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워도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이혼당해 의지할 곳 없을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절친한 친구의 남편을 빼앗으려 온갖 수를 다 쓰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의 태연희는 보통 여자가 아니다. 지난 5월 중순, 태연희로 열연 중인 탤런트 김애란(39)을 만났다. 요즘 그는 길을 나서면 난생처음으로 모르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지만 알아봐주는 이가 늘어 고마울 뿐이다.
“사실 이렇게 인터뷰를 하자고 하니까 ‘태연희가 화제의 인물이구나’ 싶기는 한데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드라마 출연하기 전보다 알아보는 사람이 확실히 늘었다는 정도죠. 찜질방에서 혼자 대본 연습하는데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사냐’며 한 소리 하신 적도 있어요(웃음). 모두 관심의 표현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할 따름이에요.”
지난해 종영된 KBS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통해 조금씩 얼굴을 알린 김애란은 사실 올해로 15년차가 된 연기자다. KBS 18기 공채 탤런트 출신으로 탤런트 박선영, 영화배우 김태우 등이 입사 동기. 하지만 데뷔 후 드라마 ‘무인시대’ ‘구미호 외전’ 등 출연작은 많으나 몇 마디 대사가 고작인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사랑과 전쟁’을 만났고 문영남 작가의 눈에 들어 ‘조강지처클럽’에 캐스팅, 곧이어 ‘수상한 삼형제’에도 비중 있는 역할로 출연하게 됐다. 드라마 출연 전 김애란은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시놉시스 상에 등장한 태연희는 매우 비중이 적은 인물이었거든요.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욕을 많이 먹을수록 분량도 늘었어요. ‘연희를 이해할 수 없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처음엔 철저히 연희 편에서 연기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연희의 상황을 이해하는 쪽이었달까? 어느 순간 시청자의 입장에서 TV를 보는데 ‘참 못됐다’ 싶더라고요(웃음).”
역할에 푹 빠져 있다 보니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는 그는 한 달 후면 태연희와 이별해야 하는 점이 오히려 서운할 뿐이라고 말했다.
탤런트 박선영, 영화배우 김태우와 동기
드라마에서 매섭게 쏘아보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김애란. 인터뷰하기 전에는 분명 깐깐한 스타일일 것 같다고 짐작도 했지만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그는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운 천생 여자였고, 기자와의 대면 자체를 어색해하는 수줍음 많은 사람이었다. 사진 촬영 전 긴장된다며 사탕을 입에 물고는 “이런 촬영을 많이 해보지 않아서…”라며 잠시 기다려주길 부탁했다. 태연희와는 성격이 너무 다르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희는 성격이 강한데 전 그렇지 않아요. 평소 조용한 편이고, 내성적이라 친구를 만나도 제가 말을 하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편이에요. 더군다나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긴장을 많이 해서 친해지기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들어요.”
그는 원래부터 내성적인 성격은 아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오빠 둘과 자주 어울려 다녀 ‘왈패’로 불리기도 했다고. 그러다 고등학교 때부터 점점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갔고, 연극반에 들어가면서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다. 처음 그가 연기를 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가족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대신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고등학교 졸업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도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았다. 엄마가 ‘그 힘든 길을 어떻게 가려고 하니’라며 걱정한 것이 전부였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합격하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 김애란은 연기력만큼은 인정받는 편에 속했다. 2학년 때 시험 삼아 응시한 KBS 공채 탤런트에 덜컥 합격해 동기들에게 축하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시험에 합격했다고 모두에게 배역이 돌아가는 건 아니었다. 처음 출연했던 작품은 드라마 ‘컬러’였는데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다소곳하게 놓고 나가는 단역이었다.
“그땐 마음이 급했어요. 탤런트가 되긴 했는데 배역은 주어지지 않고 허송세월하는 느낌만 들었죠. 상처 받은 마음에 방송국으로 출근하지 않고 학교를 더 열심히 다녔어요. 그러다가 연락이 오면 못 잊어서 또 가서 찍고…. 그러다보니 양쪽 다 제대로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연기자는 기다림의 연속인데 좀 더 진득하게 참을 걸…’ 싶기도 해요.”
‘사랑과 전쟁’ 계기로 문영남 작가의 눈에 띄어
졸업 후 김애란은 눈에 띄는 역은 아닐지라도 주어지는 일에 성실히 임했다고 한다. 그사이 탤런트 극회 노조에서 일도 하고, 동대학원 연극영화과에서 조교로 일하며 공부도 더 했다. 평소 무엇이든 배우는 걸 즐겼던 그는 완벽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한식·중식·양식 요리사 자격증도 땄다. 몸매 관리 차원에서 배우기 시작한 요가도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지도자 자격증까지 땄다. 그러다 보니 10년 세월이 훌쩍 가버렸다.
“한번은 동료 연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참에 어렵다는 일식 요리사 자격증까지 따볼까 싶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누군가 ‘네가 연기자인데 자격증은 따서 뭐 하려고 하니’ 하더라고요. 그 순간 제가 그동안 쓸데없는 일에 매달린 것 같고, 우울해지기도 해서 그만뒀어요. 요리를 같이 배웠던 분들은 ‘함께 복요리 자격증까지 따자’고 하시는데 죄송하다며 나왔죠.”
방황하던 그에게 한 줄기 빛처럼 다가온 작품이 바로 ‘사랑과 전쟁’이었다. 입사 동기인 PD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 제의를 해온 것. 초반에는 시청률이 부진했던 ‘사랑과 전쟁’이 회를 거듭할수록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인정받던 때 출연 요청이 들어온 터라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주변에서는 ‘재연배우’ 꼬리표가 평생 붙어다닐지도 모른다며 만류했지만 그는 기회가 왔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고 한다.
“일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편견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그랬더니 알아봐주시는 분들도 점차 늘어났죠. 그때 카메라 워킹을 배우고 대사를 맛깔나게 하는 법 등을 익혔어요. 저에게는 은인 같은 작품인데 막을 내려서 정말 아쉬웠어요.”
그러다 운명처럼 문영남 작가의 눈에 띄었다.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 출연해달라는 제의가 온 것. 문 작가는 우연히 ‘사랑과 전쟁’을 시청하던 중 김애란을 보고는 ‘거짓 없이 연기하는 배우’라는 느낌이 들어 그를 캐스팅했다고. 하지만 그는 이름만 듣고 문 작가가 남자인 줄 알았을 정도로 정보가 없었다. 운명과도 같았던 캐스팅에 대해 그는 “연이 닿으려면 그렇게도 닿는가 싶다”며 웃음 지었다.
오빠 친구와 결혼, 아이 없어도 행복해
김애란의 높아진 인기에 싱글벙글한 이가 또 있다. 결혼 후 9년 동안 그를 말없이 응원해준 그의 남편. 아주 어릴 적부터 오빠 친구, 친구 동생 사이로 알고 지내던 둘은 스무 살 무렵부터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후 10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하다가 웨딩마치를 울렸다.
“20년 조금 못 되게 같이 지냈더니 사람들이 지겹지 않냐고 묻는데 전 지금도 남편이 친구 같고 함께하는 게 마냥 즐거워요. 세 살 위지만 동생 같을 때가 많아서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지내죠. 집이 경기도 양평인데 가끔 기분 좋을 땐 버너랑 먹을거리 챙겨서 캠핑 가는 기분으로 무작정 동해로 향해요. 한번은 너무 졸려서 ‘우리 잠깐 10분만 눈 붙이고 갈까?’ 하며 길가에 차를 대고 잤는데 눈뜨고 보니 아침이라 그냥 집으로 온 적도 있어요(웃음).”
남편은 그의 연기생활을 적극적으로 응원해주고 있다. 하지만 연애 시절에는 불안해하기도 했다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했을 때, 공채 탤런트 시험을 보기 전, 데뷔한 후 연기생활 시작했을 때마다 그가 곁을 떠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잘 풀리지 않자 오히려 위로해주면서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갔다.
“지금은 남편이 저보다 더 모니터링을 열심히 하고는 연기 조언까지 해줘요(웃음). 그동안 지켜보기 안쓰럽고 애처로웠는지 지금 잘된 걸 정말 반기고 있죠. 회사에서도 저에 대해 ‘집에서는 어떠냐?’며 관심을 가지기에 자랑했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시부모 역시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악역이라도 중요한 역할이니 성심을 다해 연기하라는 말을 해준다고. 그는 “데뷔 초부터 악역을 했더라면 ‘며느리가 저렇게 표독스러웠나’ 싶어 싫어하셨겠지만 오랜 무명 시절 끝에 맡은 역할이라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아이들 반응에 대해 묻자 김애란은 “시기를 놓쳐 아이가 없다”며 헛헛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요. 저희에겐 아이 문제가 그런 일이었죠. 양가 부모님께서 닦달하시는 성격이 아니라 그런 말씀은 안 하세요. 얼굴 마주할 때마다 아이 얘기하면 서로 피곤하다는 걸 아시니까요.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와도 남편이 성격 좋게 ‘걱정마세요~ 생길 거예요’라며 잘 넘어가요. 그런데 워낙 둘이 즐겁게 살아서 서로 크게 문제 삼진 않아요.”
요리사 자격증을 땄을 정도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욕심이 컸던 그는 살림을 꽤 잘하는 눈치였다. 본인 스스로는 못한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직접 된장을 담가 먹고, 상을 차릴 때도 유기농 재료를 골라 가지런히 올릴 정도. 집에서 쉴 때는 화초 기르는데 정성을 쏟고, 강아지도 애정을 듬뿍 담아 키운다고 한다.
김애란은 이제 막 빛을 봤으니 한동안은 힘차게 달리고 싶다고 한다.
“든든한 배경이 있든, 연기력이 출중하든 어떤 이유에서건 잘 풀리는 사람들은 모두 능력 때문이라 생각해요. 젊었을 때는 그런 걸 보면서 아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저 운명이라 생각하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동안 불안하고 답답했는데 돌이켜보면 옆길로 새지 않고 잘 걸어온 것 같아요.”
그의 롤 모델은 중견 탤런트 김해숙. ‘조강지처클럽’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선배처럼 나이 들어서도 열정적인 배우가 돼야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직업 연기자로서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소박한 바람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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