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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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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치병에 굴하지 않고 일어선 용기, 지나영 존스홉킨스 소아정신과 교수

글 정혜연 기자

2021. 09. 02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20년 가까이 고군분투한 끝에 존스홉킨스병원 소아정신과에 자리 잡은 지나영 교수. 5년 전 난치병 판정을 받고 좌절한 것도 잠시, 그녀는 이제 인생 후반전을 누구보다 값지게 살려 한다.

2017년 5월, 마흔한 살 생일을 하루 앞두고 불행이 찾아왔다. 근육통, 몸살, 오한, 체력 저하 등 겪어보지 못했던 증상들이 한꺼번에 온몸을 두들겼다. 신혼 6개월 차,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요가를 즐기는 루틴에 복싱까지 추가해 막 배우기 시작한 찰나였다. 정확한 병명을 알고 싶었지만 찾아가는 전문의마다 ‘이상 없음’ 소견만 내놨고, 침대에 누워 지내는 나날이 반년 넘게 계속됐다. 우연한 기회에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연구한 교수의 동영상 강의를 접했고, 직접 연락해 관련 클리닉을 찾아가 검사한 끝에 난치병 선고를 받았다. 병명은 신경매개저혈압 및 기립성빈맥증후군.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저혈압에서 정상 혈압으로 돌아가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어지러움과 구토, 실신 등의 증상이 발현돼 일상생활이 어려워지는 질병이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의정부성모병원에서 인턴을 수료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각고의 노력 끝에 존스홉킨스병원 소아정신과에 자리잡은 지나영(45) 교수는 그렇게 한순간 의사에서 환자가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의사에서 환자로

난치병 판정을 받기 전 아프리카에서 사파리 투어를 즐기고 있는 지나영 교수.

난치병 판정을 받기 전 아프리카에서 사파리 투어를 즐기고 있는 지나영 교수.

지 교수는 하는 수 없이 병원에 장기 휴가를 내고 치료에 전념했다. 여러 약물을 쓰고 정맥 수액을 맞아가며 집중 치료를 이어갔지만 증상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 있거나 조금 걷는 것은커녕 15분도 앉아 있지 못해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비뇨기과 의사인 남편이 지 교수를 하루 종일 간병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돌봐줄 가족이 사는 한국으로 가는 것밖에 없었다. 2018년 1월 그녀는 어머니가 있는 고향 대구로 돌아왔고, 모교인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면역 글로불린 치료를 꾸준히 받은 끝에 조금씩 기력을 회복했다. 난치병인 탓에 불시에 컨디션 난조가 찾아왔지만 지 교수는 불굴의 의지로 그해 7월, 미국으로 돌아가 원래 자리로 복귀했다.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1년 넘는 시간 동안 지 교수는 의사로 일할 때 시간이 없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 원래는 자신의 전공인 소아정신과 환자들의 케이스를 주제로 책을 쓰려 했으나 발병 이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지난해 11월 책 ‘마음이 흐르는 대로’가 세상에 나왔다. 이후 그녀는 여전히 치료를 이어가면서 의사로서의 삶과 강연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 8월 중순,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온 지나영 교수를 만나 긍정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꿈꾸는 인생 후반전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까지 오는 여정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발병 이후엔 비즈니스석을 탈 수밖에 없어요.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도 휠체어에 앉아서 이동해야 하죠. 많이 걸으면 어지러워서 쓰러지거든요. 한국행 비행기를 타던 그날도 원래는 샤워를 하고 가야 하는데 일어서는 것조차 힘들어서 세수만 하고 잠옷 차림으로, 남편이 그야말로 실어 날라줘서 겨우 탑승했어요. 한국에 도착하니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카가 “멀리서 폐인이 한 명 나오는데 이모구나 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오늘도 인터뷰 시간이 되기 전까지 계속 누워 있었어요. 그렇게 쉬면 최대 활동 시간이 2시간 정도 생겨요.



그렇게 힘든 중에 지난해 책 ‘마음이 흐르는 대로’를 출간하셨어요.

정신과 의사들이 책을 많이 내는데, 저도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아이들 혹은 사회 초년생들이 부모나 사회, 직장 상사 등의 의견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잖아요. 반면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요. 양국의 문화를 다 접한 정신과 의사로서 우리나라의 젊은이와 아이들에게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책 제목도 ‘Follow Your Heart’라고 일찌감치 지어놨죠. 아프고 나서 치료차 쉬던 중 우연히 유튜브에서 낭포성 섬유종으로 투병하는 10대 여자아이의 동영상을 보게 됐어요. 저는 난치병에 걸려 치료를 통해 회복 중이었지만 그 아이는 불치병이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죠. 건강해지리란 희망도 없는 상황 속에서 그 아이가 “삶은 그저 건강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스스로 자기 삶이 자랑스러우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전까지 병이 나아야만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죠. 이후 완벽한 회복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스스로 자랑스러워질 일을 찾고자 했어요. 그게 바로 글쓰기였죠. 당시 하루에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겨우 1~2시간이었는데, 2~3개월 동안 꾸준히 글을 쓴 결과 초고가 나왔고, 출간하게 됐어요.

2017년 5월 12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라고요.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어떠셨나요.

전날 프로선수에게 복싱을 배웠고, 이튿날 일을 마치고 주말부부라 2시간가량 운전해서 남편이 있는 집으로 갔어요. 운전할 때 등 근육이 아프기에 ‘복싱을 무리하게 했나?’라고 생각했죠. 도착하자마자 오한에 몸살 기운까지 덮쳐서 봄인데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고, 겨울 이불을 꺼내 몸에 둘둘 말고 잤어요. 그런 증상이 2주 동안 계속됐고, 심지어 빈맥(맥박 횟수가 정상보다 많은 상태)이 와서 쓰러질 뻔했어요. 늘 스스로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의지로 이겨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갑자기 직장을 쉬어야 할 정도가 되니 스트레스도 심했죠. 급히 한국에서 어머니가 오셨는데 본인도 그런 증세가 있었다고 말씀하셔서, 그때 처음 가족력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어 답답하셨을 듯해요. ‘신경매개저혈압’은 어떤 병인가요.

명확한 기전과 치료법을 알 수 없어 약도 없어요. 혈압을 올리는 약 정도를 쓰는데 잠시뿐이고 또다시 쓰러질 듯한 아픔이 찾아와요. 비슷한 환자들 가운데 가끔 운 좋게 낫는 경우도 있지만 반면에 계속 힘들어하는 환자도 많아요. 저보다 더 젊지만 회복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나마 저는 계속 치료를 받으며 나아졌고 직장에도 다시 나가게 됐어요. 지금은 ‘다시 일하게 된 게 어디냐’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보수적인 대구의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달갑지 않은 둘째 딸로 태어났다고 밝히셨어요. 그런 과거에 비해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책에도 썼지만 어린 시절 가난했고, 부모님은 공부를 딱히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셨어요. ‘대학에 꼭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으셔서 저 역시 대학에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며 자랐죠. 그런 환경을 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비 오는 날 집에 비가 새서 양동이를 받쳐놓은 걸 친구들에게 신이 나서 구경시켜주는 아이가 저였어요. 돌아보면 부모님이 그런 환경을 삶의 한 부분인 양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에 저 역시 풀 죽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역할이 컸어요. 아버지는 여자나 아내를 무시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엄마가 한 번도 괴로워하거나 우울해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어머니는 매사 긍정적이었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 딸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퍼부어주셨죠. 아버지가 가족에게 썩 잘하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괴로웠다거나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다!’ 그런 느낌은 없어요.


#달갑지 않은 둘째 딸이 의사가 되기까지

무엇이든 도전하고 경험하기를 좋아했던 지나영 교수는 후회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무엇이든 도전하고 경험하기를 좋아했던 지나영 교수는 후회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학 진학을 꿈꾸지 않았다고 했는데 결국 의대에 진학하셨어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신장결핵 진단을 받고 치료하다가 결국 한쪽 신장 기능을 다 잃고 간염 진단까지 받으셨어요. 원래 목소리가 크고 자신감 넘치는 분이었는데 약을 오래 먹고, 힘든 시간을 겪다 보니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도 보이셨죠. 아버지가 삶이 끊어질 듯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자식으로서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원래 과학을 좋아했는데 아버지의 병환을 겪은 후 진로를 의학으로 틀었죠. 과학이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의학은 환자 한 명에게 바로 임팩트를 주는 학문이라 생각했거든요.

여러 전공 가운데 정신과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정신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하다고 생각했어요. 기자님은 정신과 몸 중에 어느 쪽 건강을 선택하시겠어요? 당연히 정신 아닐까요? 몸이 건강해도 정신이 아프면 제대로 살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전 항상 인간의 정신이 신비했어요. 생각, 꿈, 상상, 최면 등 보이지 않는 이런 영역의 실체가 과연 무엇일까 늘 궁금했거든요. 의대에는 부모의 바람으로 떠밀려서 진학하는 학생이 꽤 있는데 전공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에 반해 저는 처음 의대에 진학할 때부터 정신과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길을 그대로 달려왔어요.

하버드 의과대학, 노스캐롤라이나 의과대학을 거쳐 존스홉킨스병원에서 소아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계세요. 대화를 통해 진단하고 치료해야 하는데 어떻게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으셨나요.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영어를 못하는 사람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갖고 있다면, 그리고 10년 동안 한 분야를 공부한다면 자연히 잘하게 돼 있어요. 사실 전공의로 수련할 때 처음 2개월 동안 환자의 말이 정확하게 들리지 않아서 심각하게 ‘그만둬야 하나’를 고민했어요.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버티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 발로는 절대 안 나가겠다’ 결심하고 하루에 16시간씩 환자를 상담하며 버텼어요. 제가 스물다섯살에 미국에 갔는데 1년 정도 진료하다 보니 어릴 때 이민 간 사람처럼 영어를 잘하게 됐어요. 특히 소아정신과니까 어린아이들은 의사 선생님이라도 발음이 틀리면 될 때까지 가르쳐주더라고요(웃음). 미국에서 힘든 순간이 닥칠 때마다 ‘오늘은 내일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스스로 되뇌며 버텼는데 그게 도움이 됐어요.


#앞으로는 아이들에게 도움 주는 삶 살고파

일과 가정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마흔한 살에 불행이 찾아왔어요. 특히 신혼이었는데 남편과의 관계에 문제는 없었나요.

차로 2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남자와 짧게 데이트하다가 ‘착하고 괜찮구나’라는 생각에 결혼했으니 당연히 갈등이 있었죠. 남편 입장에서는 결혼 몇 개월 전에 에베레스트까지 등정하고 매일같이 운동하던 아내가 갑자기 누워만 있으니 이상할 수밖에요. 반대로 저는 옆에서 남편이 “스트레스 관리를 못하는 거 아니야?” “당신 일에 대한 의욕이 없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니 기분이 안 좋았고요. 서로 끈끈한 유대가 생기기 전에 병이 났기 때문에 이해할 시간이 없던 거예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 어렵사리 치료받고 있을 때, 남편은 제가 한국이 편해서 미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더라고요. 남편이 계속 미국에 돌아오라고 재촉하니까 결국 제가 “당신이 원했던 결혼 생활이 아니라면 보내주겠다”고 통보했어요. 전화를 끊고 한참 뒤에 남편이 전화해서 “내가 나쁜 남편이었다”며 사과하더라고요.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지금은 끈끈해졌어요. 여러모로 서포트도 잘해주고 있고요. 지금 그 얘기를 하면 남편은 자기 덕에 이 결혼을 유지하는 거라고 말해요(웃음).

발병 전에는 각종 운동과 여행을 즐긴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 일상이 그립지 않나요.

삶이 완전 180° 달라졌죠. 살던 아파트에서 제가 늘 모임을 주도했던 터라 사람들이 “아파트의 메이어(시장)”라고 불렀을 정도였어요. 또 온 세상을 여행 다니며 하고 싶은 건 다 했는데 일상생활조차 어려워졌으니 처음엔 너무 갑갑하고 막막했어요. 원래 에너지가 100%였다면 아프고 난 뒤 10%밖에 없는 셈이었죠. 그때 그렉 맥커운의 ‘에센셜리즘’이란 책을 읽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현대인들이 많은 걸 하려고 하지만 막상 중요한 건 몇 개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중요한 것에 집중하라며 ‘Less but Better’라고 하더라고요. 제 상황에 딱 맞는 메시지였어요. 지금도 매일 운동하고 싶고 등산하고 싶은데 그런 거에 안타까워하는 건 제 손해예요. 남은 10% 에너지로 환자를 보고, 제자를 잘 가르치고, 책 쓰고 강연하는 데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참 다행인 게, 놀고 싶은 만큼 다 놀아봐서 지금 아픈 게 덜 억울해요.

인생의 후반전을 앞두고 있는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복이 많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가난하게 자랐지만 부유하게 됐고, 한국에서 좌절했지만 미국에 와서 의사가 됐어요. 또 심하게 아팠지만 어느 정도 회복해 다시 일하게 됐고요. 이런 시간을 통해 삶을 다시금 바라보게 됐고, 궁극적인 가치와 목표도 깨달았어요. 그동안에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꼭대기에 올라서기 위해 애썼는데 지나고 보니 나만 잘 사는 게 전부가 아니더라고요. 이제는 지난 20년 가까이 마음이 힘든 사람, 죽고 싶은 사람 등을 치료하며 깨닫게 된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해결 방법을 제시해주고 싶어요. 특히 여전히 부모와 사회로부터 많은 것을 강요받는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너 자신의 마음을 따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 아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업, 물질, 외모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깨닫고 진짜 가치를 따라서 살면 좋겠어요. 그게 제 꿈이에요. 그런 사명감으로 기운이 날 때마다 유튜브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고, 한국에서 강연하고 있어요. ‘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전체의 16%에 해당하는 사람이 변화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학설이 있어요. 그걸 ‘티핑 포인트’라고 하죠. 저의 이런 노력이 지금 당장은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 댐이 무너지는 순간이 올 거라고 믿어요.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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