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고, 사회적인 지위와 경제적 여유를 마음껏 누려보는 것. 이는 모든 직장인이 한번쯤 꿈꾸는 목표다. 하지만 돈과 명예를 추구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가다보면 정작 중요한 마음의 평화와 가정의 화목은 잊어버린 채 살기 마련이다.
강원도 춘천에서 베이커리 · 북 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Peace of Mind)’를 운영하는 김종헌씨(59)와 그의 부인 이형숙씨(54)는 50대에 진정한 행복을 찾은 사람들이다. 현재 이 카페의 북 마스터 겸 사장인 김종헌씨의 전 직함은 언더웨어 비비안으로 유명한 중견기업 (주)남영 L·F의 최고경영자(CEO)였다. 김씨는 3년 전 억대 연봉의 CEO 자리를 과감히 박차고 나와, 부인과 함께 강원도 홍천의 깊은 산골에 베이커리 · 북 카페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그런 김씨 부부가 지난 8월, 3년간의 홍천 생활을 마감하고 강원도 춘천으로 카페를 옮겨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11월 초, 성공적인 2막 인생을 살아가는 김종헌·이형숙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호반의 도시’ 춘천을 찾았다. 번화한 아파트 단지에 위치한 카페 ‘피스 오브 마인드’는 바로 앞에 석사천이 흐르고 안마산과 대룡산이 가까이에 있어 도심 속 자연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캐주얼 차림의 김종헌씨는 손님들에게 직접 음식을 서빙하고, 카페를 가득 메운 책과 음반에 대해 일일이 설명을 들려줄 만큼 소탈한 모습이었다.
“처음엔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서빙이고 운전이고 못하는 게 없어요. 홍천에서 카페를 열었을 때는 모든 걸 우리 부부가 다 했거든요. 청소, 빨래는 물론 나무를 잘라다 장작 패는 일까지요.”
김종헌씨가 억대 연봉을 받는 CEO 자리를 버리고 ‘사서 고생하는 길’을 택한 이유는 “더 잘 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느끼는 것이 돈과 명예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
“30대에 회사 중역이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그럴수록 더 실적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야 했어요. 야근과 출장이 빈번하고 저녁마다 접대와 회식이 이어지다보니 각종 성인병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홍천에서 3년간 살면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산골에 들어앉으니 폼 잡을 일도 없고, 느린 템포로 살 수 있어 대만족이었어요.”
김씨 부부가 정든 홍천을 떠나 춘천에 새롭게 둥지를 튼 것은 ‘피스 오브 마인드’가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일에는 거의 손님이 없다가 주말에 한꺼번에 몰려오니, 빵을 어느 정도 만들어야 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고. 그래서 김씨는 “사람들이 평일에도 쉽게 찾을 수 있으면서 홍천과 동일한 생활권인 춘천으로 카페를 옮기는 게 어떠냐”는 단골손님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피스 오브 마인드’에 찾아온 사람들은 무엇보다 카페를 가득 메운 1만2천 권의 책을 보고 깜짝 놀란다고 한다. 김종헌씨가 지금의 북카페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중학생 시절부터 갖게 된 유별난 수집벽 때문이다.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삼국지’ 목판본이 그가 가장 먼저 손에 넣은 수집품이었다니 현재 그의 모습이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학창 시절 시작된 그의 취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이어졌다. 그는 회사에서 1천만원을 가불한 뒤 곧장 마산으로 내려가 단원 김홍도의 삽화가 그려진 금속활자본 ‘오륜행실도’를 손에 넣을 정도였다. 고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한다는 10대 미서 중에서도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부모은중경’ 등 무려 3권을 소장하고 있다.
김씨는 “책 수집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인생을 이모작하기 위한 나름의 투자였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은퇴를 결심하고 회사에 사표를 낸 후 오랫동안 꿈꿔오던 북카페를 만들기 위해 미국 뉴욕의 유명 책방 50군데를 모두 둘러보았다고 한다. ‘피스 오브 마인드’의 결정적인 모델이 된 곳은 뉴욕 소호에 위치한 ‘Housing Works Used Book Cafe’였다.
“그곳의 소장품은 모두 기증받은 헌책들이고 직원들은 전부 자원봉사자라고 하더군요. 카페 운영 수익금으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업을 하는 곳이었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반드시 그런 곳을 내 손으로 만들리라 결심했어요.”
김씨 부부가 베이커리 · 북 카페를 여는 데는 이형숙씨의 요리솜씨도 한몫했다. 전업주부였던 이씨는 80년대 초반, 남편을 따라 독일에 살면서 뒤셀도르프의 유명한 빵집 ‘헤라클레스’에서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는 이후 미국의 제빵연구소에서 연수를 받고, 96년엔 아들과 함께 수능시험을 봐서 배화여대 전통조리학과에 들어갔다. 현재 동국대 식품공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한국관광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고. 이렇게 끊임없이 배우다보니 그는 어느덧 떡, 한과 등 전통음식과 서양식 제빵까지 두루 능한 전문가가 됐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김종헌씨가 은퇴를 결정하면서 베이커리 · 북 카페를 열겠다고 결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아내 입장에선 남편이 잘나가는 기업의 CEO 자리를 그만두고 카페를 열겠다고 했을 때 선뜻 승낙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묻자 이형숙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잘 생각했다고 했어요. 한번 사는 인생, 사람이 평생 일만 하다 갈 수는 없잖아요. 남편은 28년간 지나치게 일만 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일은 그만 하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좀 놀아보라고 했죠.”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부부간의 다툼도 거의 사라져
홍천에서 시작한 제 2의 인생은 김종헌·이형숙씨 부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결혼 후 같이 있는 것보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두 사람이 거의 하루 24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것. 그동안 유난히 해외 근무가 많았던 김씨 때문에 별거 아닌 별거를 해야 했던 부부가 지난날을 보상받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엇박자로 살아온 부부가 ‘한박자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을 터.
“꼼꼼하고 완벽주의자인 남편과 달리 저는 덜렁거리고 퍼주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결혼하고는 한동안 성격 차이로 싸울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카페를 시작한 뒤로는 어지간해서는 잘 부딪치지 않아요. 그게 모두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김씨 부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카페에서 행복과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찾길 바란다고 말한다. ‘피스 오브 마인드’가 친구, 애인, 부부, 가족이 함께 와서 인생을 이야기하고 책을 읽고 음악도 즐기며 맛있는 음식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문화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노후 대비란 통장의 잔고가 아닌 꿈과 비전을 먼저 준비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가진 그들의 행보가 행복한 노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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