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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세계의 교육 현장을 가다 | 미국

엄격한 표절 교육, 걸리면 명문대 진학 물 건너가

글&사진·김숭운 미국 통신원

2013. 05. 31

유명인의 논문 표절 사건이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됐다. 그런데 그것이 단지 소수 유명인만의 문제일까. 미국 학교의 표절 예방 교육을 살펴보면 우리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된다.

엄격한 표절 교육, 걸리면 명문대 진학 물 건너가

미국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MLA라는 교재를 통해 표절 방지 교육을 받는다.



얼마 전 이웃에 사는 한국인 학부모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가 왔다. 아이가 친구의 숙제를 빌려 적당히 고쳐 제출한 것이 들통 나는 바람에 학교 측으로부터 ‘청문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어떡하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베껴서라도 숙제를 하는 것이 안 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큰일은 아니겠지요?”라는 그의 질문에 필자는 “정말 큰일 났습니다”라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그로부터 전해들은 청문회 풍경은 ‘살벌 그 자체’였다. 학생을 가운데 놓고 대여섯 명의 교사와 교장이 둘러앉고 학부모 대표도 참석했다고 한다. 표절을 적발한 교사가 내용을 설명한 뒤 학생 본인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마치 중대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을 심문하는 것과 비슷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학생이 순순히 표절을 인정하자 학교 측은 ‘정학 5일’과 ‘표절 사실 학생부 기재’ ‘해당 과목 성적 10점 감점’이라는 처벌을 내렸다. 아울러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경우 퇴학시키겠다는 경고도 받았다고 한다. 특히 10점 감점은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 과목에서는 절대로 A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 학생은 명문대 진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얼마 전 하버드대에서 벌어진 부정행위 스캔들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집에서 풀어오는 시험 문제를 내면서 ‘서로 상의하거나 의견을 교환하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붙였는데, 일부 학생들이 식당에서 만나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고, 심지어는 전화로 토론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학교 측은 의견 교환도 표절로 간주해 70여 명의 학생들에게 ‘1년 강제휴학’이라는 처벌을 내렸다. 사실상 낙제를 시킨 셈이다. 이런 엄한 처벌에 대해 일부 당사자 학부모들의 볼멘 불평은 ‘당연하다’는 사람들의 반응에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들이 평생 ‘표절자’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학교 숙제도 표절 검사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입학생 전원에게 ‘MLA Handbook’이라는 책을 사도록 하고, 입학 후 한 달 동안 ‘주석 다는 법’과 ‘표절 여부 판단법’을 가르친다. 교과서를 무료로 지급하거나 대여해주는 미국 공립학교에서 반드시 책을 사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 책은 평생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할 때 정확히 표시하는 법이다. MLA(Modern Language Association)는 문과 계열 글을 쓸 때 필요한 매뉴얼을 다루고 있으며, 과학이나 수학 관련 글을 쓸 때는 APA(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라는 책을 공부해야 한다.
또 표절을 잡아내기 위해 개발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중학생 때부터 리포트 표절 여부를 검사받는다. 물론 교사와 교수들도 표절 판단법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표절 적발 시스템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턴잇인 닷컴(Turnitin.com)’인데 이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수십억 개에 달하는 웹 페이지, 수백만 개의 리포트와 비교해 표절 여부를 판별한다.
표절이 적발되면 아주 엄격한 벌칙이 적용된다. 학위 논문의 경우 학위 취소는 물론이고 그 사실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기도 한다. 특히 대학 입시에서 중요한 에세이의 경우 표절이 의심되면 성적에 상관없이 무조건 불합격 처리된다. 표절에 대한 개념이 빈약한 이민자들이 에세이를 쓰면서 참고로 했던 내용이 머리에 남아 있다 글 속에 포함된 비자발적 표절도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처벌된다. 남이 대신 써준 에세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에서는 에세이 대필 업체들이 별 힘을 쓰지 못한다.
뉴욕 시는 내년부터 모든 고등학교 졸업생에게 논문 작성을 의무화할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의 아이디어와 증거를 가지고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는 과정을 훈련시켜서 대학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런 개혁을 실시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의 쓰기 실력이 떨어진다는 대학들의 불평 때문. 아울러 이런 훈련을 통해 확실하게 남의 글 인용법이나 참고문헌 표시법을 가르쳐 졸업시키겠다는 목표도 있다.

엄격한 표절 교육, 걸리면 명문대 진학 물 건너가

뉴욕 공립 도서관. 미국에서는 남의 글 인용법이나 참고문헌 표시법도 엄격하게 가르친다.



한국도 제대로 된 표절 예방 교육 실시해야
한국에서는 잊을 만하면 논문 표절 사건이 터져나온다. 대부분 고위직에 발탁된 사람들의 인사 검증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대한민국에서 나온 학위 논문의 대부분이 걸려들 판이다. 한 번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일도 없거니와, 논문을 감수하는 교수도 그런 사실을 지적하거나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큰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았다. 어쩌면 교수 자체가 확고한 원칙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성년자인 중·고등학생들이 인터넷에서 남의 글을 베껴 숙제로 내거나 친구의 숙제를 베끼는 정도는 비난할 분위기가 아니다. 일부에서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리포트를 써주는 사업도 번성 중이고, 학위 논문 대행까지 버젓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전 국민이 알고 있지만, 감독해야 할 교육 당국과 대학 측에서만 모르는 것 같다. 표절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없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저 논문 표절에 흥분하고 비난하며 당사자를 매장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먼저 무엇이 표절이고, 무엇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교육과 적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 교육은 어리면 어릴수록 좋다. 한국의 교육 당국과 대학에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숭운 씨는…
뉴욕 시 공립 고등학교 교사이자 Pace University 겸임교수. 원래 우주공학 연구원이었으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 전직했다. ‘미국에서도 고3은 힘들다’와 ‘미국교사를 보면 미국교육이 보인다’ 두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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