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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출판사들이 ‘과시용 독서 컬렉션’ 말아주는 이유

조지윤 기자

2024. 12. 09

텍스트 힙을 두고 ‘패션 독서’라고 비웃은 이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은 허영심에서라도 책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봤는가. 

출판사들은 X를 통해 과시용으로 독서할 수 있는 책을 추천했다.

출판사들은 X를 통해 과시용으로 독서할 수 있는 책을 추천했다.

올해 가장 부상한 트렌드를 꼽으라면 단연 ‘텍스트 힙’이다. 텍스트 콘텐츠, 즉 글을 다루는 것이 멋있고 개성 있다는 뜻의 신조어다. 글을 다룬다는 점에서 읽고 쓰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지만 특히 ‘독서’를 힙하다고 생각하는 2030세대가 늘어났다. 이들은 요즘 읽는 책에서 좋은 문장을 찍어 올리고, 소셜미디어(SNS) 혹은 독서 모임을 통해 감상을 나눈다. 책갈피나 북 커버 등 책 관련 제품을 구매하는 데 기꺼이 지갑을 연다. 도서 관련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지난 6월 말 폐막한 서울국제도서전의 관람객 수는 약 15만 명으로 전년 대비 15% 늘었다. 독서를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를 넘어 책을 즐기는 과정으로 확장한 것이다.

올 초부터 국내에서 차츰 퍼져가던 텍스트 힙은 지난 10월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더욱 가속화됐다. 서점이 문을 열기도 전부터 줄을 서서 책을 구매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가 하면 수상 발표 엿새 만에 한강 작가의 종이책은 103만 부 가량 판매됐다. ‘한강 신드롬’은 문학계 전반으로 확산되며 국내 출판계 불황을 역대급 호황으로 탈바꿈시켰다. 예스24에 따르면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지난 10월 10일 이후 6일 동안의 도서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421.1% 늘어났다. 카카오가 올해 12회째 주최한 도서출판 공모전 응모작 수도 1만437건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카카오 관계자는 “참가자 수가 직전 대회에 비해 약 20% 증가했다”며 “이전엔 매년 한 자릿수로 소폭 느는 추세였는데 올해 갑자기 많아져 놀랐다”고 전했다.


텍스트 힙? 사실상 ‘과시’죠

교보문고와 서울국제작가축제는 ‘과시용 독서’ 키워드를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교보문고와 서울국제작가축제는 ‘과시용 독서’ 키워드를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기울어가던 출판업계가 나날이 축제 분위기인 가운데 일각에서는 텍스트 힙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책을 그릇된 목적으로 이용한다는 쓴소리다. 지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읽지도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거나 오직 표지의 미적인 가치만 추구하며 인테리어용으로 책을 사들이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대상을 희화화하는 쿠팡플레이의 예능 프로그램 ‘SNL코리아’도 어김없이 텍스트 힙을 풍자했다. 콘텐츠 속 독서모임 참석자들은 “저는 한강 작가님이 노벨상에 걸맞은 소설가라고 생각해요. 소설이 영어로 ‘novel’이잖아요”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적어도 육식주의자는 아니겠구나” 등의 대화를 이어간다. 보여주기 위한 독서를 하는 바람에 책을 제대로 이해 못하고 맥락 없이 이야기 한다는 것을 우습게 연출한 것. 하지만 이를 두고 풍자가 아닌 조롱이라는 반발이 이어졌다. 설령 허세 독서라고 할지라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해악을 끼치는 문화도 아닌데 희화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정작 당사자인 출판업계는 ‘과시용 독서’조차 반기고 있다. 허세 때문에 책을 구매하고 읽더라도 진짜 독서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 때문이다. 나아가 ‘패션 독서’에 대한 힐난을 역으로 홍보에 이용하기도 한다. 교보문고는 11월 ‘과시용 독서 콜렉션’을 공개했다. 소개 페이지에 “상 받은 책, 두꺼운 책, 어려워 보이는 책, 가지고 있으면 똑똑해 보이는 책, ‘너 책 좀 읽는구나’ 이야기들을 수 있는 책을 추천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다채로운 도서 목록을 선보였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하는 서울국제작가축제는 11월 ‘독서 사진 자랑 이벤트’를 진행했다. 독서를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텍스트힙 해시태그와 함께 SNS에 공유하는 것이 요지다.

출판사들도 너나할 것 없이 과시용 독서 목록을 공유했다. ‘현암사’는 8348쪽 분량의 두꺼운 법전이야말로 과시용 독서에 진정으로 적격하다며 추천했다. ‘위즈덤하우스’는 과시용으로 추천한 책들을 여러 구도로 찍어서 책을 한껏 과시하는 노하우를 슬쩍 드러냈다. ‘한겨레출판’은 인테리어 오브제로 쓸 만한 책, 감성 과시를 위한 책, 지적 허영을 위한 책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제안했다. 책 ‘왕가위’를 두고는 ‘집안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두고 누군가 집에 놀러오면 꼭 이 책을 펼쳐보라 권해보세요’라며 과시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줬다.

여기에 응한 독자들도 X(옛 트위터)를 통해 본인 집의 과시용 독서 구역을 자랑하거나 추천 목록을 게재했다. 과시용 독서 목록에 포함되는 책들은 주로 ‘벽돌 책’이라고 불릴 만큼 두꺼운 것이 기본이다. 혹은 표지 디자인이 눈에 띌 만큼 미학적이거나 제목이 철학적이어서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책이다.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 초판이나 한정판 표지의 책들도 과시용 독서로 합격이다.

이처럼 책을 일종의 액세서리처럼 여기는 것을 두고도 출판업계가 불쾌해 하지 않는 까닭은 그 이면의 기회를 알기 때문이다. SNS에 올릴 만한 글귀 한 구절을 찾기 위해서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독서의 물꼬를 튼 것이다. 남들에게 지적으로 보이기 위해 서점을 찾았다고 해도 결론적으로는 서점에 온 것이다.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이를 두고 “책의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확장된 것”이며 “출판은 그 자체로 생태계인 만큼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고 도태되면서 스스로 균형을 잡는다”고 설명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과거 서울문화재단과의 인터뷰에서 “허영이 없으면 문화적으로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가 없다”며 “허영이 없는 사람은 특정한 문화적 시선,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에 대해 영원히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행을 문화로 만드는 법

SNL코리아’에 등장한 과시용 독서에 대한 풍자 장면.

SNL코리아’에 등장한 과시용 독서에 대한 풍자 장면.

텍스트 힙을 향한 조롱을 단지 ‘조롱’으로만 여기고 가벼이 넘기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 기저에는 이 또한 단순한 유행일 뿐이고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비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출판업계도 마찬가지로 고민하는 사안이다. 책이 잠깐의 트렌드로만 향유되다가 다시 고리타분한 과거의 무언가로 전락할까봐 우려하는 것이다.

이를 지속가능한 문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출판업계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의 관심에 들떠 현재 가진 몫으로만 시선을 잡아두기 위해 애쓰다가는 금세 밑천을 드러내고야 만다. 당초 대중에게 고루하다고 인식돼 있다가 쇄신한 전적이 있는 두 가지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논문’이 대표적이다. 논문은 대학생이나 연구자들이 학술적인 목적으로 읽는 콘텐츠에다가 책보다도 어렵고 재미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학술콘텐츠 플랫폼 ‘디비피아(DBpia)’는 ‘논문의 허들을 낮추자’는 목표를 갖고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실제 논문을 쉽게 풀어주는 콘텐츠를 제작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 팔로어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에 디비피아 SNS 담당자는 논문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버렸다.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논문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다는 목표를 뚜렷이 세웠다. 이를 위해 시선을 끌 만한 유쾌한 제목의 논문만 나열하거나 구독자들의 질문에 오직 논문으로만 대답하는 등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었다. 논문 모양의 키 링을 만들기도 했다. 논문이라는 딱딱한 소재를 말랑거리게 만들어낸 디비피아의 인스타그램 계정은 현재 약 팔로어 6만5000여 명을 보유하며 MZ세대 사이 핫한 계정으로 부상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소개한 논문들의 실제 이용 수도 늘어났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학창시절에서 시험 대상으로 먼저 접한 과학은 어려운 존재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과학은 학창 시절 배운 그 어느 과목보다 일상에 밀착돼 있고 그 중요성도 상당하다. 이에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은 첨단 기술에 대한 쉬운 이해를 돕고, 과학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과학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122만 유튜브 채널 ‘안될과학’을 운영하는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가 지박령이 실존하면 발생하는 오류를 지적하며 “어떻게 지평좌표계로 고정하셨죠?”를 먼저 물어보라고 제안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어설프게 아는 것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아무도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며 대중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에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출발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행히 책은 이제 읽으면 ‘힙해 보인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남은 것은 단지 남에게 멋져 보이기 위해서 시작한 독서에 실제로 흥미를 느껴 꾸준히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처음부터 완독을 권할 필요는 없다. SNS에 올릴 이미지 한 장을 연출하기 위해 책장을 펴도 좋고,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몇 쪽을 넘겨봐도 충분하다. 책을 주제로 하는 과정이 고루한 것이 아니라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시키며 차근차근 저변을 넓혀갈 수 있다.


#텍스트힙 #과시용독서 #여성동아

사진출처 교보문고 X 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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