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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부엌에서 버무려지는 마법 같은 사랑과 노동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2024. 03. 19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익히 알려진 마술적 리얼리즘은 아이러니하게도 환상을 통해 현실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창을 제공한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은 그 마술적인 창으로 한 막내딸의 삶을 조명한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책장에서 멕시코 소설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1989)을 꺼냈다. 포스트잇이 붙은 페이지를 펼치니 밑줄이 쳐 있었다. 15년 전쯤 그은 줄이다. 주인공 티타 삶의 불꽃이 꺼져가고 있었을 때, 그 불씨를 보살피던 브라운 박사가 한 말이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라틴아메리카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통에 놓인 소설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양식을 말한다.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할 수 있다. 삶이 본래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거지만, 논리와 합리성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그 환상이 지나치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마술적 리얼리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이제 풀어놓을 소설의 줄거리에서 환상과 비약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티타는 세 번째 딸이자 집안의 막내였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 마마 엘레나의 젖이 말라버렸다. 부엌을 책임지던 나차가 자연 티타를 먹이는 책임을 맡았다. 티타에게는 요리 도구가 장난감이었고 음식 만들기가 놀이였다. 부엌이 티타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다.

이런 티타와 사랑에 빠진 페드로가 청혼하러 왔다. 마마 엘레나는 막내딸은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돌봐야 한다는 집안 전통을 내세우며 이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언니 로사우라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페드로는 이 이상한 결혼을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이야기 전개가 범상치 않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1월부터 12월까지의 각 장에 요리 레시피 이름이 함께 붙어 있다. 6월의 성냥 반죽만 예외다. 2월의 요리는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웨딩 케이크였다. 티타는 울면서 180인분의 케이크를 만들었다. 이제 마술적 리얼리즘이 등장할 차례다. 웨딩 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내 토하기 위해 어딘가로 뛰어가야 했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뻗어나가는 삶

1992년 영화로 만들어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1992년 영화로 만들어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3월의 요리는 ‘장미 꽃잎을 곁들인 메추리 요리’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신비로운 장면은 바로 여기다. 티타의 메추리 요리를 먹은 또 다른 언니 헤르트루디스는 온몸에 진땀을 흘리며 며칠 전 본 혁명군 장교를 떠올렸다. 헤르트루디스는 샤워장으로 달려갔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나무판자로 만든 샤워실이 불길에 휩싸였다. 헤르트루디스는 벌거벗은 채로 뛰어나왔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향기는 장밋빛 구름이 되어 전투 중이던 혁명군 장교를 휘감았다. 말을 타고 달려온 장교는 헤르트루디스를 태우고 어딘가로 떠나갔다.

티타의 삶에서 새로운 변화는 페드로와 로사우라 사이에 태어난 아기와 함께 시작됐다. 로사우라의 진통이 시작됐을 때 우연히 티타 혼자만 집에 남아 있었다. 티타는 출산에 대해 아무 지식도 경험도 없었지만 아기를 받았다. 로사우라는 젖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티타의 젖이 나와 아기는 그 젖을 먹고 컸다. 티타는 페드로의 도움으로 몰래 젖을 물려 키운 조카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했다.

4월의 요리는 아몬드와 참깨를 넣은 칠면조 몰레. 조카의 세례식 축하 파티를 위해 티타가 정성껏 만든 요리였다. 모두가 파티로 즐거워하고 있을 때, 마마 엘레나가 페드로와 티타가 은밀한 눈길을 주고받는 걸 보게 됐다. 마마 엘레나는 페드로와 로사우라와 아기를 멀리 보내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티타로부터 멀어진 아기는 무엇을 먹여도 탈이 났고, 결국 세상을 떠났다.

티타에게 조카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가 아기를 죽인 거라며 울부짖더니 지붕에 있던 비둘기장으로 올라가버렸다. 다음 날 비둘기장에서 발견된 티타는 넋이 나가 있었다. 마마 엘레나는 티타를 정신병원에 넣기 위해 브라운 박사를 불렀다.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과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미국 판 표지.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과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미국 판 표지.

맨 처음 인용한 글은 브라운 박사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티타에게 한 말이다. 브라운 박사는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다고, 그렇지만 성냥을 하나씩 켜지 않으면 영혼이 육체를 남겨두고 떠나갈 것이라고, 주의와 격려가 섞인 충고를 했다.

티타는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마마 엘레나의 집에서 일하던 여성이 만들어온 7월의 소꼬리 수프를 먹은 티타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티타는 브라운 박사의 청혼을 받아 약혼했다. 자신을 괴롭혀온 마마 엘레나가 세상을 떠나자 티타를 속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티타는 페드로의 곁에서 느꼈던 불안과 고통이 아니라 브라운 박사에게서 느끼는 평화와 안정감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티타를 젖은 성냥갑처럼 만든 건 마마 엘레나의 폭력만이 아니었다. 페드로의 비겁함과 이상한 선택도 그 못지않았다. 페드로는 브라운 박사와 결혼을 약속한 티타와 처음으로 잠자리까지 했다. 티타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언니 헤르트루디스의 생각은 달랐다. 헤르트루디스는 이런저런 경험을 겪은 후 혁명군에 들어가 여장군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혁명군 장교와 결혼까지 했다. 헤르트루디스는 티타에게 페드로와 티타의 사랑이 자신이 본 가장 진실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진실을 묵과하는 실수를 범했으나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난 마당에 더 이상 그러지 말라는 거였다.

페드로와의 관계 후 티타의 배는 임신한 것처럼 불러왔다. 티타는 마마 엘레나가 저승에서라도 저주를 내릴 것 같아 불안에 휩싸였다. 페드로가 창문 아래로 와 사랑 노래를 부르자 죽은 마마 엘레나가 방으로 들어와 티타의 정숙을 비난하고 지옥으로 떨어질 거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그때 티타는 외쳤다.

“나는 나예요! 원하는 대로 자기 삶을 살 권리를 가진 인간이란 말이에요. 제발 날 좀 내버려둬요!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예요! 나는 어머니를 증오해요! 항상 증오해왔다고요!”

티타는 마마 엘레나에게 오랫동안 하지 못한, 해야 했던 말을 했다. 티타가 마마 엘레나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티타가 어머니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자 마마 엘레나는 사라져 조그마한 빛이 되었다. 배의 부기가 가라앉고 생리가 시작됐다. 티타는 비로소 임신의 공포에서도 벗어났다. 티타는 로사우라에게도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고 맞섰다.

티타의 선택은 독특했다. 티타는 브라운 박사와 결혼하지도, 페드로의 곁을 차지하지도 않았다. 티타는 자신을 평생 괴롭힌 결혼 제도 자체를 벗어나버렸다. 12월의 호두 소스를 끼얹은 칠레 고추 요리는 결혼 제도 등을 포함한 관습과 전통에 대한 승리의 요리다.

언니 로사우라는 어머니 마마 엘레나처럼 딸 에스페란사를 전통의 속박에 묶으려 했다. 결혼하지 않고 평생 자기를 돌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타는 자신을 평생 괴롭힌 그 굴레에서 에스페란사를 구하려고 했다. 로사우라는 에스페란사가 평생 자기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교육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티타는 로사우라를 설득해 에스페란사를 교육시켰다. 브라운 박사의 아들과 에스페란사가 사귄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하는 로사우라와 필사적으로 싸웠다. 로사우라는 그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

티타가 에스페란사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한 칠레 고추 요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맛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모두 떠난 농장에서 티타는 페드로와 사랑을 나눴다. 그러고 나서 페드로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티타는 브라운 박사가 선물한 성냥을 하나씩 삼켰다. 페드로와 함께한 격렬한 추억들과 성냥의 인이 불을 일으켰다. 농장은 일주일 동안 불꽃을 뿜었다. 이렇게 티타는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티타가 삶을 찾아가는 여정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과 1992년 만들어진 동명의 영화 모두 성공을 거뒀다.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여성의 사랑과 성 그리고 요리를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는 소설 읽는 재미를 한껏 안겨줬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을 ‘요리 문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각 요리마다 상세한 레시피를 덧붙여 독자들의 흥미를 더했다. 음식과 요리, 부엌을 앞세워 여성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개성 있는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주인공 티타는 자신도 사람이라고 부르짖기까지 참 먼 길을 걸어왔다.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막내딸이기 전에 독립적인 개인이었다.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티타의 삶은 이 권리를 찾아가는 긴 여행이었다. 단숨에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는 않는다. 티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라운 박사와의 만남, 어머니 마마 엘레나와 언니 로사우라의 죽음, 조카 에스페란사의 결혼 그리고 페드로와의 진정한 사랑의 자각이라는 삶 전체를 걸고서야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티타의 노동이다. 아무도 여분의 인간은 아니어야 한다. 누구도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누군가를 씻기는 일을 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티타의 경우가 극단적이긴 하지만 여자들은 이런 집안일, 돌봄노동, 감정노동 같은 무급 노동에 오랜 세월 익숙해져야 했다.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의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무급 노동의 75%를 담당한다. 여성이 점점 더 많은 유급 노동에 참여하는 추세지만 남성이 무급 노동에 참여하는 비율은 크게 증가하지 않고 있다. 고학력 여성은 좀 낫지 않을까 싶지만, 남녀 과학자 간 무급 노동량을 비교한 2010년 미국 논문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남성 과학자의 무급 노동 시간은 여성 과학자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연구에 따르면 싱글 여성과 싱글 남성의 집안일 시간은 비슷했다. 그런데 여성과 남성이 동거를 시작하면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은 증가하고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은 감소했다. 취업 여부와는 관계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2024년에는 좀 나아졌으면 싶지만, 가사 노동의 경우 2019년 평균적으로 하루에 남성이 56분, 여성이 3시간 13분 일했다. 맞벌이의 경우도 남편은 54분, 아내는 3시간 7분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유급 노동은 무급 노동을 기반으로 가능하다. 일터에 나가 남의 돈을 받는 일을 하려면 집으로 돌아와 쉬고 먹고 스스로와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말이다. 남성과 여성의 권력 차이는 이 무급 노동의 분배를 지배한다.

영원한 음식의 기억

무급 노동은 하찮아서 여자에게 주어진 걸까, 여자들이 해서 하찮은 일이 된 걸까. 아무도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급 노동은 하찮은 걸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든 생각이다. 집에서 스스로와 가족을 돌보는 것도 사회로 나아가 일해서 돈을 벌고 경력을 쌓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사항이다. 티타가 정성과 솜씨를 다해 만들어내는 요리가 헤르트루디스가 벌이는 전투보다 하찮은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응답을 들려준다. 응답하는 사람은 에스페란사의 딸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에스페란사는 불탄 농장의 잔해에서 티타의 요리책을 찾아냈다. 시간이 한참 흘러 에스페란사의 딸은 엄마가 만든 음식의 냄새와 맛, 음식을 준비하며 나누었던 대화, 엄마가 해주었던 크리스마스 파이가 너무나 그립다고 추억한다. 농장은 사라지고 혁명군은 역사에 남았지만, 이 추억과 그리움은 구체적인 음식으로 남아 있다.

우리말 제목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원제는 ‘초콜릿을 끊이는 물처럼(Como agua para chocolate)’이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끓어오른 감정의 상태를 지칭한다. 삶이 언제나 극적으로 달궈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폭발할 것 같은 열정의 힘이 삶을 끌고 간다. 그 열정으로서의 삶 안에는 사랑, 욕망, 요리, 추억, 그리움이 모두 담겨 있고 살아 있다.

티타는 열정에 자신의 삶 모두를 바쳤다. 그 열정에 이르는 과정은 자아의 독립으로 나아가는, 요리와 같은 일상과 함께 걸어가는 길이었다. 일상과 노동과 함께 가는 독립과 완성의 길. 이 길은 여성에게, 아니 우리 인간 모두에게 포기해서는 안 될 도정(道程)이다.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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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민음사 
사진출처 아마존 인스타그램@chocolate.esquivel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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