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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연기·각본 1인 3역, ‘헌트’ 이정재

심미성 프리랜서 기자

입력 2022.08.24 10:00:01

마이클 만, 두기봉….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헌트’를 두고 액션영화 거장의 이름이 소환되고 있다. 그만큼 이정재가 보여준 뜻밖의 연출력에 관객들이 놀랐다는 의미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이후 배우로서도 새로운 페이지를 쓰고 있는 지금, 감독 이정재의 야심 찬 도전 ‘헌트’가 개봉했다.
지난 5월 제75회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섹션에 진출해 처음으로 관객을 만난 ‘헌트’는 당시 평단으로부터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이미 배우로 승승장구 중인 이정재가 좋은 감독까지 될 것이라곤 다들 기대하지 않았다.

배우 출신 연출자의 작품이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았던 전례도 많은 터였다. 하지만 ‘헌트’가 국내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되며 상황은 반전됐다. 칸영화제에서의 쓴 평가를 뒤집고, 한국의 새로운 배우 겸 감독의 탄생을 너도나도 반기고 있는 형국이다.

‘헌트’는 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한 단락을 호기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액션 첩보물이다. 영화는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 ‘동림’을 둘러싸고 이를 색출하기 위한 안기부의 수사 지시가 내려오며 시작한다.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도의 심리전이 관객을 장악한다.

무엇보다 두 주연 배우가 평행선을 내달리다 서로 엇갈리며 자아내는 긴장이야말로 영화 ‘헌트’를 관람하는 최대 오락 요소다. 게다가 X세대 청춘스타의 상징이기도 한 ‘태양은 없다’(1998) 이후, 오랜 영화계 절친으로 우정을 다져온 배우 이정재와 정우성이 24년 만에 다시 만났다. 어느 작품에서나 날카로운 존재감을 내비친 배우 전혜진, ‘오징어 게임’을 함께한 ‘코카인 댄스’의 주인공 허성태, 특유의 분위기로 담담한 서정의 얼굴을 보여준 신인 고윤정까지. 다채로운 매력의 배우들과 함께 완성한 ‘헌트’ 이정재 감독을 만났다.

‘헌트’가 된 ‘남산’

영화 ‘헌트’ 포스터.

영화 ‘헌트’ 포스터.

제5공화국을 배경으로 서로를 의심하는 안기부 요원 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헌트’ 시나리오는 ‘남산’이라는 이름으로 충무로를 떠돌았다. 이정재가 처음 시나리오를 알게 된 것은 ‘관상’(2013) 촬영을 끝내고 한재림 감독과 가진 식사 자리에서였다.



‘남산’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어떤 부분에 매료되었나요.

한재림 감독이 ‘남산’이라는 스파이 장르 시나리오가 있는데 할 만한 역할이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한 감독의 스파이 영화라니 기대가 컸죠. 배우로서 욕심이 났어요. 그런데 한참 연락이 없으시더라고요. 나중에 들으니 시나리오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오지 않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해요. 아쉬움이 들었죠. 2년쯤 뒤에 다시 그 시나리오가 제작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어요. 읽어보고 싶어졌죠. 막상 시나리오를 보니 한 감독이 연출을 포기한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하지만 잘 수정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어요. 그렇게 막연한 기대로 시작하게 된 거예요. 이렇게 고생길이 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한 치 앞도 몰랐던 거죠(웃음).

그간 많은 감독이 연출을 포기한 시나리오였습니다.

포기한 이유는 다 달랐어요. 어떤 분은 시나리오의 시의성에 의문을 품었고, 또 어떤 분은 액션신이 많아 예산이 느는 것에 대해 걱정했어요. 예산이 많이 들어가면 그만큼 손익분기점도 높아지니까요. 두 주연, 투톱 구조에서 완벽한 밸런스를 추구하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감독도 있었죠.

그러다 연출을 직접 맡게 됐습니다.

연출자를 열심히 찾았지만 거듭 성사되지 못했어요. 영화인 사이에서 ‘남산’은 오랫동안 안 풀리는 프로젝트로 각인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시나리오를 수정했고 그 모습을 제작사 사나이픽처스의 한재덕 대표님이 좋게 봐주셨어요. 연출을 직접 해보라는 제안도 해주셨고요. 응원해주셔서 용기를 냈죠. 사나이픽쳐스를 통해 좋은 스태프를 만나면서 프로젝트 윤곽이 갖춰졌어요.

시나리오가 바뀌면서 영화 제목이 새로 나왔다. 이정재는 “시나리오를 수정하면서 영화 주제도 바뀌었는데, 그러다 보니 ‘남산’이라는 제목이 어울리지 않았다”며 “조직 내부에 있는 ‘동림’을 잡기 위한 사냥이 시작됐다는 설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헌트’라는 제목을 붙이게 됐다”고 말했다.

연출자로서 첫 현장에 나선 때를 기억하시나요.

첫 촬영부터 규모가 꽤 큰 장면을 찍었어요. 도쿄 거리 신인데 긴박한 액션이 많았어요. 미술팀 도움으로 일본 거리가 만들어졌고, 보조 출연자도 많았어요. 이 상황들을 통제하는 건 분명 어려운 도전이었죠. 오히려 첫 장면의 스케일이 컸던 부분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더 꼼꼼하게 준비해야겠다는 경각심이 들었으니까요. 다들 이정재의 ‘레디, 액션’ 사인은 어떨지 궁금해했는데 액션과 컷 사인은 조감독님이 담당하셨습니다(웃음). 덕분에 저는 연출과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죠.

감독 이정재의 레디, 액션

연출할 때 어떤 부분에 집중했나요.

영화의 주제가 지나치게 도드라지면 관객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았어요. 주제나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각 캐릭터 간의 딜레마만 살짝 보여주는 정도로 표현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스스로 영화 보는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까지는 영화 속 선인과 악인을 구분 지어왔는데, 너무 영화를 편하게 봤던 거 아닌가. 그래서 사람이 왜 착하고 나쁜지를 좀 더 깊이 있게 고찰하고 싶었어요. 먼저 판단하기보다 복잡한 심리를 다양한 결로 그리고 싶었죠. 상대적으로 명료하지 않은 영화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작은 단서나 복선들을 촘촘히 깔아두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 출신 감독의 연기 디렉팅도 남달랐을 것 같아요.

배우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상상해서 행동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는 없거든요. 자신만의 감정과 행동의 적절한 느낌을 찾길 원했어요. 함께 꼼꼼히 모니터하면서 대화로 만들어나갔죠. 더 해보고 싶은 표현이 있다면 해보라고도 적극 권했어요. 제 역할은 자연스러운 현장을 조성해야 하는 거였죠. 연기에 관해서는 배우들을 믿고 가고 싶었어요. 배우뿐 아니라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했고요. 다수의 합의와 동의를 통해서 진행하다 보니 완전히 새로운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은 거의 없었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유행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취소했다 들었습니다.

일본이나 태국 장면은 한국에서 찍을 계획이었지만 미국 장면은 국내에서 찍는 것이 불가능했어요. 최대한 미주 지역에서 찍으려고 현지 스태프를 섭외해 촬영 날짜까지 다 잡아둔 상태였는데, 코로나19의 유행으로 계속 미뤄졌죠. 아무리 기다려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결국 국내에서 촬영했어요. 아쉬움은 남지만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에 한국에서도 좋은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프리프로덕션(촬영 전 준비 단계) 작업을 꼼꼼히 했어요. 사실적인 배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해서죠. 일본처럼 보이려고 오른쪽 핸들 차량을 직접 공수하고, 태국 배경을 위해서 야자수도 많이 심고요. 물론 많은 예산이 들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코 넉넉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어요.


“두 인물이 끝까지 간다”

영화 ‘헌트’ 촬영장에서 이정재 감독이 모니터를 보고있다(왼쪽).헌트’의 한 장면.

영화 ‘헌트’ 촬영장에서 이정재 감독이 모니터를 보고있다(왼쪽).헌트’의 한 장면.

25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 ‘헌트’는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우리 대통령을 향한 테러가 발생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한다. 각각 안기부 해외팀과 국내팀에 속해 있는 박평호와 김정도는 내부 스파이 동림의 존재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심한다.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정(고윤정)과 평호의 관계도 흥미롭다.

극 중에서 미스터리의 중심은 동림의 정체입니다.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전면에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영화가 미스터리를 계속 품고 가도록 만들었어요. 주제는 영화 토대에 잘 깔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어디까지나 중심이 되는 건 두 인물이 끝까지 달려 나가는 동력이라고 믿었죠. 관객이 왜 두 사람이 저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나를 생각하며 끝까지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랐어요. 덕분에 폭발력을 가진 결정적인 장면도 나올 수 있었고요.

고윤정 배우가 맡은 대학생 유정 역할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유정 역을 놓고 가장 많은 서치를 했어요. 기성 배우를 캐스팅할지 신인을 발탁할지 의견이 분분했죠. 하지만 그런 잣대로만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사람을 직접 보고 발탁했어요. 결과적으로 고윤정 배우와 함께해 다행이죠. 윤정 씨는 출연한 드라마를 통해 눈여겨본 배우였어요.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시나리오를 해석하는 눈이 돋보였죠. 표현 방식에 대해서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신인임에도 굉장히 유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분석하려는 자세가 인상적이었어요.

황정민, 주지훈, 김남길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특별 출연했습니다.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정우성 씨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했어요. 우성 씨와 제가 ‘태양은 없다’ 이후 20여 년 만에 협업하기로 결정했을 때 동료 배우들에게 반가운 뉴스가 됐던 것 같아요. 응원하는 마음으로 돕고 싶다는 요청을 먼저 해오셨죠. 그렇게 하나둘 모이니 더 소문이 나고, 도와주겠다는 배우들이 계속 늘었어요. 바쁜 일정 중에도 밤을 새우고 촬영하러 오신 분이 꽤 계셨어요. 너무나 감사한 일이죠.

이정재는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으로 그야말로 콴툼점프했다. 9월 열릴 제74회 에미상에서 아시아 국적 배우로는 최초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한 그는 데뷔 이래 30년째 한국의 톱스타 자리에 있다. 그 시간 동안 ‘도둑들’(2012), ‘관상’, ‘암살’(2015) 등 흥행 영화의 주연뿐 아니라 1990년대 작가주의 감독과의 작업을 남겼다.

연출하며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젊은 남자’(1994), ‘흑수선’(2001)을 함께한 배창호 감독님을 빼놓고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만난 모든 감독을 통틀어 가장 열정적인 분이셨어요. 배우, 스태프와 대화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이나 현장 최전선에서 몸 사리지 않는 태도를 보고 많이 배웠죠. ‘태양은 없다’의 김성수 감독도 워낙 스타일리시하고 과감한 연출을 하시죠. ‘이재수의 난’(1999)의 박광수 감독, ‘인터뷰’(2000)의 변혁 감독에게서 본 섬세하고 유려한 연출도 많은 귀감이 됐습니다. 최근에 같이 작업한 ‘사바하’(2019) 장재현 감독, ‘오징어 게임’(2021) 황동혁 감독도 기억에 많이 남죠. 현장에서 “아, 그때 감독님이 이렇게 했었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제게는 큰 자양분이 됐죠.

이정재의 30년

1990년대 청춘스타로 떠오른 이후, 30대 중반을 넘기며 슬럼프를 겪기도 했습니다.

자신감이 떨어진 때가 있었죠. 남자 배우로서 20대를 지나 30대가 됐을 때, 이제 제대로 된 성인 연기로 거듭나야 할 시점인데 정작 시나리오는 잘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마 청춘 역할을 맡기에도, 선이 굵은 역할을 맡기에도 애매한 나이였던 것 같아요. 당시엔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오지 않는 열차만 오매불망 기다린 거죠. 고민이 길어져 다른 사람에게 시나리오가 넘어간 적도 있고요. 이제는 인생이 단 하나의 요인 때문에 드라마틱하게 바뀌진 않는다고 생각해요. 여러 요소가 합쳐진 결과죠. 다른 직업을 가져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던 때도 있었어요. 이제는 지금 나이에도 뭔가 해보고 싶은 일이 생기니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연출자로서 차기작도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

연출 계획은 전혀 없고요. 연기만 하는 작품을 찾고 있습니다(웃음). ‘헌트’를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시나리오 단계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해야 연기에 도움이 되는지, 연출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일을 하는지, 앞으로 감독과는 현장에서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지요. 배우로서의 앞날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된 기회였습니다.

#이정재 #헌트 #감독 #여성동아

정재 씨와 우성 씨, 24년 우정의 대화
7월 27일 언론시사회 당시 ‘헌트’의 두 주연 배우 이정재와 정우성이 나눈 대화. 서로를 향한 애정과 존경이 묻어난다.

정우성
24년 만에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은 의미가 깊지만, 또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희가 연기할 때 만들어지는 공기는 특별함을 준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곱씹을 수 있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길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연기하며 김정도와 박평호가 훌륭한 대립 구도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시간이 갈수록 정재 씨는 옷이 헐렁해질 정도로 마르더라고요. 숙소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측은한 마음도 들었어요. 하지만 본인이 선택한 책임의 무게를 꿋꿋하게 짊어지고 가는 모습에 든든했죠. 단지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작품의 모든 과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감개무량했어요.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 시간을 잘 걸어왔구나, 뿌듯함이 있었어요.

이정재
우성 씨 말대로 체력이 너무 떨어지는 걸 경험했어요. 그만큼 할 일이 많았고 살도 많이 빠졌지만 동료애를 느끼면서 힘낼 수 있었어요. ‘태양은 없다’ 이후로 처음 합을 맞추는 김에 서로의 캐릭터가 부딪히는 대목을 더 극대화해보고 싶었어요. 관객분들도 여기에 재미를 느끼실 거라 생각했고요. 저희가 워낙 가까운 사이라는 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죠. 사실 ‘태양은 없다’를 찍을 때나 지금이나 영화에 대해 저희가 가진 열정, 온도는 거의 같아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하다고 생각해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일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더 늘었다는 거겠죠. 요즘은 우성 씨나 동료들을 만나면 영화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 같아요.

사진제공 메가박스 중앙㈜플러스엠 정우성인스타그램



여성동아 2022년 9월 7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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