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접속(1997)
‘접속’의 수현
PC통신과 디지털 문화가 번지던 세기말, 라디오 PD 동현(한석규)과 그가 연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청취자 수현(전도연)은 ‘해피엔드’와 ‘여인2’라는 닉네임으로 소통을 시작한다. 채팅이라는 비대면 소통 수단을 전면에 끌어오면서 영화는 직접적인 소통보다 은근하게 퍼지고 쌓이는 감정의 파동에 주목한다. 라디오에 보낸 신청곡의 설렘, 피카디리 극장 앞에서의 기다림, 공중전화로 전하는 음성 메시지의 망설임…. 겹겹이 쌓인 감수성의 총체는 마주 보며 얻는 즉각적인 기쁨이 아니라, 어긋나는 시차를 견디고 생각하는 얼굴에 담긴다.
당시 신인이었던 전도연에게 수현 역할은 하마터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서 ‘연기력’을 보지 못했던 사람 모두가 캐스팅을 반대했다. 전도연도 당시엔 캐릭터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저 대본 외우기에 급급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장윤현 감독이 “전도연을 싫어하던 스태프들이 모두 전도연의 팬이 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신인의 모습으로 전도연은 그해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에서 신인배우상을 꿰찼다.
02
‘해피 엔드’(1999)
‘해피앤드’의 보라.
전도연이 맡은 보라는 남편 민기(최민식)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과거의 연인 일범(주진모)과의 은밀한 외도에 빠져 있다. 민기와의 생활에 권태가 짙어지는 동안 보라는 일범과의 관계를 끊어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한편 민기도 보라의 비밀을 눈치채곤 괴로움에 휩싸인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세 남녀는 상황을 타개할 플랜을 각각 세우는데, 결말부는 민기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공포로 물든다.
멜로와 치정으로 시작해 잔혹 스릴러로 마무리된 영화의 극단적인 지점은 평단의 동의를 얻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남성상과 여성상을 뒤집은 관계 설정에서 돋보인 전도연의 연기는 굉장한 현실감을 줬다. 제2회 디렉터스 컷 어워즈에서 정지우, 최민식·전도연이 나란히 올해의 신인감독상, 배우상을 거머쥐었다. 작가주의 영화에 발을 디딘 전도연의 인상적인 행보였다.
03
‘밀양’(2007)
‘밀양’의 신애
‘밀양’을 찍으면서 여러모로 고통을 견뎌낸 전도연의 일화는 유명하다. 완벽한 장면이 탄생할 때까지 ‘오케이’ 사인을 주지 않기로 이름난 이창동의 영화였고, 재차 새로운 테이크를 진행하면서도 세밀한 연기 디렉션을 주지 않고 오로지 배우의 자의적인 해석을 훨씬 신뢰하는 감독의 방식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전도연은 미혼이었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분노, 죄책감의 진폭을 감당하기 버거워했다. 하지만 그는 이 지점에서 더욱 자존심을 세우고 욕심을 태웠다. 어떻게 보면 방식이 달랐을 뿐, ‘진짜’를 고집하는 감독과 배우의 목표는 같았다. 그 집념과 욕심이 스파크를 틔우며 ‘밀양’이라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밀양’의 ‘신애’ 이후 전도연은 전 세계 영화인이 찬탄하는 배우가 됐다. 제60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필두로 수십 개의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전도연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사랑 이야기가 빠진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작품을 선택할 때 시나리오 그 자체만 보려고 한다는 그는, 유독 사랑을 다룬 영화에 끌린다고 했다. 전도연에게는 ‘밀양’도 결국 신애와 종찬의 사랑에 관한 영화였다.
04
‘멋진 하루’(2008)
‘멋진 하루’의 희수
희수는 당장 돈을 받아내지 못하는 상황에 짜증이 난다. 그럴듯한 말만 앞세우는 병운을 따라다니며 답답함은 커지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그의 처지가 못내 밟힌다. 성마른 성격의 희수와 뺀질뺀질한 병운의 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관람은 즐겁다. 무엇보다 두 배우가 가장 잘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난 덕이다.
전도연은 ‘멋진 하루’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는 JTBC ‘방구석1열’에서 이렇게 부연했다.
“칸에서 상 받고 왔을 때 사람들이 ‘전도연’에게 기대하는 게 있었다. 촬영하면서 감독님과 호흡이 잘 맞은 것도 아니었고, 병운 캐릭터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감독님께 감사하다고 했다.”
05
‘무뢰한’(2015)
‘무뢰한’의 혜경
‘킬리만자로’ 이후, 무려 15년 만에 오승욱 감독이 절치부심해 내놓은 작품 ‘무뢰한’은 형사 재곤(김남길)이 살인 후 잠적한 준길(박성웅)을 잡기 위해 그의 애인 혜경(전도연)을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전도연이 분한 혜경은 단란주점 ‘마카오’를 운영하는 화려한 외양의 여자다. 깡패와 창녀, 이를 쫓는 형사의 멜로라는 해묵은 하드보일드의 재료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그럼에도 혜경을 단순히 부수적이고 퇴행적인 팜파탈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나 김혜경이야!” 뇌리에 남는 전도연의 대사는 이를 전적으로 밀어내는 몸부림 같다.
연기력이 절정에 달했다는 평가와 별개로 영화는 소수의 관객에게만 입소문을 탔다. 제24회 부일영화상에서 ‘무뢰한’으로 여우주연상을 받고, 전도연은 참았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전도연은 연기 안에서 예민하고 단호해진다. 답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내몰아 끊임없이 담금질한다. 그를 만든 8할의 성정. 자존심, 경쟁심, 엄격함, 욕심 따위의 단어가 배우 전도연 앞에서 후광을 입게 되는 까닭이다. 관객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전도연의 또 다른 영토가 궁금하다.
#전도연 #비상선언 #접속 #밀양 #여성동아
사진제공 씨제스엔터테인먼트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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