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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director

영화계 ‘뉴노멀’ 감독의 탄생

글 이미나

입력 2021.03.31 10:30:01

코로나19로 극장에 가지 못하는 우울한 상황 속에서 역설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지닌 감독들이 탄생했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영화계를 뒤흔들고 있는 차세대 능력자 리스트.

미나리 정이삭 감독
#늦깎이 감독의 대역전극 #이대로 오스카 수상?

요즘 국내외 영화계를 아울러 혜성처럼 등장해 현재진행형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화제다. 그 주인공은 얼마 전 국내에서도 개봉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 중인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43) 감독이다. ‘미나리’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 1세대의 이야기이자, 정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상당 부분 담겨 있기도 하다. ‘신호등도 없고, 햄버거 먹을 수 있는 곳도 두 군데뿐’이었던 작고 조용한 아칸소주의 시골 마을에서 자란 정 감독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떠올리며 영화의 제목을 붙였다. 그에게 낯선 토양에서도 어떤 작물보다 잘 자라났던, 질기고도 강한 생명력을 보여준 미나리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며 희망을 걸었던’ 세상 모든 부모에 대한 비유이자 가족 간의 사랑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정 감독은 자신의 부모가 ‘미나리’를 감상한 후 “네가 우리의 삶을 모르지 않았구나”라고 전했을 때 영화를 만든 뒤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한 지난 2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호명된 뒤에는 함께 있던 딸을 가리키며 “여기 이 아이가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라고 밝히기도 했다. 가족을 향한 그의 애정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지금은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감독이 됐지만, 그는 스스로의 삶을 ‘늦깎이’라고 표현한다. 실제 정 감독은 작가 지망생으로 예일대에 입학했으나 “지방 할당 쿼터를 채우기 위해 나를 입학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 실력이 끔찍했다”고 털어놓을 만큼 좌절을 겪었고, 뒤늦게 우연히 들은 영화 수업을 계기로 영화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2007년 르완다 부족 간의 학살로 고통 받은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작품 ‘무뉴랑가보’로 칸 국제 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이후 두 편의 영화에서 내리 실패를 맛본 뒤 연출자 대신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영화감독 은퇴까지 고민하던 때도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인생에서 변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유년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써내려간 원고가 바로 ‘미나리’ 시나리오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 작품은 제36회 선댄스영화제 미국 극영화 경쟁 부문 심사위원 대상과 미국 극영화 경쟁 부문 관객상 수상을 시작으로 미국 내 각종 영화제에서의 수상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4월 25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윤여정)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최종 수상도 점쳐지고 있다. 정 감독은 일본과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의 실사판 연출을 비롯해 속속 후속작 소식을 알려오는 중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의 기쁨을 조급하게 누리기보다는 “천천히, 신중히 해나가려고 한다”고 강조한다.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정 감독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내게 벌어졌던 모든 일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이었거든요”라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승리호 조성희 감독
#한국형 SF 영화의 시작 #그림의 대가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등 해외 OTT(인터넷으로 영화와 드라마 등 각종 영상을 제공하는 서비스)의 국내 상륙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가도 한편으론 반가울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이 지구상의 누군가는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한국 콘텐츠의 우수함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우주 SF 영화’를 표방하며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에 공개된 영화 ‘승리호’가 좋은 사례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두 차례나 개봉이 연기된 끝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사연이 있지만, 공개 당일 넷플릭스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영화 1위에 올랐다. 또한 미국의 한 제작사가 리메이크를 추진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그간의 우여곡절을 만회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수줍은 고집쟁이 천재!” ‘승리호’에서 장 선장을 연기한 배우 김태리가 작품을 연출한 조성희(42) 감독을 두고 남긴 평이다. 영화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미래, 그것도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쓰인 탓에 실제로는 CG가 입혀지지 않은 세트장과 녹색 크로마키 화면 앞에서 촬영됐다. 그럼에도 큰 호평을 받은 영상미의 비결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산 CG’와 더불어, 조 감독이 10여 년 전부터 승리호의 구석구석을 그리며 그만의 독보적인 세계관을 창조해온 덕분이다. 이와 관련해 김태리는 “첫 만남 자리에 노트를 들고 나와서 장 선장을 스케치하셨어요. 그림으로 많이 상상하니 독창적 장면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10년 넘게 준비한 만큼 머릿속에 그림이 확실했죠”라고 전하기도 했다. 




‘승리호’의 주역들과 
함께한 조성희 감독. 
유해진, 송중기, 
조 감독, 김태리, 진선규(왼쪽부터).

‘승리호’의 주역들과 함께한 조성희 감독. 유해진, 송중기, 조 감독, 김태리, 진선규(왼쪽부터).

‘그림’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영상미는 조 감독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힌다. 이는 감독의 이력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과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인디 밴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직접 CG 회사를 차려 광고 회사에 납품하기도 했다. 한 제작사에서 준비하던 괴수 영화의 크리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하거나, TV 애니메이션 ‘따개비 루’의 몇몇 에피소드도 직접 연출했다. 영화 아카데미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영화 연출을 공부하기 전부터,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내는 작업만큼은 이골이 날 정도로 반복해왔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자칫 현실적일 것 같지 않은 스토리도 조 감독의 그림 속에서는 땅을 단단히 디딘 채 보는 이를 납득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그는 2009년 처음으로 내놓은 단편영화 ‘남매의 집’으로 심사위원의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으면 대상작을 선정하지 않는다는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7년 만에 대상을 받았다. 상업영화로 처음 내놓은 ‘늑대소년’(2012)이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 모두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뛰어난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다. 때론 신파 아니냐는 평가를 듣는다 해도, ‘선함’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해나가는 것 또한 트레이드마크라 할 만하다. ‘늑대소년’에 이어 ‘승리호’로 다시 한번 조 감독과 만난 배우 송중기는 “그게 조성희 감독의 색깔 같아요. 그런 스타일을 제가 좋아하고, 그래서 작품을 선택했죠”라고 전하기도 했다. 송중기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이야기의 설정도, 배경도 각각 다르다. 하지만 특유의 그림, 그리고 ‘선함’을 믿고 지키려는 마음만은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조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바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조성희 월드’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쉬이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소리도 없이 홍의정 감독
#이토록 무서운 신예의 탄생 #질투를 부르는 연출력

코로나19로 유독 침체돼 있었던 지난해, 한국 영화계에서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홍의정(39) 감독의 ‘소리도 없이’가 아닐까 싶다. 조직의 하청을 받아 살인이 일어날 장소에 미리 비닐을 깔아주거나 시신을 암매장하는 일을 하는 태인(유아인)과 창복(유재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두 인물이 마치 평범한 일터에서 일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성실한 표정으로 각종 범죄를 저지르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전소설 ‘별주부전’을 모티프로 하고 있으며, 평범한 범죄극이 상상할 법한 전개를 비틀어 보여준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선함과 악함, 그리고 생존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다. 처음 홍 감독이 생각했던 영화의 제목이 ‘소리도 없이 우리는 괴물이 된다’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주제 의식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작품이 홍 감독의 첫 장편작이라는 점이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런던필름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마쳤고, 2018년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단편영화 ‘서식지’로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한국단편경쟁 섹션에 초청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소리도 없이’는 2016년부터 매달려온 일종의 장기 프로젝트인데,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을 선정해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제작 지원을 맡는 ‘베니스 비엔날레 칼리지 시네마’ 최종 후보작에 오르기도 했다. 홍 감독은 최종 후보작에 오르면서 한 달간 베니스 현지에서 참여했던 워크숍 당시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진행됐기 때문에 피 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임했지만, 불필요한 부분을 없애는 과정을 한번 겪으면서 쓰고 싶은 이야기의 원형이 나온 시간”으로 회상한다. 어쩌면 이 시간들은 한국에 돌아온 뒤 “상업성을 첨가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거나, 스토리나 캐릭터의 변경을 요구받으면서도 끝내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원형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뚝심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제41회 청룡영화제는 “주변의 영화인들에게 지난해 가장 인상적인 신인 감독을 물었을 때 모두가 홍의정 감독을 꼽았다. 어떤 이들은 ‘질투가 날 정도로 연출을 잘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그에게 신인감독상 트로피를 안겼다. 


‘소리도 없이’의 주인공 유재명과 홍의정 감독, 
또 다른 주연인 유아인(왼쪽부터).

‘소리도 없이’의 주인공 유재명과 홍의정 감독, 또 다른 주연인 유아인(왼쪽부터).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제작비에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인 제작비(13억원)에도 대본의 가치를 알아보고, 기꺼이 손을 잡은 배우들도 홍 감독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소리도 없이’ 제작보고회에서 “오늘 자리는 홍의정 감독을 스타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초석을 다지는 자리”라고 공언했던 배우 유아인은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자 “2백억원짜리 블록버스터 제안이 들어왔을 때 ‘와, 해볼까’ 하기도 하는데, 홍의정 감독님이 주신 작품은 배우로서 초심을 되새기게 했다”며 “저예산에 퀄리티가 보장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이 영화를 하면서 제가 가장 큰 가치를 둔 건 새로움이고 홍의정 감독님이 가지신 윤리 의식이었다. 영화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시는 분과 (작업)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그야말로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말했듯이 “장르의 관습에 발목 잡히지 않은 채 자신만의 보법으로 신선하게 걷는” 신예의 탄생이다.

벌새 김보라 감독
#59관왕에 빛나는 영화제 트로피 컬렉터 #여성의 시선, 한발 앞으로

2019년 문화계 결산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영화는 ‘벌새’다. 

같은 해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한국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는 등 놀라운 기록을 써내려간 와중에도, ‘벌새’의 행보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저예산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1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데다, 총 59개의 해외 영화제에서 온갖 상을 그야말로 수집하며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 1994년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극 중에 등장하고 주 무대가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설정되는 등 한국적 요소가 영화 곳곳에 있었음에도 언어와 국가의 경계를 넘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 배경에는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유무형의 차별과 폭력, 그리고 상실과 위로와 성장의 서사가 ‘한국’이라는 특수한 곳에 한정되어 있지만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서 이 작품은 만국 공통의 ‘자매애’를 깊숙하게 성찰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매해 개봉 영화 중 남성 중심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벡델 테스트’의 창시자인 앨리슨 벡델이 ‘벌새’를 두고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라고 평한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벌새’의 중심에는 오랜 시간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들여다보며 작품을 완성해낸 김보라(40) 감독이 있다. 고등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한 그는 동국대 영화영상학과를 거쳐 스물일곱의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컬럼비아대 대학원 영화과에서 공부하며 과연 자신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따랐었던 때, 종종 중학교 시절의 꿈을 꾸었던 게 ‘벌새’의 시작이었다. ‘모든 이에겐 각자의 우물이 있다’는 말처럼, 김 감독도 그 우물 속에서 잊기 어려운 트라우마와 상처를 한 동이씩 천천히 길어냈다. 그것들과 한 글자씩 맞바꾼 글이 ‘벌새’의 시나리오가 됐다. 2013년 초고가 나오고 2017년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혹독한 비평과 숱한 거절을 겪었음에도 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던 배경이다. 

자전적 경험과 허구를 직조해 만든 ‘벌새’가 ‘사람들에게 편지처럼 배달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놓고, 영화가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는 경험을 통해 답장을 받는 듯 행복을 느꼈다는 그는 비로소 영화감독으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선에 선 것처럼 보인다. 

김 감독은 “‘벌새’를 만드는 과정 안에서 확실히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 같다. 계속해서 조명되지 않은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풀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의 시선으로 조명되지 않았던 이야기에 주목하고, 사회에 꼭 필요한 의미 있는 시선들을 영화 속에 담아내고 싶다는 김 감독의 바람은 차기작에서도 묻어난다. 그가 준비 중인 작품은 김초엽 작가에게 2019년 ‘오늘의 작가상’을 안긴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단편 ‘스펙트럼’이다. 촉망받던 생물학자 희진이 사고로 불시착한 행성에서 지성을 가진 외계 생명체 루이와 조우, 특별한 교감을 나누는 내용이다. 1초에 평균 80번의 날갯짓을 하며, 꿀을 찾아 먼 거리를 날아다니는 벌새를 김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의 메타포로 여겼다. 그가 ‘벌새’와 같이,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좋은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메리크리스마스, 부산국제영화제,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엣나인필름, 판씨네마, A24 films 홈페이지



여성동아 2021년 4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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