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현대 서울에 입점한 스트릿 브랜드 ‘디스이즈네버댓’ 매장 전경.
박재만 K2 노르디스크 수석 디자이너의 설명이다. 그는 15년간 다양한 국내 패션 기업에서 일하며 최근 일어나고 있는 의류 시장의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봐 왔다. 그의 말대로 국내 패션업계는 현재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규모가 작은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이른바 도메스틱 브랜드들이 빠르게 성장하며 의류 시장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에도 속속들이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것.
백화점들의 도메스틱 브랜드 모시기
온라인에서의 인기에 힘입어 더현대 서울에 입점한 ‘모노하’.
그렇게 더현대 서울에 디스이즈네버댓, 쿠어, 모노하, 인사일런스, 레이브 등 다양한 국내 브랜드가 매장을 열었다. 실무진의 제언은 적중했다. 더현대 서울은 개점 1년 만에 매출이 8000억 원을 넘어섰다. 매출의 50.3%가 20~30세대에서 발생해 도메스틱 브랜드의 위력을 실감하게 했다.
강남신세계 내 ‘W컨셉’ 오프라인스토어.
신세계백화점 관계자는 입점 업체 선정 과정에 대해 “시장조사를 통해 25~35세 사이에 패셔너블한 아이템을 찾으면서도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 집단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입점 브랜드는 이들에게 인기 많은 곳 위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의 분석은 적중했을까. 백화점 관계자는 “신규 매장들은 당초 목표 매출의 130%를 달성했고, 특정 브랜드의 경우 재고가 없어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전했다.
사실 도메스틱 브랜드들의 성장은 201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이뤄져왔다. 판매 기반은 주로 온라인 플랫폼이었다. 대다수 브랜드가 영세하게 시작해 오프라인 매장을 관리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경제학에서는 의류 상품을 대표적인 ‘경험재’로 분류한다. 옷은 직접 입어봐야 비로소 품질을 느낄 수 있는 재화여서다. 다시 말해 온라인에만 머무르는 의류 브랜드의 성공은 절반만의 성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메스틱 브랜드들이 온라인을 넘어 백화점으로, 찻잔 속 태풍이 밖으로 튀어나온 계기는 무엇일까.
젊어지려는 백화점과 파편화된 소비자의 만남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앤더슨벨’.
“백화점 입점이 브랜드와 백화점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윈윈’이 될 수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옷을 산다는 건, 직접 입어볼 수 없는 소비자에게는 아무래도 모험이 될 수밖에 없죠. 브랜드들도 품질을 증명하기 위해 오프라인 채널에 목말라했습니다. 백화점 입점은 도메스틱 브랜드로서는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어 좋고, 백화점 입장에선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 좋으니 둘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각 백화점이 그간 망설이던 도메스틱 브랜드 입점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이유리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젊은 소비자들의 파편화된 성향을 충족시킬 만큼 성장해서”라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국내 소비자들은 패션에 굉장히 민감하고 전반적으로 관심도 많습니다. 직구를 통해 해외 브랜드도 적지 않게 소비하는데, 이는 도메스틱 브랜드들의 높은 인기가 국적이나 접근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의미하죠. 젊은 세대는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다고 판단하면 유통 채널을 가리지 않고 소비하는 파편화된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최근 각광받는 도메스틱 브랜드들은 이런 젊은 세대의 취향을 충족할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죠.”
도메스틱 브랜드들의 해외 진출도 돋보이는 성과다. 2014년 론칭한 ‘앤더슨벨’의 경우 영국 런던의 리버티 백화점을 포함해 입점 스톡 리스트가 150곳을 넘어섰다. 이 외에도 복수의 국내 브랜드는 SSENSE, 네타포르테 등 글로벌 럭셔리 패션 플랫폼에도 여럿 진출해 품절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 편집 숍들은 철저하게 매출에 따라 브랜드를 리스트업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박 디자이너는 도메스틱 브랜드의 해외 진출 성과에 대해 “과거 일본이 서구에서 아시아 패션을 대표할 당시, 일본이라는 이름이 주는 브랜드 파워를 무시할 수 없었다”며 “한국 브랜드의 성공 배경에 근래 한국이 이뤄낸 문화적 성취로 인한 인지도 상승을 무시할 수 없다”고 짚었다.
한국의 꼼데가르송, 이세이미야케 탄생?
강남신세계에 입점한 ‘렉토’ 매장.
일본 패션은 1970년대 초반 꼼데가르송, 이세이미야케, 요지야마모토 등 디자이너의 철학과 개성을 앞세운 브랜드들을 배출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 브랜드들은 일본 젊은 세대의 열광에 힘입어 1980년대 초반 유럽에 진출했고, 프랑스 파리의 런웨이를 누비며 세계적인 브랜드로 거듭났다.
과연 국내 도메스틱 브랜드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가기 위해선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이유리 교수는 고가 브랜드보다는 많은 이에게 사랑받는 대중적 브랜드의 탄생이 K-패션의 성장에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주변에서 한국에서도 세계적인 디자이너, 대를 잇는 명품 브랜드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을 자주 받죠. 굳이 한국 패션이 그런 브랜드를 지향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고객에게 고가의 제품을 파는 브랜드보다 다수의 고객을 만족시키는 대중적인 브랜드가 패션산업에 더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한 명의 김연아를 바라기보단 피겨스케이팅 강국을 꿈꾸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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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thisisnevertaht 렉토 모노하 신세계백화점 앤더슨벨 현대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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