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여유 있는 삶

배우 감우성, 붓으로 그려낸 와인 & 사람 이야기

글·이혜민 기자 사진·박해윤 기자, 스테이지팩토리 제공

2011. 02. 17

한때는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였고, 영화 ‘왕의 남자’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 감우성. 그가 프랑스의 와인 명장을 찾아가 현지에서 그린 그림과 경험을 담은 책을 펴냈다. 그저 맛집 탐방기일 뿐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책에서는 사람과 와인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배우 감우성, 붓으로 그려낸 와인 & 사람 이야기


사람은 여백이 있어야 인간답다고 한다. 배우 감우성(41)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 듯하다. ‘감우성의 아주 소박한 와인수첩’(스테이지팩토리)에서 쉼을 찾는 인간 감우성이 보인다. 그에게 와인은 ‘깊은 숨을 쉬게 하는 여유를 주는 술’. 두세 잔만 마셔도 취한다는 그가 와인에 애착을 갖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004년경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오가며 영화 ‘알포인트’를 찍을 때 장티푸스, A형 간염, 담낭염에 걸려 고생을 해서 영화를 끝낸 뒤 요양 차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를 왔죠. 그런데 사람들과 어울려 마시던 버릇이 있어선지 술 생각이 나더라고요(웃음). 당시 제 몸 상태로는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데 다행히 와인은 괜찮다는 처방을 받았어요. 그래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 술이 마시면 마실수록 궁금한 게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 저 책 열심히 찾아봤는데 이렇게 해서는 기억에 안 남겠다 싶어서 와인 만드는 사람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죠. 우리 술도 잘 모르면서 외국 것을 찬양해서는 안 되지만 와인도 이제는 우리 먹을거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디어는 감우성의 소속사인 (주)스테이지팩토리 오민호 대표의 제안으로 구체화됐다. 드라마 ‘연애시대’ 제작사 대표와 연기자로 만나 와인으로 인연을 맺은 사이여서 이야기는 쉽게 진행됐고 둘의 마음은 어느새 프랑스 포도밭에 가 있었다. 얼마 후 오 대표는 실제로 와인 만드는 명장을 만나는 여행기를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진지하게 제안했다.
“1천2백여 종이 넘는 와인을 생산하는 ‘와인의 고향’ 보르도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죠. 저는 관심을 갖고 접하면 기억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비록 와인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와인을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만드는지 알겠다 싶었어요. 장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기억에도 남고 와인에 대해 신뢰도 생길 것 같았고요.”
이 작업을 계기로 감우성은 20여 년간 놓았던 붓을 다시 잡았다. 서울대 동양화과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좋아하는 일을 병행해보기로 한 것이다. 샤토(보르도 지방에서 일정 면적이 있는 포도밭이 있는 곳으로 와인을 제조·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와이너리)를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와인을 물감 삼아 화선지에 그림을 그렸다. 결과적으로 눈에 보이는 와인 빛과 화선지에 품어진 와인 빛깔은 달랐지만 “와인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고유의 색을 발현시키는 한지의 정직한 효과를 보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회상한다.

배우 감우성, 붓으로 그려낸 와인 & 사람 이야기

감우성은 샤토에 들를 때마다 한지에 와인 작업을 했다. 오른쪽은 그가 그린 포도 그림.



와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사람 되고 싶어

배우 감우성, 붓으로 그려낸 와인 & 사람 이야기

여행 중 만난 와인 명장 장 클로드 베루에는 감우성의 출판기념회를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대학 때 이종상 선생님께서 천연재료로 동양화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신 일을 떠올리면서 와인이라면 그 색감이 한지에 잘 배어나겠다 싶었는데 계산대로 잘 나와 흐뭇합니다. 이런 시도는 처음이라고 해요. 가능하다면 와인의 연도별, 품종별로 작업해 보고 싶어요. 현지에서 만난 분들이 제 그림에 관심을 보여주셨는데, 이번 작업을 계기로 우리 문화를 알리면 더욱 좋겠죠. 물론 그렇게까지 발전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제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이미 작업하면서 만족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웃음).”
그렇게 감우성은 보르도의 샤토 18곳을 다니며 ‘님도 보고 포도도 따며’ 2009년 5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며 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갔기에 여행 후 환상이 생기기도 했다. 와인 장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품은 덕이다. 감우성은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준 이들에 대해 ‘운명적인 인연’이란 말로 애정을 대신했다.
“만난 분들 중에서 마음에 담아두지 않은 분이 없을 정도예요. 살아가면서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분들이니까요. 심정적으론 아버지처럼 느껴지는 분도 계셨죠. 본적이 경상도라 드러내놓고 애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책에 소개된 분들은 유명세와 관계없이 소중한 인연이란 생각이 듭니다. 한번은 2시간 동안 뵙기로 했다가 이틀 동안 설명해주신 분을 만났는데 이런 정성만 봐도 이곳 와인이 괜히 유명해진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죠.”
감우성은 와인을 만드는 이들의 인생에 주목했다. 이 과정에서 어머니의 뒤를 이어 23세의 나이에 오너가 돼 세 아이를 키워내며 와인을 제조하는 여장부를 만나 그들에게도 나름의 질곡이 있다는 걸 알았고, 1960년대 아무도 러시아에 물건을 판매할 엄두를 못 낼 때 판로를 개척한 와인 명장을 만나 기업가 정신을 배웠다. 하지만 그가 가장 많이 보고 느낀 건 역시 장인 정신. 감우성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보르도 장 클로드 베루에 또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40년간 한길을 걸으며 보르도에서 가장 값비싼 ‘페트뤼스’ 와인을 만들어냈다.
“장 클로드 베루에씨는 당신의 기술로 무언가를 더해서 와인이 달라지기를 추구한 게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지휘자는 자기 캐릭터를 넣지 말고 작곡자가 처음 작곡했을 때 느낌을 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진흙과 메를로 품종 간의 마리아주가 훌륭하게 어우러진 와인을 최대한 고스란히 병에 담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라는 설명에서 잘 익은 와인 향이 나는 것 같았어요.”
주어진 흙과 볕에 감사하면서 와인을 빚어내는 사람들을 만난 덕분일까. 그는 “만드는 사람에 따라 와인의 맛이 달라지듯 배우에 따라 연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면서 배우로서 충실하겠다고 다짐하며 소감을 이어갔다.
“숙성된 와인 향기 속에서 잠자던 순간과 깨어나던 순간을 떠올려 봐요. 그러곤 서로를 깨어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더 익고 우러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바라건대 와인처럼 알고 보면 좋은 사람,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앞으로도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경계를 풀고 다가가는 진심 어린 노력이 생에 늘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