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글빙글’ ‘인디언 인형처럼’ 등의 히트곡을 터뜨리며 80년대 이후 최고의 댄스가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가수 나미(45). 그는 톱스타라면 흔히 통과의례처럼 여기는 결혼발표는커녕 결혼식을 올린다는 말도 없이 연예계를 떠났다.
그가 가수활동을 중단한 것은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한창 팬들의 사랑을 받던 90년, ‘연예계의 대부’로 알려진 최봉호씨(65·양지기획 대표)와 동거 중이라는 소문이 연예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나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이들 부부의 결혼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어∼휴, 그땐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댄스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 ‘남몰래’ 아이를 낳고 살았는데…, 그때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저를 좋아하는 팬들이 주로 청소년과 젊은이들이어서 사생활이 알려진다는 게 너무 조심스러웠죠.”
나미는 인기절정을 향해 질주하던 84년 3월에 이미 ‘엄마’가 되었다. 당대 톱스타가 스무살 연상인 유부남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형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전처와 별거중이었던 최회장은 80년부터 이미 나미와 동거하며 실질적인 부부로 지내왔던 것. 이 사실을 눈치챈 연예담당 기자들이 사실확인을 하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당시 집사람은 기자들을 피해다녔고, 만나도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었어요. 기자들이 저에게 달려와서 ‘사실이 아니냐’며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발뺌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집사람이나 저나 그동안 기자들을 따돌리고 사느라 엄청 고생이 많았어요” 라며 환갑을 넘긴 남편 최씨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미는 그후에도 가수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육아는 친정어머니가 도맡았다. 큰아들인 정철이(19)는 집밖에서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했고 사람들이 눈치챌까 싶어 아이를 데리고 문밖에 출입하는 것조차 삼갔다.
“부득이하게 한가족이 외출을 하게 될 때도 집사람은 늘 몇발짝 앞서 걸었어요. 애는 제가 데리고 다녔죠. 한번은 백화점에 갔는데 정철이가 앞서가는 집사람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통에 혼났어요. 얼른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떴죠. 그때 점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집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는 통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어린애한테 밖에 나가서는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교육시킬 수도 없었고 참 난감했죠. 마음 같아선 다 털어놓고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집사람이 인기를 먹고 사는 가수인데다 본인이 가수활동을 계속하고 싶어해서 도저히 밝힐 수가 없었어요.
정철이는 법적으로 집사람의 ‘남동생’이었어요. 비극도 그런 비극이 어디 있겠어요, 허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만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습디다. 집사람이 나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기자들이 증거를 잡기 위해 벌떼같이 쑤시고 다니는데 호적등본이라도 떼서 기사화해보세요. 그땐 어떻게 되겠어요?”
최봉호씨는 일명 ‘최회장님’으로 ‘연예계의 대부’로 통한다. 리버사이드호텔과 롯데월드, 뉴월드호텔, 북악파크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사업수완도 뛰어났고 국내 최대 연예프로덕션인 ‘삼호기획’을 운영하기도 했다. 한때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최회장에게 인정받으면 인기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불문율처럼 통했던 것도 사실이다.
최회장은 처음 서울 종로통 극장가에서 암표장사를 하며 연예계를 기웃거리다 50년대 말 군부대 예술위문공연단을 쫓아다니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60년대에 악극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영화배우·가수 등을 사귀어 프로덕션업계에 진출했으며, 70년대 초에는 인기연예인들이 처음으로 출연한 밤업소인 ‘서울구락부’를 경영하며 밤업소의 ‘실세’로 수백억대의 재산을 모았다. 연예인들의 출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가 키운 ‘스타’로는 고 이주일, 하춘화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제가 하춘화쇼의 단장으로 있을 때 극장쇼의 새 MC를 찾고 있는데, 당시 쇼 흥행사로 최고의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종건씨가 그 사실을 알고는 이주일씨를 데리고 저의 사무실에 찾아왔더라고요. 처음에 이주일을 봤을 때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못생겼는지, 아니 못생긴 정도가 아니라 서커스단 공연에서도 받아주지 못할 만큼 ‘안 생긴’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도대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 이주일은 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는 마음에 한벌밖에 없는 알록달록한 무대복을 입고 왔는데 차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못생긴 얼굴에, 무대복까지 걸친 모습을 보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어요.”
“얼굴 때문에 안되겠다”고 단번에 퇴짜를 놓았던 최회장은 얼마 후 다급히 이주일을 불렀다. 지방공연을 끝낸 하춘화가 서울 국도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사회자가 펑크를 낸 것이다. 최회장은 급한 마음에 이주일을 찾았다.
“하도 마음이 안 놓여서 직접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주일은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잘했다고 등을 토닥여주고 두번째 공연은 이주일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숨어서 지켜봤는데 첫번째 공연 때와는 달리 자신감도 넘치고 재미있게 잘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 이주일을 하춘화쇼의 단골 사회자로 기용했죠.”
최회장이 이주일을 다시 보게 된 것은 77년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당시 이주일은 자신도 심하게 다쳐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도 부상당한 가수 하춘화를 무조건 업고 극장벽을 뛰어넘어 구출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무엇보다 ‘의리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최회장은 이주일이 동양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을 통해 단 2주일 만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직접 이주일을 찾아갔다.
그자리에서 ‘서울구락부’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계약금 1억원을 건넸고 출연료로 월 1천만원을 제시했다. 당시 최고급이었던 로얄 레코드 승용차에 운전기사까지 붙여줬다. 그는 그후로도 이주일이 코미디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주일이 타계하자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그를 두고 이주일은 생전에 “제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가수 나미와 최회장의 첫 만남은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남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공연으로 인기를 모은 나미가 국내 정상급 가수로 발돋움한 직후다. 나미는 이때 최회장이 공연을 기획한 그룹 <사랑과 평화>의 콘서트 무대에 윤시내, 방미, 현숙과 함께 초대가수로 함께 공연을 했다.
“출연 당시 초대가수 모두에게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구두로 계약을 했어요. 날씨는 춥지, 손님은 없지. 그러니까 다른 가수들은 슬쩍슬쩍 자리를 비우고 몰래 업소에 출연을 하는데 집사람은 그 추운 분장실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렇게 있어. (업소에) 나가서 일을 하지’라고 말했더니 ‘밤업소에 나가지 않는 게 계약조건이라 이러고 있다’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 순간 속으로 ‘요령도 없고 융통성이 없는 가수’라는 생각이 들면서 ‘연예인 중에도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있구나’ 싶어 마음이 흐뭇합디다. 아주 착해 보여서 좋게 봤어요.”
이후 최회장은 사람을 시켜서 “나미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나미가 산동네에서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회장은 나미에게 서울 반포동 아파트 한채를 마련해줬다.
“그때 집사람 남동생이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다가 죽어 집안형편이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 좋은 집에서 편하게 생활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집을 사줬는데도 집사람은 고맙다는 말은커녕 ‘가난하게 사는 것은 괜찮으니까 노래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면서 아파트는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이 더 맘에 들어서 제가 확 밀어붙였죠. 그 이후로 연인관계로 급속히 발전을 했어요. 그때 집사람은 제가 손가락만 톡 건드려도 어쩔 줄 몰라 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이 말에 나미가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다”고 박장대소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남편이 연예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으로만 알고 존경했을 뿐이었지 저에게 관심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 차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고 같이 살게 됐죠. 한참 인기를 끌던 참이라 임신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들어섰어요. 아이를 낳고 살면서 세상에 드러내놓고 ‘우리는 부부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살았을 뿐 행복하게 지냈어요.”
비록 호적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세인들의 눈을 피해 ‘부부’로 살아가기를 10여년. 지난 90년 최회장은 나미에게 미국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세상에 알려질까 봐 ‘부부행세’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여섯살인 정철이를 목마 태워서 집사람과 팔짱을 끼고 미국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집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 참 편합디다. 그동안 가족으로서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보상받은 것 같아서 속이 다 후련하더라고요.”
가족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나미는 예상치 않은 고통을 겪었다. 검찰이 수십억 단위의 ‘검은 돈’이 조직폭력배들에게 들어가고 있는 것을 내사하던 중 최회장에게도 일부 혐의가 드러나 그가 91년 1월 구속됐던 것.
“지금에 와서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그 사건으로 구속돼 구치소에 있을 때 제가 진짜 조직폭력배의 두목쯤 되는 줄 알았는지 먼저 들어와 있던 조직폭력배들이 다들 줄을 서서 큰절을 하지 뭡니까(웃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슬롯머신을 도입하기도 한 최회장이 옥살이한 4년이라는 세월은 나미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다. 최회장이 구속되면서 나미는 모든 활동을 접고 옥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최회장은 자신이 풀려나자 전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95년에 비로소 나미를 법적인 아내로 맞이하고 아들의 호적도 바로잡았다.
“결혼식을 따로 하진 않았어요. 우린 우리 방식으로 살자고 약속했거든요. 결혼식은 마음속으로 올렸어요. 첫아이 낳고 이듬해인가 반지 하나를 선물 하더라고요. 지금도 그걸 결혼반지로 여기며 살고 있어요.”
자의보다는 주변상황에 의해 활동을 중단한 나미가 다시 앨범을 발표한 것은 지난 96년. 하지만 그는 이듬해 2월 예술의 전당 콘서트를 끝으로 또다시 활동을 중단했다.
“그때 마지막 콘서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계속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콘서트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둘째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 나이가 몇인데, 아니 제 나이는 둘째치고 남편 나이가 몇인데 아이를 가졌나 싶어 엄청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를 지울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제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인데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회장은 아내가 둘째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나이 예순에 아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그는 “절대로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압력을 가했다. 나미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낳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자 최회장은 가출을 감행했다.
“세상에 생각해봐요. 쉰도 아니고 예순에 손자가 아니라 자식을 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잖아요. 그렇게 말렸는데도 낳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일단 집을 나가는 것으로 항의 표시를 했죠. 꼬박 석달 동안 집을 나와 사무실 등에서 먹고 자면서 무언의 항의를 했는데 그 사이에 집사람의 배는 이미 불러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이들 부부는 한목소리로 “둘째아들 정환이(6)를 낳지 않았더라면 지금 무슨 재미로 살았을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다.
“정철이를 낳던 날 남편은 이주일, 조용필씨와 함께 파리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병원에 와보지도 못했어요. 공항에 도착해서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죠. 남편은 두분(이주일, 조용필)에게 둘째아이를 낳았다는 얘기를 했다고 해요. 그분들은 예전부터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거든요. 정철이를 낳을 때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지만 같은 병동에 있던 환자들은 내몸과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 있어서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요. 정말이지 몰래 애 낳느라고 너무 고생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더라면 나를 알아본 간호사나 환자들이 ‘나미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은 것을 봤다’는 소식을 전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해 ‘숨기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면서 당시를 떠올리며 웃음을 머금은 나미는 둘째아이를 출산할 때만큼은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아이가 귀여워서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을 만큼 좋았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환이를 데리고 어딜 간다는 게 좀 쑥스럽더라고요.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모두들 ‘손자냐’고 물었으니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왠지 섭섭하고 편치 않더라고요. 정환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점원이 ‘할아버지, 손자에게 이게 어울리겠는데요’라고 말하면 대꾸도 안하고 매장을 나와버립니다. 집앞에 있는 산을 산책할 때도 정환이가 ‘아빠, 아빠’ 하고 부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도 신경이 안 쓰여요.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저 아이가 장가갈 때까지 살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이 나이에 또 아이를 얻었으니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서 정환이를 지켜줘야지 하는 생각뿐이에요.”
둘째아이를 임신하기 전 가요계 복귀를 노렸던 나미는 정환이를 키우면서 모든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정철이와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정환이 뒷바라지를 하다 보면 하루 해가 짧게 느껴질 만큼 바쁘기 때문이다.
“새벽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요. 큰아들 밥 먹여서 학교 보내야 하고 정확하게 7시에 밥을 찾는 둘째아들과 남편 때문에 늦잠을 잘 수가 없어요. 정철이를 보내고 조금 있다가 정환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뒤 잠깐 집안일을 하고 나면 이내 둘째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에요. 그러면 또 점심 먹이고, 간식 챙겨주고 그러다 보면 다시 저녁 먹을 시간이고…. 어디 외출할 틈도 없다니까요. 두 아이 키우면서 저도 보통 주부들처럼 살아요.”
그러면서 “저 아줌마 다 됐죠?”라고 되묻는 나미의 모습에서 예전에 무대를 열정적으로 달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넉넉함과 편안함이 물씬 풍겨났다.
“어∼휴, 말도 마세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솥뚜껑 운전’을 해야겠느냐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어요. 화려한 연예계 활동을 접고 집에서 살림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죠. 하지만 저 스스로 인기나 명예보다는 가정에 들어앉아 가족을 보살피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수백번 다짐했어요.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활동을 재개하라는 권유를 받곤 하지만 발라드 가수였다면 모를까 이 나이에 댄스가수로 재기할 수 있겠어요?(웃음) 지금 제가 무대에서 춤을 춘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만 해도 웃기지 않아요?”
현재 나미와 최회장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7층짜리 주상복합건물로 6층과 7층(실평수 총 2백30평)을 사용하고 있다. 6층은 주로 이들 부부가 생활하는 공간이고 7층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6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널찍한 거실에는 세가지 스타일의 소파를 배치해 각각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건물 옥상에는 수영장이 마련돼 있다. 선탠을 즐기는 나미와 물장구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 정환이를 위해 최회장이 특별히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이건 처음 얘기하는 건데요. 큰아들 정철이가 얼마전에 가수로 데뷔했어요. 그룹 ‘룰라’ 출신의 이상민이 우연찮게 정철이의 노래를 들어보더니 가수로 한번 키워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으로 최민수씨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룹 ‘QOQ’의 싱어를 맡고 있어요.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는 엄마가 얼마나 유명한 가수였는지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었는데 방송국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예계 사람들을 만나 부모 이야기를 듣고는 엄마나 아빠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일 때문에 잠깐 외출한 정철이가 인터뷰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면서 그룹 ‘QOQ’의 홍보포스터를 들고 와 “얘가 바로 정철이에요”라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아들자랑을 늘어놓는 나미의 얼굴에는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행복한 미소가 엿보였다.
그가 가수활동을 중단한 것은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한창 팬들의 사랑을 받던 90년, ‘연예계의 대부’로 알려진 최봉호씨(65·양지기획 대표)와 동거 중이라는 소문이 연예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나돌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이들 부부의 결혼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어∼휴, 그땐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댄스가수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 ‘남몰래’ 아이를 낳고 살았는데…, 그때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죠. 저를 좋아하는 팬들이 주로 청소년과 젊은이들이어서 사생활이 알려진다는 게 너무 조심스러웠죠.”
나미는 인기절정을 향해 질주하던 84년 3월에 이미 ‘엄마’가 되었다. 당대 톱스타가 스무살 연상인 유부남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형 스캔들’이 아닐 수 없다. 전처와 별거중이었던 최회장은 80년부터 이미 나미와 동거하며 실질적인 부부로 지내왔던 것. 이 사실을 눈치챈 연예담당 기자들이 사실확인을 하기 위해 팔방으로 뛰어 다녔지만 번번이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당시 집사람은 기자들을 피해다녔고, 만나도 절대 아니라고 펄쩍 뛰었어요. 기자들이 저에게 달려와서 ‘사실이 아니냐’며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발뺌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집사람이나 저나 그동안 기자들을 따돌리고 사느라 엄청 고생이 많았어요” 라며 환갑을 넘긴 남편 최씨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나미는 그후에도 가수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고 육아는 친정어머니가 도맡았다. 큰아들인 정철이(19)는 집밖에서는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했고 사람들이 눈치챌까 싶어 아이를 데리고 문밖에 출입하는 것조차 삼갔다.
“부득이하게 한가족이 외출을 하게 될 때도 집사람은 늘 몇발짝 앞서 걸었어요. 애는 제가 데리고 다녔죠. 한번은 백화점에 갔는데 정철이가 앞서가는 집사람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통에 혼났어요. 얼른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떴죠. 그때 점원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집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는 통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어린애한테 밖에 나가서는 절대로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고 교육시킬 수도 없었고 참 난감했죠. 마음 같아선 다 털어놓고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집사람이 인기를 먹고 사는 가수인데다 본인이 가수활동을 계속하고 싶어해서 도저히 밝힐 수가 없었어요.
정철이는 법적으로 집사람의 ‘남동생’이었어요. 비극도 그런 비극이 어디 있겠어요, 허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우습지만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습디다. 집사람이 나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기자들이 증거를 잡기 위해 벌떼같이 쑤시고 다니는데 호적등본이라도 떼서 기사화해보세요. 그땐 어떻게 되겠어요?”
최봉호씨는 일명 ‘최회장님’으로 ‘연예계의 대부’로 통한다. 리버사이드호텔과 롯데월드, 뉴월드호텔, 북악파크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사업수완도 뛰어났고 국내 최대 연예프로덕션인 ‘삼호기획’을 운영하기도 했다. 한때는 연예인들 사이에서 “최회장에게 인정받으면 인기는 보장받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불문율처럼 통했던 것도 사실이다.
최회장은 처음 서울 종로통 극장가에서 암표장사를 하며 연예계를 기웃거리다 50년대 말 군부대 예술위문공연단을 쫓아다니면서 연예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60년대에 악극단장으로 활동하면서 영화배우·가수 등을 사귀어 프로덕션업계에 진출했으며, 70년대 초에는 인기연예인들이 처음으로 출연한 밤업소인 ‘서울구락부’를 경영하며 밤업소의 ‘실세’로 수백억대의 재산을 모았다. 연예인들의 출세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그가 키운 ‘스타’로는 고 이주일, 하춘화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제가 하춘화쇼의 단장으로 있을 때 극장쇼의 새 MC를 찾고 있는데, 당시 쇼 흥행사로 최고의 이름을 날리고 있던 이종건씨가 그 사실을 알고는 이주일씨를 데리고 저의 사무실에 찾아왔더라고요. 처음에 이주일을 봤을 때는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못생겼는지, 아니 못생긴 정도가 아니라 서커스단 공연에서도 받아주지 못할 만큼 ‘안 생긴’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도대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어요. 그때 이주일은 저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는 마음에 한벌밖에 없는 알록달록한 무대복을 입고 왔는데 차마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못생긴 얼굴에, 무대복까지 걸친 모습을 보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어요.”
“얼굴 때문에 안되겠다”고 단번에 퇴짜를 놓았던 최회장은 얼마 후 다급히 이주일을 불렀다. 지방공연을 끝낸 하춘화가 서울 국도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사회자가 펑크를 낸 것이다. 최회장은 급한 마음에 이주일을 찾았다.
“하도 마음이 안 놓여서 직접 공연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주일은 그게 부담스러웠는지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그래도 잘했다고 등을 토닥여주고 두번째 공연은 이주일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숨어서 지켜봤는데 첫번째 공연 때와는 달리 자신감도 넘치고 재미있게 잘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 이주일을 하춘화쇼의 단골 사회자로 기용했죠.”
나미는 세상에 알려질까 봐 면사포도 못 써보고 결혼반지만 받았지먄 두아들을 낳고 전업주부로 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자리에서 ‘서울구락부’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계약금 1억원을 건넸고 출연료로 월 1천만원을 제시했다. 당시 최고급이었던 로얄 레코드 승용차에 운전기사까지 붙여줬다. 그는 그후로도 이주일이 코미디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주일이 타계하자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그를 두고 이주일은 생전에 “제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가수 나미와 최회장의 첫 만남은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남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공연으로 인기를 모은 나미가 국내 정상급 가수로 발돋움한 직후다. 나미는 이때 최회장이 공연을 기획한 그룹 <사랑과 평화>의 콘서트 무대에 윤시내, 방미, 현숙과 함께 초대가수로 함께 공연을 했다.
“출연 당시 초대가수 모두에게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구두로 계약을 했어요. 날씨는 춥지, 손님은 없지. 그러니까 다른 가수들은 슬쩍슬쩍 자리를 비우고 몰래 업소에 출연을 하는데 집사람은 그 추운 분장실에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렇게 있어. (업소에) 나가서 일을 하지’라고 말했더니 ‘밤업소에 나가지 않는 게 계약조건이라 이러고 있다’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 순간 속으로 ‘요령도 없고 융통성이 없는 가수’라는 생각이 들면서 ‘연예인 중에도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있구나’ 싶어 마음이 흐뭇합디다. 아주 착해 보여서 좋게 봤어요.”
이후 최회장은 사람을 시켜서 “나미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나미가 산동네에서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회장은 나미에게 서울 반포동 아파트 한채를 마련해줬다.
“그때 집사람 남동생이 오랫동안 병치레를 하다가 죽어 집안형편이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얘기를 들으니 좋은 집에서 편하게 생활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집을 사줬는데도 집사람은 고맙다는 말은커녕 ‘가난하게 사는 것은 괜찮으니까 노래만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면서 아파트는 받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점이 더 맘에 들어서 제가 확 밀어붙였죠. 그 이후로 연인관계로 급속히 발전을 했어요. 그때 집사람은 제가 손가락만 톡 건드려도 어쩔 줄 몰라 할 정도로 좋아했어요.”
이 말에 나미가 “그런 시절이 있긴 있었다”고 박장대소를 하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남편이 연예계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으로만 알고 존경했을 뿐이었지 저에게 관심이 있는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러다 차츰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고 같이 살게 됐죠. 한참 인기를 끌던 참이라 임신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들어섰어요. 아이를 낳고 살면서 세상에 드러내놓고 ‘우리는 부부입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살았을 뿐 행복하게 지냈어요.”
비록 호적에 올리지는 못했지만 세인들의 눈을 피해 ‘부부’로 살아가기를 10여년. 지난 90년 최회장은 나미에게 미국 여행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세상에 알려질까 봐 ‘부부행세’조차 하지 못하고 사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여섯살인 정철이를 목마 태워서 집사람과 팔짱을 끼고 미국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집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 참 편합디다. 그동안 가족으로서 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해 보상받은 것 같아서 속이 다 후련하더라고요.”
가족여행을 다녀온 이듬해 나미는 예상치 않은 고통을 겪었다. 검찰이 수십억 단위의 ‘검은 돈’이 조직폭력배들에게 들어가고 있는 것을 내사하던 중 최회장에게도 일부 혐의가 드러나 그가 91년 1월 구속됐던 것.
“지금에 와서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진 않지만 그 사건으로 구속돼 구치소에 있을 때 제가 진짜 조직폭력배의 두목쯤 되는 줄 알았는지 먼저 들어와 있던 조직폭력배들이 다들 줄을 서서 큰절을 하지 뭡니까(웃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슬롯머신을 도입하기도 한 최회장이 옥살이한 4년이라는 세월은 나미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다. 최회장이 구속되면서 나미는 모든 활동을 접고 옥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리고 최회장은 자신이 풀려나자 전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95년에 비로소 나미를 법적인 아내로 맞이하고 아들의 호적도 바로잡았다.
“결혼식을 따로 하진 않았어요. 우린 우리 방식으로 살자고 약속했거든요. 결혼식은 마음속으로 올렸어요. 첫아이 낳고 이듬해인가 반지 하나를 선물 하더라고요. 지금도 그걸 결혼반지로 여기며 살고 있어요.”
자의보다는 주변상황에 의해 활동을 중단한 나미가 다시 앨범을 발표한 것은 지난 96년. 하지만 그는 이듬해 2월 예술의 전당 콘서트를 끝으로 또다시 활동을 중단했다.
“그때 마지막 콘서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계속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콘서트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둘째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어요. 제 나이가 몇인데, 아니 제 나이는 둘째치고 남편 나이가 몇인데 아이를 가졌나 싶어 엄청 고민을 많이 했어요. 아이를 지울까도 생각해봤는데 그러면 제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늘이 주신 귀한 생명인데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최회장은 아내가 둘째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펄쩍 뛰었다. 나이 예순에 아이 아빠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그는 “절대로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고 압력을 가했다. 나미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낳겠다’고 선전포고를 하자 최회장은 가출을 감행했다.
“세상에 생각해봐요. 쉰도 아니고 예순에 손자가 아니라 자식을 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잖아요. 그렇게 말렸는데도 낳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일단 집을 나가는 것으로 항의 표시를 했죠. 꼬박 석달 동안 집을 나와 사무실 등에서 먹고 자면서 무언의 항의를 했는데 그 사이에 집사람의 배는 이미 불러오기 시작했어요. 제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이제 이들 부부는 한목소리로 “둘째아들 정환이(6)를 낳지 않았더라면 지금 무슨 재미로 살았을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다.
“정철이를 낳던 날 남편은 이주일, 조용필씨와 함께 파리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병원에 와보지도 못했어요. 공항에 도착해서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죠. 남편은 두분(이주일, 조용필)에게 둘째아이를 낳았다는 얘기를 했다고 해요. 그분들은 예전부터 우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거든요. 정철이를 낳을 때 병원에서 간호사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지만 같은 병동에 있던 환자들은 내몸과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 있어서 못 알아보는 것 같았어요. 정말이지 몰래 애 낳느라고 너무 고생했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더라면 나를 알아본 간호사나 환자들이 ‘나미가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낳은 것을 봤다’는 소식을 전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해 ‘숨기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면서 당시를 떠올리며 웃음을 머금은 나미는 둘째아이를 출산할 때만큼은 남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아이가 귀여워서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을 만큼 좋았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정환이를 데리고 어딜 간다는 게 좀 쑥스럽더라고요.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모두들 ‘손자냐’고 물었으니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왠지 섭섭하고 편치 않더라고요. 정환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점원이 ‘할아버지, 손자에게 이게 어울리겠는데요’라고 말하면 대꾸도 안하고 매장을 나와버립니다. 집앞에 있는 산을 산책할 때도 정환이가 ‘아빠, 아빠’ 하고 부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도 신경이 안 쓰여요.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저 아이가 장가갈 때까지 살 수 있겠나 싶었는데…. 이 나이에 또 아이를 얻었으니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서 정환이를 지켜줘야지 하는 생각뿐이에요.”
둘째아이를 임신하기 전 가요계 복귀를 노렸던 나미는 정환이를 키우면서 모든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정철이와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정환이 뒷바라지를 하다 보면 하루 해가 짧게 느껴질 만큼 바쁘기 때문이다.
“새벽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요. 큰아들 밥 먹여서 학교 보내야 하고 정확하게 7시에 밥을 찾는 둘째아들과 남편 때문에 늦잠을 잘 수가 없어요. 정철이를 보내고 조금 있다가 정환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난 뒤 잠깐 집안일을 하고 나면 이내 둘째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에요. 그러면 또 점심 먹이고, 간식 챙겨주고 그러다 보면 다시 저녁 먹을 시간이고…. 어디 외출할 틈도 없다니까요. 두 아이 키우면서 저도 보통 주부들처럼 살아요.”
그러면서 “저 아줌마 다 됐죠?”라고 되묻는 나미의 모습에서 예전에 무대를 열정적으로 달구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넉넉함과 편안함이 물씬 풍겨났다.
“어∼휴, 말도 마세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제가 집에서 살림만 하면서 ‘솥뚜껑 운전’을 해야겠느냐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어요. 화려한 연예계 활동을 접고 집에서 살림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죠. 하지만 저 스스로 인기나 명예보다는 가정에 들어앉아 가족을 보살피고 사는 게 중요하다고 수백번 다짐했어요. 주변 사람들로부터 종종 활동을 재개하라는 권유를 받곤 하지만 발라드 가수였다면 모를까 이 나이에 댄스가수로 재기할 수 있겠어요?(웃음) 지금 제가 무대에서 춤을 춘다고 생각해보세요. 상상만 해도 웃기지 않아요?”
현재 나미와 최회장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7층짜리 주상복합건물로 6층과 7층(실평수 총 2백30평)을 사용하고 있다. 6층은 주로 이들 부부가 생활하는 공간이고 7층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6층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널찍한 거실에는 세가지 스타일의 소파를 배치해 각각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또한 건물 옥상에는 수영장이 마련돼 있다. 선탠을 즐기는 나미와 물장구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둘째 정환이를 위해 최회장이 특별히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이건 처음 얘기하는 건데요. 큰아들 정철이가 얼마전에 가수로 데뷔했어요. 그룹 ‘룰라’ 출신의 이상민이 우연찮게 정철이의 노래를 들어보더니 가수로 한번 키워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으로 최민수씨가 뮤직비디오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룹 ‘QOQ’의 싱어를 맡고 있어요. 가수로 데뷔하기 전에는 엄마가 얼마나 유명한 가수였는지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었는데 방송국을 왔다갔다하면서 연예계 사람들을 만나 부모 이야기를 듣고는 엄마나 아빠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일 때문에 잠깐 외출한 정철이가 인터뷰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면서 그룹 ‘QOQ’의 홍보포스터를 들고 와 “얘가 바로 정철이에요”라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아들자랑을 늘어놓는 나미의 얼굴에는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행복한 미소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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