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서 특별한 당선자가 나왔다. 트랜스젠더의 삶과 사랑을 다룬 소설 ‘플라스틱 여인’으로 당선의 영광을 차지한 작가 김비씨(36). 그의 당선이 눈길을 끄는 건, 그 자신이 남성의 몸에 여성의 정체성을 갖고 태어난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지난해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씨름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의 시나리오 자문을 맡으며 세상에 널리 알려졌고, 지난해 9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고백하기도 했다. (‘여성동아’ 2006년 10월호 게재)
김씨는 “그 기사를 읽어보려고 ‘여성동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장편소설 공모에 대해 알게 됐다. 마감이 촉박해 소설을 보내놓고도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이렇게 당선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는 우리 문단에 역량 있는 여성작가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 이 때문에 응모 대상은 여성으로 한정돼 있다. 김씨는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가 배출한 최초의 ‘법적 남성’ 당선자인 셈이다.
“한꺼번에 두 개의 상을 받은 느낌이에요. 제가 ‘여류 작가’가 되다니, 이게 현실일까 싶을 만큼 행복합니다. 지금껏 늘 사회에서 거부당하기만 했는데, 보수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문단에서 먼저 저를 ‘여성’으로 인정해줬다는 사실이 정말 기뻐요.”
당선 소감을 말하는 김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가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어렴풋이 깨달은 건 초등학교 시절. 똑똑하고 리더십이 강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던 한 남자아이를 남몰래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부터였다고 한다.
“사춘기가 되면서 제 안에 있던 여성성이 조금씩 드러났어요. 뭔지 모르게 남자아이 같지 않던 저는 그때부터 세상에서 배척당하기 시작했죠. 친구들은 ‘미스 김’이라고 부르며 놀려대고, ‘진짜 고추가 달렸나 보자’며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아이도 있었어요. 남자처럼 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삶이 힘들어지기만 했죠.”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트랜스젠더를 다룬 TV 프로그램을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호르몬 검사를 통해 태생적으로 여성호르몬이 남성호르몬보다 훨씬 더 많다는 진단도 받았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절 남자라 하더군요. 분명히 남성 염색체를 가지고 있고, 지금껏 남자로 살아왔으니 그냥 그대로 살라는 거예요. 아무 치료도 해줄 수 없다며 돌아가라는 의사 앞에서 울부짖고 사정도 해봤지만 방법이 없었죠.”
그는 약국에서 여성호르몬제를 사다 직접 주사를 놓으며 이제는 본래의 모습으로, ‘여성’으로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통해 자신을 짓누르는 아픔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김씨는 지난 98년 동성애 월간지 ‘버디’에 단편소설 ‘그의 나이 예순넷’을 발표하며 작가로 데뷔했고, 그동안 ‘못생긴 트랜스젠더 김비 이야기’라는 자서전과 첫 장편소설 ‘개년이’, 단편 모음집 ‘나나누나나’ 등을 펴냈다. ‘플라스틱 여인’은 그가 간질환으로 쓰러진 2003년, “이렇게 죽으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하는 절박한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소설이라고 한다.
“그동안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자서전을 제외하고는 저 자신의 얘기를 쓰지 않았어요. 자서전에조차 제 가장 깊은 아픔, 고통스런 체험은 쓰지 못했죠. 제가 느끼기에도 칙칙하고 무거운 얘기뿐이었거든요. 그런데 ‘플라스틱 여인’을 쓸 때는 그런 얘기까지 다 했어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느꼈으니까. 지금은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때로는 손가락질 받을지라도, 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 갔다는 흔적은 남기고 싶었어요.”
“상처받은 사람, 세상의 벽 앞에서 좌절했던 사람의 마음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소설 쓰고 싶어요”
그래서 소설을 쓰는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지난 세월을 되짚다가 혼자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고. 그렇게 써내려간 소설이 원고지 1천 장 분량을 넘길 무렵, 그는 “이 소설은 도저히 세상에 못 내놓겠다”고 생각하고 글쓰기를 멈췄다고 한다. ‘플라스틱 여인’이 완성된 건 지난해 가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소식을 보는 순간 문득 이 작품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3년 동안 묻어놓은 소설을 꺼내 새로 고쳐 썼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여인’은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살아가는 한 트랜스젠더의 자아찾기를 다룬 작품. 주인공은 평범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하려 하지만, 남자 가족이 그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거센 반대에 부딪힌다.
김씨는 “‘플라스틱 여인’에 등장하는 사랑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주인공이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 겪는 사건, 주위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등은 거의 모두 내 실제 경험”이라며 “트랜스젠더가 세상의 편견을 깨고 자아를 찾아나가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로 상을 받게 돼 더 기쁘다”고 말했다.
김씨가 이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 트랜스젠더가 뭔지 성정체성이 뭔지도 모르지만, 자식이 행복하다면 무조건 좋은 거라고 믿는 그의 어머니는 김씨에게 늘 가장 든든한 존재라고 한다. 어머니는 지난 2000년 김씨가 말도 없이 성전환수술을 한 뒤 찾아갔을 때도 “얼굴이 훨씬 좋아졌다. 늘 삐쩍 마르고 어둡기만 하던 네가 이렇게 건강하고 좋아진 걸 보면 뭘 했든 분명히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한 명 꼭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은 사람은 지금 같이 살고 있는 큰 ‘오빠’. 원래 ‘형’이던 그는 김씨가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그를 격려해줬다.
김씨는 자신의 인생에 가족은 아마도 이들뿐일 거라고 말했다. 20대 시절에는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고 싶은 꿈도 꿨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기대는 모두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면 제가 황폐해진 건지도 모르죠. 하지만 헛된 기대로 상처받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좀 더 가능성 있는 꿈,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자신처럼 상처받았던 사람, 세상의 벽 앞에서 좌절했던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쓰는 꿈을 꿀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선배인 박완서 선생처럼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읽는 이에게 큰 감동을 전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현재 영어강사로 일하는 그는 언젠가는 글만 써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전업작가가 돼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다는 바람도 털어놓았다.
“엄마와 둘이 여행 다니고, 사진도 찍으며 도란도란 살고 싶어요. 그러다 더 나이 들면 동네 아이들 모아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가 될래요. 아이들이 ‘할머니, 재미있는 얘기해주세요’ 하며 우리집에 놀러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언젠가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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