캐릭터의 소비에 초점을 맞춰야 좀 더 분명해진다. 연인 진 태트록이 오펜하이머의 인생에 끼친 사상적 영향 등을 드러내기 위해 과도한 노출 장면, 관능적인 면을 앞세운 것은 분명한 약점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내 키티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프로젝트 기지의 많은 여성 학자의 지적 활약 또한 일축되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한 의구심을 더욱 불러일으키는 것은 전반적으로 영화가 결국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의 생애를 다각도로 변호하고 있다는 인상일 터다. 3개의 시점을 경유하여 얻은 관점이 다양한 상황을 드러내기에는 충분할지언정, 인물의 다층적 면모를 제시하기에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오펜하이머’는 21세기의 ‘시민 케인’이라고 평하기엔 아쉽다.

그런데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꼽자면, 2개의 원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이후 오펜하이머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임무 수행의 목표로 달려가는 동안 시종일관 담담한 진력만을 보여주었던 얼굴 뒤로, 오펜하이머가 업보를 체감하는 순간이 어지럽게 드러난다. 포커스 아웃된 군중, 환호에 이어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 사라진 소리와 섬광 끝에 재로 변한 시신의 환영을 보는 오펜하이머의 착란. 절제된 호흡으로 고조되던 ‘오펜하이머’에서 내면묘사가 가장 눈에 띄게 제시되는 장면이다. 해당 시퀀스는 희생을 막기 위해 더 급진적인 희생을 감행했던 역사의 아이러니와 함께, 창조와 절멸의 순간에 놓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탄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놀란 #킬리언머피 #여성동아

사진제공 유니버설픽쳐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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