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호 표지.
‘여성동아’ 시대 표지화는 신인 작가 발굴보다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한 화가에게 작업을 의뢰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서양화가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정도다. 천경자, 박항섭, 김기창, 문학진, 오승우, 김태 등의 화가가 그린, 처음 보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 큰 희열을 안긴다. 이번 호에 소개할 작가는 한국형 추상화가 문학진이다.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문학진은 10여 차례 ‘여성동아’ 표지화를 그렸다. 표지화 속 동양화와 서양화의 중간쯤 어디에 속한 이미지가 작가의 고민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2019년 95세를 일기로 영면한 문학진은 화가로서의 오랜 활동과 업적으로 한국 서양 회화의 기초를 다졌다. 1924년 출생해 1953년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그는 광복 이후 한국 미술교육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1958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고 꾸준히 학교와 화단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작업과 경력을 쌓아갔다.
문학진은 1970년대까지 탁상 위에 놓인 토기, 화병, 꽃다발, 과일 등을 그리는 정물화와 그 곁의 소녀를 모델로 한 작품을 발표한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물과 정물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평온한 감정을 표현했는데, 색감이 모두 부드럽고 안정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동양화에서 느껴지는 색의 번짐이 특징이기도 하다.
‘여성동아’ 표지화 작업은 바로 이 작업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잔잔한 색채의 배치와 함께 여성 모델의 매력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 표지화들을 통해 1970년대까지 작가의 힘이 구상미술에 집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진을 가톨릭 종교 화가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1982년 한국 가톨릭교회 공식 성인 영정 제1호인 ‘김대건 신부 성인화’와 ‘103위 순교 성인화’ 등 다수의 천주교 성화를 그린 바 있다. 이 그림들은 우리나라 성당에는 거의 다 걸려 있어 문학진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됐다.
동양화의 부드러운 채색 서양화 기법으로 구현
1968년 7월호, 1972년 9월호, 1973년 5월호(왼쪽부터) 표지화.
문학진의 표지화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동양화의 부드러운 채색과 맑고 가벼운 분위기가 서양화 기법으로 구현됐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한국화 환경의 전통 속에서 제한적으로 소개되던 서양화 장르는 이렇게 유라시아 동쪽 끝과 서쪽 끝 그 어디쯤에 존재했다는 한계점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문학진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한국의 서양화가들은 동양화 특유의 기법과 철학을 서양화로 옮기는 방법을 고민했다. 세계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목표와 함께 재료의 변화에 적응하고 여태까지 연습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법들을 익혀야 했다. 동시대 서양의 최신 유행이 유입되고 소개되는 격랑 속에서 주제와 기법, 미학적인 근본을 이해하는 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작가들에겐 힘겨운 숙제였다. 서양 전통과 한국 전통의 융합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을 요구하는 현대미술에 어떻게 응답할지 고민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인물화들을 그리는 동안 문학진은 그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국전은 경직된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부터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표현주의 바람이 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문학진 역시 초기 입체파와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을 접한 후에 자신의 작업에 적용하는 시도에 착수한다.
한계를 넘어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
문학진 화백이 작업하는 모습.
그리고 또 한 가지, 문학진은 고민하고 실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인물이었던 것 같다. 고민의 결과가 추상회화에 반영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문학진은 인물과 정물 등 대상을 해체하고 재해석해 새롭게 구성하는 입체주의에 기반을 두는 작업을 시도했다. 또 밝은 색채와 더불어 나이프를 사용한 질감이나 물감의 번짐 효과 등을 작품에 들여왔다. 동양화의 번짐 효과가 서양화에 섞이게 되는 지점에서 그의 색채 추상도 시작됐다.
니콜라 드 스탈(1914~1955)이라는 러시아계 프랑스 작가가 있다. 구상 회화에서 출발했던 그 역시 구상화보다 재료의 느낌과 구성의 미학을 맛볼 수 있는 추상회화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스탈의 그림들은 마치 벽을 옮겨놓은 듯 단단하고 거칠다. 색의 조합에선 리듬감이 느껴진다. 이것은 미술이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거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일깨워주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문학진 역시 입체파와 마크 로스코로 대표되는 색채 추상 그리고 앵포르멜(informalism·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융합해야 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 1990년대까지 이어진 그의 고민은 작품으로 드러난다. 한국형 추상화의 시도와 완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90세가 넘어서도 개인전을 개최하고 작품을 발표하는 원로의 걸음 속에서, 우리는 본질을 찾아 최선을 다한 작가의 집념과 열정을 발견할 수 있다.
정물 91-A(1992).
문학진이 했던 이 말은 구상화에서 벗어나 추상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하지만 그의 출발이 전통적인 구상화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섰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진의 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정물과 구상, 인물을 그린 ‘여성동아’ 표지화, 후반부의 추상화는 모두 연결돼 있다.
작품은 경험의 결과물이다. 소중한 경험은 일견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수많은 실패가 있기에 가능하다. 한계가 많았던 초기 우리나라의 미술계에서 혼자 시도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은 그 때문에 소중하다. 여기 문학진의 그림은 그 여정의 한 대목을 보여주고 있다.
안현배는
파리 제1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사를 공부했다. 프랑스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소에서 ‘예술과 정치의 사회학’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사학자로서 예술을 사회와 역사의 관계 속에서 살핀다. 저서로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의 예술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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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중식 기자 동아DB
사진출처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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