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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역사 새로 쓴 봉준호 예술家 DNA

EDITOR 정혜연 기자

2020. 02. 27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역사를 새로 쓴 건 어쩌면 유전자의 힘일지도 모른다. 외할아버지부터 아들까지 4대에 걸쳐 예술가 집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가족에도 스포트라이트가 쏠리고 있다.

2월 10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4관왕의 영예를 안은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51) 감독. 뛰어난 연출력과 디테일한 면모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됐다. 그 가운데 예술가의 피를 흐르게 한 봉 감독 가족에 대한 관심도 매우 뜨거웠다. 

봉준호 감독은 1969년 9월 14일 대구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 등을 쓴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6)이다. 구보는 교과서에 그 작품이 실렸을 정도로 1930년대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작가로 꼽힌다. 당시 새로운 형식의 소설 기법을 시도해 학계에서 소설가 이상과 함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 봉 감독의 어머니 박소영 여사는 구보의 둘째 딸이다. 

봉 감독의 아버지 봉상균 교수 역시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1955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봉 교수는 재학 중 회화과에서 응용미술학과로 전공을 바꿔 디자인을 공부했다. 졸업 후 문화공보부 산하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미술실장으로 근무하며 무대미술과 영화 자막 서체를 디자인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학교와 영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고,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 연구상무이사, 1973년 대구상공회의소 자문위원, 1978년 한국디자인진흥원 연구개발 상무이사, 1983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등을 두루 거쳤다.

모더니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이 외조부

봉 교수는 여러 기관에서 디자인 관련 정책 마련과 디자인 개발, 교육 등에 힘쓰면서도 예술가로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픽 디자인, 판화 등 관련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학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봉 교수는 1965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09년까지 10여 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어 작품을 대중에 선보여왔다. 특히 2012년 그는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디자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봉 교수의 2남 2녀 가운데 장녀인 봉지희 교수 역시 예술계에 몸담고 있다. 그는 이화여대 섬유예술학과를 졸업한 뒤 경원대(현 가천대), 안양과학대(현 연성대), 이화여대 강사를 거쳐 현재 연성대 패션디자인비즈니스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 역시 섬유 미술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2009년 봉 교수의 마지막 개인전이 된 ‘봉상균 희수(喜壽) 기념전’에는 3대가 작품을 선보여 더욱 의미가 깊었던 전시로 회자된다. 2009년 2월 서울 서초동 한전프라자갤러리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장남 봉준수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의 여섯 살 난 딸 주연 양과 봉상균 교수의 딸이자 봉 감독의 누나인 봉지희 교수, 봉 감독까지 네 명이 모두 작품을 선보였다. 2003년 ‘살인의 추억’과 2006년 ‘괴물’이 연거푸 흥행에 성공하며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른 봉 감독도 직접 그린 영화 ‘괴물’의 스토리보드(드라마·영화의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을 배열한 화판)를 전시해 화제가 됐다. 

전시회가 열린 첫날, 여성동아를 비롯한 여러 취재진이 참석했다. 봉 감독은 영화 ‘마더’ 촬영 중에도 아버지의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고,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또한 자신의 스토리보드를 비롯해 아버지의 작품과 누나, 조카의 작품까지 세세하게 바라보며 감상에 잠겨 조용하면서도 진중한 영화감독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봉 교수는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봉 감독은 어떤 아들이냐고 묻자 그는 “집에서 늘 그림을 그리는 제 모습을 보고 자란 터라 자연스레 예술에 눈을 뜬 것 같다. 준호는 여섯 살 때부터 그림 그리며 노는 걸 좋아했다. 미대에 진학할 것을 권했지만 전공은 부담스러워 싫다고 했다. 사회대를 갔지만 영화감독이 된 걸 보면 끼는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영화감독으로 대성한 아들이 참 대견스럽다”고 추켜세웠다. 

옆에서 아버지의 인터뷰를 듣던 봉 감독 역시 아버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봉 감독은 “여든을 앞두고도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여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어릴 때부터 작업하는 아버지를 어깨너머로 봐왔다. 어릴 때 만화를 좋아했는데 심심하면 따라 그리며 놀았다. 어릴 적 경험이 영화 작업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영화 스토리보드는 지금도 직접 만든다”며 자신의 작업 방식이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설명했다. 

봉 교수는 2017년 운명을 달리했다. 가족과의 작품 교류를 중시했던 가풍을 봉 교수의 자제들이 이어받아 2018년에는 작고 1주기를 기념한 ‘봉상균의 디자인과 삶’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이 자리에도 봉준호 감독은 누나, 형들과 참석해 아버지를 추모했다.

영감 주는 아내, 영감 받은 아들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봉 감독의 아내 정선영 씨. 
지난 1월 미국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봉 감독과 아들 효민 씨(아래).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봉 감독의 아내 정선영 씨. 지난 1월 미국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봉 감독과 아들 효민 씨(아래).

봉준호 감독의 아내 정선영 씨와 아들 봉효민 감독도 화제다. 봉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뒤 수상 수감을 말하며 “언제나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다”고 밝혔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배우들과 무대 앞쪽 객석에 앉은 반면 그의 아내와 아들은 미국 배급사 관계자와 함께 1층 객석 뒤편에 앉아 있었다. 작품상에 ‘기생충’이 호명되는 순간 정 씨와 아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환호했고 이 모습이 매거진 ‘LA타임스’ 리포터에 포착돼 언론에 공개됐다. 

그의 아내 정선영 씨는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져 있다. 봉 감독은 미국 매체 ‘배너티 페어’와 인터뷰에서 “대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영화광인 아내를 처음 만났다. 아내는 늘 나의 첫 번째 독자였고, 대본을 아내에게 보여줄 때마다 두려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온라인 매체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는 영화 속 기우의 이야기는 본인의 경험담임을 밝히고 “대학 시절 여자친구의 소개로 부잣집 수학 과외를 하러 갔다가 두 달 만에 해고당했다. 그때 여자친구가 지금의 아내”라며 특별한 인연임을 알렸다. 

정선영 작가는 봉 감독이 1994년 발표한 단편영화 ‘지리멸렬’의 편집 스태프로 참여한 바 있다. 이듬해 1995년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후 봉 감독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하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으나 관객 수는 10만을 겨우 넘기며 흥행에 참패했다. 당시 그는 감독을 포기해야하나 고민했을 정도로 생활고를 겪었는데 그때 정 작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고. 이후 봉 감독의 재능을 믿고 기회를 준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 덕에 다시 메가폰을 잡았고,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기사회생한 뒤 2006년 ‘괴물’로 1천만 감독 반열에 올랐다.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감독의 길을 걷고 있다. 봉효민 감독은 2017년 YG엔터테인먼트 자회사인 YG케이플러스에서 웹무비 프로젝트 ‘디렉터스 TV’의 네 번째 에피소드 ‘결혼식’ 연출을 맡은 바 있다. 이후 영화 ‘1987’ ‘골든 슬럼버’ ‘옥자’ ‘리얼’ 등에 조연출로 참여했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활동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성을 빼고 ‘효민’이라는 이름으로 감독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사진 조영철 기자 디자인 박경옥
사진제공 게티이미지 LA타임스 리포터 에이미 코프먼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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