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연기의 대명사 이순재 세월을 비웃다

1935년생<br><b>데뷔</b>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br><b>대표작</b>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허준’‘베토벤 바이러스’,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br><b>연기철학</b> “최선을 다해 연기에 임하되 배역에 욕심내지 않는다.”

‘야동순재’가 끝이 아니었다. 배우 이순재(76)는 얼마 전 또 한 번 화제를 몰고 왔다.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1백만 관객 동원에 성공하며 영화계에 ‘조용한 파란’을 불러일으킨 것. 극중 죽음을 앞두고 소년 같은 사랑에 빠진 노인 역을 맡아 보석 같은 내면 연기로 후배 연기자들에게 귀감이 됐다. 이쯤 되니 그의 연기 변신은 어디까지일지 감을 잡을 수 없다.
60년 가까이 직접 몸으로 연기 이론을 증명해내고 있는 이순재. 얼마 전 그는 SBS라디오 러브FM에서 마련한 ‘스타 특강’ 강연자로 나서 자신의 연기 인생을 반추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도전의식과 용기, 지혜를 요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성실한 삶의 태도를 꼽았다. 실제로 그는 방송가에서 지각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촬영 중에도 연극과 드라마, 학교 강의까지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매번 촬영장에 가장 먼저 나타났다.
“난 처음부터 톱스타도 아니었고 대단히 평범한 조건의 보통 연기자였습니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니 이 나이까지 불러주는 곳이 있습니다. 혹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보셨어요?(웃음) 가을쯤 또 드라마 두 편을 시작하는데 이번에도 둘 다 영감 역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똑같은 영감 역이라고 해도 매번 다른 인물인 만큼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배역 공부를 충실히 합니다. 요즘도 ‘‘욕망의 불꽃’ 때와는 또 어떻게 다르게 할까’ 하고 연출자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서울대 철학과 출신인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연극에 빠져 있던 후배의 영향으로 연극 동아리에 입단, 처음으로 연기 세계를 접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연기를 잘했던 건 아니다. 첫 작품에서는 호탕한 마도로스의 웃음소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배역을 뺏길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해 그날부터 빈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방학 기간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직 마도로스 웃음을 연습했다. 두 번이나 퇴짜 놓은 연출가도 열심히 노력하는 그의 모습에 감복해 그에게 배역을 맡겼다고 한다. 이순재는 “솔직히 연기가 확 늘지는 않았는데, 잘했다고 칭찬을 많이 해주더라. 그날의 칭찬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껏 작가, 연출가를 찾아가서 배역 좀 달라고 사정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뭐든 열심히 하면 기회는 언제든 온다”고 덧붙였다.

“굶어 죽어도 좋으니 평생 연기하겠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임에도 그는 여전히 현장에서 연기자들과 미리 호흡을 맞춰본다. 연기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의 약속이기에 그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연기자의 기본이자, 연기를 잘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자신 스케줄만 챙기는 얌체 스타일의 젊은 연기자들을 꼬집기도 했다.
“가끔 보면 봉고차(연예인들이 주로 타는 밴)를 타고 와서 자기 분량만 연기하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친구들이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거침없이 하이킥’ 할 때는 그 노련한 나문희씨하고도 수없이 대사와 동선을 맞췄어요. ‘욕망의 불꽃’ 하면서도 늘 촬영에 들어가기 전 신은경씨와 서너 번 정도 대사 맞추는 건 기본이었죠. 연기는 톱스타 혼자 하는 원맨쇼가 아닙니다. 집단의 조화가 반드시 이뤄져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한평생 확고한 신념으로 연기자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도 시련의 시기가 있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은 쉽게 극복할 수 없었다. 연극, TV, 스크린을 넘나들며 열심히 활동했지만 톱스타가 아니고서야 연기만으로는 먹고살기 빠듯했다. 4개월 정도 드라마 출연이 정지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내에게 등 떠밀려 처음으로 사업이란 걸 해봤다고 한다.
“우리 마누라가 서울 동부이촌동에 만두가게를 열었어요. ‘코끼리 만두’라고 혹시 기억하실라나 모르겠네(웃음). 제가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이들 돌반지를 다 팔아서 가게를 연 거죠. 예상외로 사업이 잘됐어요. 그런데 도저히 저와는 맞지 않더군요. 그래서 결국 마누라한테 ‘이봐, 나는 평생 연기할 사람인데 장사에 모든 정신을 뺏기면 난 못해. 굶어 죽어도 좋으니까 당장 때려치워’ 하고 심한 소리를 하고 그만두게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풍족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알뜰함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우리 집에서는 옷을 세일할 때만 사는데,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어깨가 좀 울어요(웃음). 저는 젊어서도 돈 싸들고 ‘방석집’ ‘요정’ 같은 데 가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늘그막에 인기도 많아지고 CF도 찍고 해서 마누라한테 점수를 톡톡히 따고 있습니다(웃음).”

베토벤 바이러스 (왼쪽) 그대를 사랑합니다 (오른쪽)

연기에 몰두하되 배역에 욕심내지 않기. 그의 연기 철학이자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아보니 조금 손해 보는 듯 사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하는 그는, 양보하면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결과적으로 자기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감당하기 힘든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배역 욕심 많던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 연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며 웃었다.
과거 ‘딴따라’라 손가락질 받으며 모멸감에 몸서리친 날도 많았다는 이순재. 하지만 단 한순간도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기에 지금의 그가 존재할 수 있었다. “우리 때는 연기자가 홍보대사가 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는데, 요즘은 나 같은 사람한테도 요청이 쇄도한다”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에게서 모진 풍랑을 헤치고 비로소 부두에 닻을 내린 호탕한 마도로스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