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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story

그리운 이름, 박완서 10주기 맞은 장녀 호원숙의 기억

글 정혜연 기자

입력 2021.01.26 10:30:01

아이 다섯을 키우다 불혹의 나이에 등단해 40년 동안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국 문학의 거목 박완서 선생이 떠난 지 10년이 흘렀다. 돌아가시고 나서 더 가까워진 듯하다는 장녀 수필가 호원숙이 풀어놓은 어머니 이야기.
누구에게나 이상향이 있고 살면서 한 번쯤 피를 끓게 하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작가 박완서는 그런 이가 아닐까. 2011년 1월 22일, 그녀가 떠났을 때 “박완서라는 크고 높고 따뜻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음을 잊지 않겠다”던 정이현 작가의 말처럼 박완서 선생은 여전히 많은 이의 가슴속에 소중한 존재로 남아 있다. 

박완서 선생의 삶이야말로 소설 그 자체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겪고, 6·25전쟁을 거쳐 분단 이후 21세기 한반도를 살았던 세월은 그녀가 글을 쓰게 하는 근간이 되었다. 격변의 시대를 사는 여성 지식인으로서 세밀하게 포착해낸 시대의 아픔은 여러 작품 속에서 빛난다.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그녀는 숙명여고를 거쳐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뜻하지 않게 6·25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한 그녀는 대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던 중 남편 호영진을 만나 1953년 스물셋의 나이에 결혼, 1남 4녀를 낳고 마흔이 될 때까지 전업주부로 살았다. 

늘 책을 읽으며 문학을 가까이했던 그녀가 글을 쓰기로 결심을 한 데는 1968년 열린 화가 박수근의 유작전이 계기가 됐다. 2010년에 출간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그녀가 전시회를 다녀온 뒤 그에 관한 전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펜을 들었다는 뒷이야기가 등장한다. 박수근 화백에 대한 기억을 풀어내며 써내린 소설 ‘나목’은 1970년 11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세상에 소개됐다. 

소설가가 된 박완서 선생은 담낭암으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40년 동안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장편소설 ‘목마른 계절’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서 있는 여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 15편과 단편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도둑맞은 가난’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친절한 복희씨’ 등 1백여 편을 비롯해 그녀가 남긴 산문은 6백60여 편에 달한다. 올해는 서거 10주기를 기리며 엄선해 묶은 에세이집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필두로 그녀가 마지막으로 쓴 장편소설 ‘그 남자의 집’과 연작 자전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이 개정 출간됐다. 

기일에 맞춰 출간되는 책 가운데 박완서 선생의 장녀 수필가 호원숙(67) 작가가 쓴 에세이 ‘엄마 박완서의 부엌-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도 있다. 호 작가는 어머니 박완서의 유지를 받들어 그녀가 남긴 경기도 구리 아치울 자택에서 10년간 지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어머니의 온기가 남은 집에서 그녀에 대한 애틋한 기억을 담담히 풀어냈다. 기일이자 출간일을 열흘 앞두고 서울 광진구의 한 호텔에서 호원숙 작가를 만났다.



10년, 하나의 맺음

박완서 선생이 2006년 여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노란집 마당에 앉아 손수 가꾼 꽃을 바라보는 모습.

박완서 선생이 2006년 여름,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노란집 마당에 앉아 손수 가꾼 꽃을 바라보는 모습.

공교롭게도 인터뷰 당일, 닷새 전 내린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또 한 차례 폭설이 내렸다. 호 작가는 눈이 쌓여가는 한강을 지긋이 바라보며 박완서 선생이 돌아가시던 날을 떠올렸다. 

“며칠 전 눈이 많이 오던 날, 멀리 사는 친구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어요. 자기 아들이 곧 박완서 선생의 10주기 아니냐고 일깨워주더라는 거예요. 그 친구가 10년 전 문상 오던 날, 눈이 너무 내려 아들이 운전을 대신해줬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상을 치르느라 경황이 없어 누가 오고 갔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요. 그렇지만 어머님이 돌아가신 그날과 장례를 치르는 동안 느꼈던 특별한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호 작가는 그 어느 해보다 바쁘게 기일을 맞았다. 지난해부터 일찌감치 기념 출판 문의가 쏟아졌다.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아도 기획 단계에서 의견을 내고 추모 글을 쓰는 등 챙겨야 할 일들이 많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대면 행사는 열리지 않지만 독자들은 10주기 기념 신간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그녀는 요란하지 않게 맞이하는 10주기를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기념 출판을 하나씩 마무리하는 것으로 10주기를 맞았어요. 어머니께서 많은 글들을 남기셨고, 사후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는데 이번 일련의 출판으로 하나의 맺음이 된 것 같아요. 등단 이후 어머니는 작가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 여러 문학지에 단편을 실어 평가를 받아야 했어요. 그 시절에는 신인 작가가 진정한 작가로 서기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죠. 아주 초기의 단편인 ‘지렁이 울음소리’를 두고 평론가 김주연 선생이 “이런 단편도 쓸 수 있는 작가”라고 인정했어요. 그런 뜻깊은 작품들이 이번 10주기에 재조명받아 새로운 독자를 만나길 바랐어요.” 

생전 박완서 선생은 독자들뿐 아니라 여러 문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최근에는 그녀의 작품을 찾아 읽으며 전쟁의 비극, 중산층의 삶, 여성문제 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젊은 층도 늘었다. 직접 교류는 없지만 작품을 통해 박완서 선생을 깊이 추억하는 젊은 문인들도 상당수다.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잘 알려진 정세랑 작가는 호 작가의 신간 에세이 추천 글에서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아껴 읽는 사람들은 문장을 재해석하기도, 재발견하기도 해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호 작가는 이에 깊이 동의했다. 

“어머니의 작품에는 많은 코드가 깔려 있어요. 몇 가지만 아는 독자가 있는 반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지점까지 끌어내는 독자도 있죠. 어머니 작품은 항상 그대로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자꾸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고등학교 때 읽는 ‘나목’과 30대에 읽는 ‘나목’, 지금 제 나이에 읽는 ‘나목’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처럼요.” 

칠순을 바라보는 호 작가는 소설가라는 직업의 무게를 견디며 글을 써내려간 장년의 박완서 선생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면 생전의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하게 될까. 호 작가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늘 정신적으로 앞서 있는 당신을 다 이해하기 버거웠다며, 돌아가시고 나서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어머니는 특별한 분이셨어요. 두뇌가 명석한 분이었기 때문에 조언을 구하는 이웃들에게 도움도 많이 주셨죠. 등단하고 나서는 어머니가 참 크게 느껴졌어요. 작품을 읽고 내용은 이해하지만 다 이해한다고 볼 수는 없는 상태였죠. 도리어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에요. 다시 읽으며 쓰실 당시 어머니가 어땠는지 떠올리고, 어떤 의도로 쓰셨는지 알게 됐거든요. 특히 마지막으로 쓰신 장편 ‘그 남자네 집’을 최근에 다시 읽으며 숨겨진 중요한 메시지가 너무도 많다고 느꼈어요.” 

이야기하던 도중 호 작가는 휴대전화 속 메모 앱에 적어둔 감동받은 구절을 찾아서 읽어줬다.

‘나는 이 나이까지 목격한 타인의 삶이나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여러 번 수정하면서 살아왔다. 거의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세상에 변화하지 않는 건 없었다.’

“어머니는 살면서 계속 자신의 생각을 변화시켜온 거예요. 또 소설 속 인물의 입을 통해 ‘이데올리기는 취향’이라는 말도 하셨어요. 2004년에 쓰신 작품인데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는 점에서 굉장히 놀라웠어요.” 

박완서 선생은 소설가 이전, 주부로서도 훌륭했다. 그 시절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반듯이 키워 모두 명문 대학에 합격시킨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교육을 받기 원했던 친정 엄마가 자신의 소신 덕에 서울대에 입학했듯 자녀들도 그러하길 바랐다. 맏딸의 교육을 위해 일본에서 출간된 수학 문제집을 사서 직접 번역해 가르쳤을 정도로 교육에 힘썼다는 일화도 알려진 바 있다.

소설가, 올 것이 왔구나

“어머니에게 교육은 신념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명석하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제가 첫째이니 어떻게든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중학교 시험이 어려웠는데 소위 일류 중학교를 가려면 미리 공부를 해야 했죠. 그 당시에도 고액 과외가 있었지만 우리는 받을 형편이 아니었어요. 어머니께서 여러 방면으로 정보를 얻어 서울 충무로에서 수학 문제집을 사오셨고, 그것으로 준비한 끝에 일류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다섯 남매를 키우며 살림에 교육, 글쓰기까지 모두 해낸 박완서 선생은 오늘날 상상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호 작가는 박완서 선생에 대해 “굉장히 집중력이 뛰어난 분”이라며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하기보다는 그때그때 몰입했고, 때마다 손길이 필요한 자식에게 더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한 삶의 지혜 덕분에 박완서 선생은 자녀를 키우며 등단할 수 있었다. 호 작가는 밤이 되면 글을 쓰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마흔에 엄마에서 소설가가 된 어머니를 보며 전 그저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늘 지혜로웠고, 항상 무엇인가 쓰던 분이었기에 제게 있어 어머니의 등단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당선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담담하셨어요.” 

박완서 선생의 성정이 어떠했는지는 호원숙 작가의 신간 에세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미나리를 다듬으며 거머리를 대담하게 떼어버리던 야무졌던 손’ ‘마치 기 싸움이라도 하듯이 민어의 눈을 보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건 참을 수 있지만 맛없는 건 절대로 안 먹는다’ 등 여러 구절에서 체구는 자그마했으나 용감하고 소신 있게 행동했던 그녀를 그리게 된다. 호 작가는 에세이를 쓰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더욱 명료해졌다고 한다. 

“물론 기억하고 있지만 쓰면서 추억을 불러일으켜 선명해진 장면들이 많아요. 길에서 지렁이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겁내면 어머니께서는 두려운 게 아니라고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또 그때는 가정집마다 석유를 부어 사용했는데 그런 위험하고 힘든 일은 누구에게든 기대지 않고 본인이 직접 하셨죠. 그런 대담함이 생활 속에서 자연히 드러나는 분이었어요.” 

2020년, 감염병 시대를 살며 집에만 머무르는 동안 호 작가는 유튜브를 보면서 베이킹을 즐겼고, 그 과정을 세세하게 에세이에 풀었다. 수십여 개 영상을 보고 독학한 끝에 지금은 손주들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빵과 쿠키를 만들게 됐다. 과거에도 호두파이를 곧잘 구웠는데 박완서 선생이 매우 좋아하셨다고. 책에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온 신경이 거기에 가 있을 때 “호두파이도 곧잘 굽더니만 요즘은 안 하네”라며 서운해하던 노모에게 “그거 다 설탕 덩어리예요”라며 한마디로 덮어버린 데 못내 아쉬움을 느끼는 일화도 등장한다. 호 작가는 자신의 베이킹 솜씨가 사실 어머니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오븐은커녕 전자레인지도 보급되지 않던 시절에 여성 잡지 부록으로 나오는 레시피를 참고해 베이킹을 하셨어요. 베이킹파우더가 없어서 이스트로 반죽하고, 이불 속에 넣어 부풀린 것으로 카스텔라를 만들어주셨죠. 이스트 반죽으로 피를 만들어 해주셨던 호빵 같은 고기만두도 기억나요.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신간 에세이에는 즐거운 추억에 관한 글도 많지만 아픈 기억에 관한 글도 있어 한참을 머물게 한다. ‘만두타령’이란 글은 온 가족이 만두를 빚던 행복한 풍경에서 박완서 선생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고로 잃은 심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지나 호원숙 작가의 아들이 홍콩에서 근무하던 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읽다 보면 만두가 이토록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식이었나 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그걸 쓰면서 슬펐어요. 어머니는 ‘나목’에서 개성만두를 리드미컬하고 생생하게 묘사하셨어요. 하지만 실제 주인공의 상황은, 삶의 생기를 잃은 어머니가 겨우 내놓은 시큼한 김칫국에 질려 그 울적함이 목구멍 근처에 묵직하게 걸려 있는 상태였죠. 글을 써 놓고 어릴 적 만두 빚던 시절이 생각나 혼자서 만두피를 만들어봤는데, 중간에 기운이 딸려서 그만뒀어요. 만두 빚는 것이 굉장한 노동이란 걸, 우리 어머니는 젊어서 그런 걸 다 감당하고 사셨다는 걸 깨달았죠.”

글, 어머니의 무게

호 작가는 어머니에 이어 글을 써오고 있다. 젊은 시절 월간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기자였던 그녀는 월간 ‘샘터’에 에세이를 쓰며 수필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2006년 첫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를 냈고, 박완서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에는 그녀의 출간을 도우며 자신의 글을 써왔다. 어머니가 떠나고 4년 뒤에는 그리운 마음을 담은 에세이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를 출간해 선생을 추억하는 많은 독자들의 갈증을 해결해줬다. 

대단한 자식을 둔 부모는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겠지만, 대단한 부모를 보고 자라온 자식은 그렇지 않다. 부모를 뛰어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 더욱이 같은 길을 걸어간다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박완서’라는 큰 산을 보고 자라왔고, 뒤를 이어 글을 쓰고 살아온 호 작가의 삶의 무게 역시 클 것으로 짐작됐다. 

“그럴 때도 있었지만 이제 다 감사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베개를 적실 정도로 눈물이 났고, 후에는 그 집에 살면서 ‘내게 남겨진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부담으로 벌벌 떨 때도 있었어요. 첫해에는 계속 글을 청탁받았어요.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한 편 한 편 마치 숙제를 하듯이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게 책이 나오고 나서는 내가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힘들어도 써서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감사하게 됐어요.” 

자신의 글보다 어머니에 관한 기억,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바라는 이들의 청탁에 호 작가는 성심껏 응했다. “내가 아는 정보라든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내어주고 싶다”고 말하며. 그러면서 자신은 남은 시간에 마당의 꽃을 가꾸고, 베이킹을 하며, 영화를 보는 것으로 조용히 삶을 즐기는 데 만족한다고 말했다.
문득 호두파이에 관한 에세이 글이 떠오르며 그녀가 다시 어머니를 만나면 어떤 음식을 해주고 싶을지 궁금해졌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을 때 제대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셔서 눌은밥을 해드린 적이 있어요. 훗날 어머니가 그날 일을 쓰시며 ‘한 술 떠 입에 넣는 순간 딸의 눈이 빛났다’고 표현해서 감사했어요. 음식이란 어떤 이벤트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삶의 지속성에서 오는 한 부분이죠. 어머니가 저희에게 해준 음식은 모두 정성이 담겨 있었고,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감사해요. 저 역시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그날의 기분과 분위기에 맞게 사랑을 담아 음식을 해드리고 싶어요.”

사진 홍태식 박해윤 기자 
장소제공 워커힐호텔



여성동아 2021년 2월 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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