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인재 양성 계획을 맞추려면 여성 인력이 필요한데 기존 기관에는 노하우나 데이터가 부족하니 우리 쪽으로 연락이 와요.”
안혜연(64)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위셋) 이사장의 말이다. 윤석열 정부는 핵심 국정 과제 중 하나로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을 꼽았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맞춰 소프트웨어·인공지능 교육을 강화해 2027년까지 디지털 인재 100만 명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이다. 6월 8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특히 반도체 인재 양성에 대해 “목숨 걸고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위셋도 덩달아 바빠졌다. 정부 기조에 맞춰 다수의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협조를 요청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위셋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2004년 ‘전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로 설립된 이후 지금껏 과학기술계 여성 리더를 양성하고 지속 가능한 여성 과학기술인 생태계를 만드는 데 힘써왔다. 2019년 취임한 안 이사장은 ‘센터’에서 ‘재단’으로 이름을 변경해 단순 지원사업 외에 정책연구 기능을 강화했다. 학생부터 은퇴자까지 전 연령대의 여성 과학기술인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 ‘W브릿지’도 그의 작품이다. 6월 17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난 안 이사장은 “여성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전 생애주기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출산과 육아로 발생하는 경력 단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갖고 있죠. 저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 유입이 부족한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공계 중에서도 특히 공대로 일컬어지는 엔지니어링 분야, 신기술 쪽으로 여성들이 진출하지 않는 현상을 심각하게 보고 있어요.
원인이 뭘까요.
여학생에게 과학자나 공학자가 되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죠. 대다수 부모가 딸이 교사나 간호사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길 바라고요. 꿈과 희망을 주지 않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돼요. 기대가 없으면 내가 관심이 있더라도 ‘이쪽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쉽죠.
여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하는 교육 콘텐츠도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기계에 대해 가르칠 때 그 예시로 항상 자동차가 나와요. 그게 왜 생활 가전이 되면 안 되나요.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앤드루 멜트조프(Andrew Metlzoff)라는 워싱턴대 심리학과 교수가 진행한 연구가 있어요. 미국 8~10세 여학생 대상 그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과학기술 교육을 해보니 그렇지 않은 쪽보다 훨씬 더 흥미를 보인다는 거예요.
2021년 앤드루 멜트조프 교수는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 남성이 더 적합하다는 고정관념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작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시작된 이런 고정관념은 고등학교에 이르러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과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준다는 게 멜트조프 교수의 결론이다.
5월 위셋은 보고서를 통해 과학기술 업계에서 경력 단계가 올라갈수록 여성 비율이 줄어드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신규 채용 단계에서는 여성 비율이 30% 가까이 돼요. 하지만 관리직으로 가면 비율이 10% 수준으로 떨어져요. 여기엔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뿐 아니라 회사 내에서 여성 인력이 키워지지 않는 문제가 있어요. 남자들 중에도 소심한 사람이 있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잖아요. 이는 여성도 마찬가진데 여자들은 회사 내에서 그냥 한 그룹으로 묶여버려요. 관리 직급에 있는 남자들이 여자를 불편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도 회사 내 여성 인력이 길러지지 못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
어떤 불편함인가요.
제가 기업에서 일할 때를 돌아보면, 남자들이 저를 여자라는 이유로 싫어하거나 해코지하진 않았어요. 다만 남자들끼리만 편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겠죠. 그 그룹에 여자가 들어오면 보다 조심해야 하고 신경을 쓰게 되잖아요. 그런 걸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거죠. 말이 잘 통하는 이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잖아요.
최근에는 여성 할당제를 역차별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최소한 리더 직급에 남성이 대다수라는 이유로 여성이 손해 보는 건 막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어느 한 성별이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조직의 폐단은 생각보다 커요. 그래서 글로벌 기업은 의도적인 할당제를 하죠. 한 성별이 최소한 30% 이상은 있어야 하다고 봐요.
“미국, 유럽, 호주 등에서는 STEM에서의 여성 인력이 큰 화두예요. 젠더평등지수가 한국보다 높은 나라인데 왜 이걸 정책 우선순위로 둘까요. 쉽게 생각하면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왜 그런가요.
과거에는 인류가 다음 발전 방향을 예상할 수 있었어요. 항공우주가 대세야, 혹은 IT가 대세야. 그리고 여기에 자원을 투입하면 해결되는 형태였죠. 그런데 지금은 혼돈의 시대잖아요. 10년 뒤, 20년 뒤를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요. 이제는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필요해요. 그중 한두 개가 살아남아 조직 먹거리를 책임지는 기술이 되는 거죠. 구성원의 다양성이 리스크를 줄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한 키워드는 능력주의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보진 않아요. 현 정부도 남성 위주의 정부 구성에 대해 지적을 받았고, 이를 수정했잖아요. 능력주의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 길지 않길 바라요.
5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여성의 대표성 향상과 그 계획”에 대한 질문에, “(내각의 여성 비율이 낮은 것은) 여성들에게 공정한 기회가 적극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여성에게) 기회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 이사장은 “과기인재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2030 여성들을 보면 아직도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차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려움을 호소하나요.
지금의 세대는 적어도 학교나 가정에서는 성차별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요. 그런데 사회에 나오면서 괴리를 느껴요. 취업하면서 현실에 직면하는 거죠. 회사에서 ‘꼰대’를 만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그래서 두 가지 길로 가게 됩니다.
어떤 길인가요.
투쟁하는 길이 있어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고 나는 성차별과 싸우겠다’ 생각하는 거죠. 혹은 ‘세상이 이런 거였어?’ 하고 포기해버려요. 후자도 안타깝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불행한 일이라고 봐요. 꼭 둘 중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죠. 제가 그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건, 우선 인정하라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인류 발전 방식이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걸요.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발전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을지,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해요. 선배들은 후배들이 그 속에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안 이사장이 적극적으로 멘토 역할을 자처하는 까닭은 그 역시 여성이 드문 과학기술 업계에 오랫동안 몸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여대 수학과와 전산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전산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데이콤)에서 일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삼성SDS 부장, 시큐어소프트·파수닷컴 부사장직을 맡아 컴퓨터 보안업계에 쭉 발을 담갔다. 모교에서 사이버보안전공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부모님이 “하고 싶은 걸 다 해봐라”라는 교육 철학을 가졌다고요.
그땐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제게 큰 영향을 줬어요. 부모님이 “여자니까 뭘 해야 한다” 이런 말을 전혀 안 하셨어요. 언니, 저,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이 아버지가 누나들만 예뻐한다고 화낼 정도였죠. 그래서인지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생각을 가감 없이 할 수 있었어요. 커리어뿐 아니라 ‘나는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 ‘그럼 다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주로 활동한 보안업계는 남성 비율이 높은 집단입니다.
이런 질문 많이 받아요. “얼마나 힘드셨나요?”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사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웃음). 박사 타이틀 영향도 있다고 봐요. 물론 미팅 자리에서 ‘여자분이 오셨네요’ 이런 반응은 수시로 겪었죠. 다들 힐끔힐끔 쳐다보거든요. 회의에 들어가면 30명 중 여자는 나 하나인 경우도 많았고요.
그럴 때마다 안 이사장은 ‘나 여기 앉아 있다. 어쩔래’ 이렇게 생각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민망해하면 상대방도 불편해요. ‘이건 아니지 않아요?’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하면서 일부러 의견도 많이 냈어요. 적극적으로 대할수록 서로 터놓는 시간도 빨라져요. 물론 나는 ‘럭키(lucky)한 케이스’라고 봐요.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사람에게 시달리는 건데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어요.”
“나는 운이 좋았다”는 말, 성공한 여성분들과의 인터뷰에서 많이 듣는 답변입니다.
운이 나빴다면 저도 이겨내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을 거예요.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인정해주고 키워주는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죠.
과학기술인 여성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공 계열 여학생 멘토링을 해보면 “전공을 살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해요. 컴퓨터공학과 학생이라면 “개발 쪽은 싫다”는 식이죠. 그런데 IT 분야에 개발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기획도 있고, UI를 만드는 부서도 있고, 고객에게 기술을 설명하는 일도 있어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업무를 너무 제한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이사장은 사회 초년생을 향해 “눈앞의 일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미래를 봐야 해요. 내가 하는 일이 큰 그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계속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경쟁사는 뭘 하고 있는지, 전체 시장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10년 뒤에도 이게 먹힐지…. 남자, 여자, 분야를 떠나서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특강이 끝나면 상담 요청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요즘은 육아로 고민하는 후배들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그러면 ‘유튜브’ 해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합니다(웃음).
그러게요, 자식은 어떻게 키우는 게 좋나요.
가족이나 아이가 내 인생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여성 스스로의 ‘밸류(value)’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털어놓는 고민들의 대부분은 “주변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온 힘을 쏟는데 나는 일하느라 그렇게 못 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애들 인생이니 자기들이 다 한다”고 답하죠.
명쾌하지만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부모는 같이 고민을 해주는 존재지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신입 사원들 면접에 들어가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건 부모가 키울 때 답을 제시했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가령 학원을 보내는 문제라면, 선택지를 부모가 줄 수는 있는 거죠. “네가 악기를 하나 연주할 줄 알면 이런 게 좋아” “넌 이런 데 관심이 많으니 배워보면 좋아할지도 모르지” 이렇게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다 정해주면 안 된다고 봐요. 더구나 지금은 좋은 대학 간다고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인생 그림은 스스로 그리는 게 중요하죠.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나중에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세요.
요새도 학생들에게 알고 있는 여성 과학자를 물으면 “마리 퀴리”라는 답변이 돌아와요. 이건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에도 훌륭하고 멋있는 여성 과학기술인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출범한 ‘W브릿지’ 플랫폼을 잘 정착시키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윤석열 #여성과학자 #여성공학자 #마리퀴리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안혜연(64)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위셋) 이사장의 말이다. 윤석열 정부는 핵심 국정 과제 중 하나로 “디지털 인재 100만 양성”을 꼽았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 맞춰 소프트웨어·인공지능 교육을 강화해 2027년까지 디지털 인재 100만 명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이다. 6월 8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특히 반도체 인재 양성에 대해 “목숨 걸고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위셋도 덩달아 바빠졌다. 정부 기조에 맞춰 다수의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협조를 요청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위셋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2004년 ‘전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로 설립된 이후 지금껏 과학기술계 여성 리더를 양성하고 지속 가능한 여성 과학기술인 생태계를 만드는 데 힘써왔다. 2019년 취임한 안 이사장은 ‘센터’에서 ‘재단’으로 이름을 변경해 단순 지원사업 외에 정책연구 기능을 강화했다. 학생부터 은퇴자까지 전 연령대의 여성 과학기술인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 ‘W브릿지’도 그의 작품이다. 6월 17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난 안 이사장은 “여성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전 생애주기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과학자·공학자 할 수 있다, 말해줘야”
“생애주기 문제 해결이 먼저”라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출산과 육아로 발생하는 경력 단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대를 갖고 있죠. 저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 유입이 부족한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공계 중에서도 특히 공대로 일컬어지는 엔지니어링 분야, 신기술 쪽으로 여성들이 진출하지 않는 현상을 심각하게 보고 있어요.
원인이 뭘까요.
여학생에게 과학자나 공학자가 되라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죠. 대다수 부모가 딸이 교사나 간호사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직업을 택하길 바라고요. 꿈과 희망을 주지 않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돼요. 기대가 없으면 내가 관심이 있더라도 ‘이쪽은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하기 쉽죠.
여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하는 교육 콘텐츠도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기계에 대해 가르칠 때 그 예시로 항상 자동차가 나와요. 그게 왜 생활 가전이 되면 안 되나요.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앤드루 멜트조프(Andrew Metlzoff)라는 워싱턴대 심리학과 교수가 진행한 연구가 있어요. 미국 8~10세 여학생 대상 그들이 좋아하는 주제로 과학기술 교육을 해보니 그렇지 않은 쪽보다 훨씬 더 흥미를 보인다는 거예요.
2021년 앤드루 멜트조프 교수는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에 남성이 더 적합하다는 고정관념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작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시작된 이런 고정관념은 고등학교에 이르러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과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준다는 게 멜트조프 교수의 결론이다.
5월 위셋은 보고서를 통해 과학기술 업계에서 경력 단계가 올라갈수록 여성 비율이 줄어드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신규 채용 단계에서는 여성 비율이 30% 가까이 돼요. 하지만 관리직으로 가면 비율이 10% 수준으로 떨어져요. 여기엔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뿐 아니라 회사 내에서 여성 인력이 키워지지 않는 문제가 있어요. 남자들 중에도 소심한 사람이 있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잖아요. 이는 여성도 마찬가진데 여자들은 회사 내에서 그냥 한 그룹으로 묶여버려요. 관리 직급에 있는 남자들이 여자를 불편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도 회사 내 여성 인력이 길러지지 못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
어떤 불편함인가요.
제가 기업에서 일할 때를 돌아보면, 남자들이 저를 여자라는 이유로 싫어하거나 해코지하진 않았어요. 다만 남자들끼리만 편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겠죠. 그 그룹에 여자가 들어오면 보다 조심해야 하고 신경을 쓰게 되잖아요. 그런 걸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느끼는 거죠. 말이 잘 통하는 이와 이야기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잖아요.
최근에는 여성 할당제를 역차별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최소한 리더 직급에 남성이 대다수라는 이유로 여성이 손해 보는 건 막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어느 한 성별이 독점적으로 운영하는 조직의 폐단은 생각보다 커요. 그래서 글로벌 기업은 의도적인 할당제를 하죠. 한 성별이 최소한 30% 이상은 있어야 하다고 봐요.
“다양성이 생존 전략”
안 이사장은 “다양성 문제는 미래의 생존과 직결돼 있다”고 강조했다.“미국, 유럽, 호주 등에서는 STEM에서의 여성 인력이 큰 화두예요. 젠더평등지수가 한국보다 높은 나라인데 왜 이걸 정책 우선순위로 둘까요. 쉽게 생각하면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왜 그런가요.
과거에는 인류가 다음 발전 방향을 예상할 수 있었어요. 항공우주가 대세야, 혹은 IT가 대세야. 그리고 여기에 자원을 투입하면 해결되는 형태였죠. 그런데 지금은 혼돈의 시대잖아요. 10년 뒤, 20년 뒤를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요. 이제는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필요해요. 그중 한두 개가 살아남아 조직 먹거리를 책임지는 기술이 되는 거죠. 구성원의 다양성이 리스크를 줄여준다는 의미입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한 키워드는 능력주의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보진 않아요. 현 정부도 남성 위주의 정부 구성에 대해 지적을 받았고, 이를 수정했잖아요. 능력주의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시간이 길지 않길 바라요.
5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여성의 대표성 향상과 그 계획”에 대한 질문에, “(내각의 여성 비율이 낮은 것은) 여성들에게 공정한 기회가 적극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여성에게) 기회를 더 적극적으로 보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 이사장은 “과기인재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2030 여성들을 보면 아직도 사회에 진출하는 여성들이 차별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려움을 호소하나요.
지금의 세대는 적어도 학교나 가정에서는 성차별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요. 그런데 사회에 나오면서 괴리를 느껴요. 취업하면서 현실에 직면하는 거죠. 회사에서 ‘꼰대’를 만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그래서 두 가지 길로 가게 됩니다.
어떤 길인가요.
투쟁하는 길이 있어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고 나는 성차별과 싸우겠다’ 생각하는 거죠. 혹은 ‘세상이 이런 거였어?’ 하고 포기해버려요. 후자도 안타깝지만,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불행한 일이라고 봐요. 꼭 둘 중 하나를 택할 필요는 없죠. 제가 그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건, 우선 인정하라는 거예요.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인류 발전 방식이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걸요.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떻게 발전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을지,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해요. 선배들은 후배들이 그 속에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안 이사장이 적극적으로 멘토 역할을 자처하는 까닭은 그 역시 여성이 드문 과학기술 업계에 오랫동안 몸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여대 수학과와 전산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전산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데이콤)에서 일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삼성SDS 부장, 시큐어소프트·파수닷컴 부사장직을 맡아 컴퓨터 보안업계에 쭉 발을 담갔다. 모교에서 사이버보안전공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부모님이 “하고 싶은 걸 다 해봐라”라는 교육 철학을 가졌다고요.
그땐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제게 큰 영향을 줬어요. 부모님이 “여자니까 뭘 해야 한다” 이런 말을 전혀 안 하셨어요. 언니, 저,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이 아버지가 누나들만 예뻐한다고 화낼 정도였죠. 그래서인지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생각을 가감 없이 할 수 있었어요. 커리어뿐 아니라 ‘나는 결혼도 하고 싶고 아이도 낳고 싶다’ ‘그럼 다 하면 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주로 활동한 보안업계는 남성 비율이 높은 집단입니다.
이런 질문 많이 받아요. “얼마나 힘드셨나요?”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사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웃음). 박사 타이틀 영향도 있다고 봐요. 물론 미팅 자리에서 ‘여자분이 오셨네요’ 이런 반응은 수시로 겪었죠. 다들 힐끔힐끔 쳐다보거든요. 회의에 들어가면 30명 중 여자는 나 하나인 경우도 많았고요.
그럴 때마다 안 이사장은 ‘나 여기 앉아 있다. 어쩔래’ 이렇게 생각했다.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민망해하면 상대방도 불편해요. ‘이건 아니지 않아요?’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하면서 일부러 의견도 많이 냈어요. 적극적으로 대할수록 서로 터놓는 시간도 빨라져요. 물론 나는 ‘럭키(lucky)한 케이스’라고 봐요. 사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게 사람에게 시달리는 건데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어요.”
“나는 운이 좋았다”는 말, 성공한 여성분들과의 인터뷰에서 많이 듣는 답변입니다.
운이 나빴다면 저도 이겨내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을 거예요.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잘나서라기보다 인정해주고 키워주는 사람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죠.
과학기술인 여성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이공 계열 여학생 멘토링을 해보면 “전공을 살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해요. 컴퓨터공학과 학생이라면 “개발 쪽은 싫다”는 식이죠. 그런데 IT 분야에 개발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기획도 있고, UI를 만드는 부서도 있고, 고객에게 기술을 설명하는 일도 있어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업무를 너무 제한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이사장은 사회 초년생을 향해 “눈앞의 일에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미래를 봐야 해요. 내가 하는 일이 큰 그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계속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경쟁사는 뭘 하고 있는지, 전체 시장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10년 뒤에도 이게 먹힐지…. 남자, 여자, 분야를 떠나서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존재 이유가 자식이면 안 돼”
모교에서 강의할 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특강이 끝나면 상담 요청하는 학생들이 많았어요. 요즘은 육아로 고민하는 후배들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데, 그러면 ‘유튜브’ 해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합니다(웃음).
그러게요, 자식은 어떻게 키우는 게 좋나요.
가족이나 아이가 내 인생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여성 스스로의 ‘밸류(value)’에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털어놓는 고민들의 대부분은 “주변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온 힘을 쏟는데 나는 일하느라 그렇게 못 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애들 인생이니 자기들이 다 한다”고 답하죠.
명쾌하지만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해주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부모는 같이 고민을 해주는 존재지 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신입 사원들 면접에 들어가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친구들이 많아요. 그건 부모가 키울 때 답을 제시했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가령 학원을 보내는 문제라면, 선택지를 부모가 줄 수는 있는 거죠. “네가 악기를 하나 연주할 줄 알면 이런 게 좋아” “넌 이런 데 관심이 많으니 배워보면 좋아할지도 모르지” 이렇게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다 정해주면 안 된다고 봐요. 더구나 지금은 좋은 대학 간다고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인생 그림은 스스로 그리는 게 중요하죠.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나중에도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세요.
요새도 학생들에게 알고 있는 여성 과학자를 물으면 “마리 퀴리”라는 답변이 돌아와요. 이건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에도 훌륭하고 멋있는 여성 과학기술인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출범한 ‘W브릿지’ 플랫폼을 잘 정착시키는 역할도 중요합니다.
#윤석열 #여성과학자 #여성공학자 #마리퀴리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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