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왼쪽)과 정유경 웨스틴조선호텔 상무.
신세계에 3세 경영인 시대가 열리고 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막내딸 이명희 신세계 회장(63)의 남편으로, 신세계 2대 주주였던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67)이 지난 9월 초 보유주식 전량을 아들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38)과 딸 정유경 웨스틴조선호텔 상무(34)에게 증여한 것.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84만 주를 증여받은 정 부사장은 지분율 9.32%를 확보해 어머니 이명희 회장(15.33%)의 뒤를 잇는 신세계 2대 주주가 됐고, 정 상무는 63만4천5백71주를 취득해 지분율이 기존 0.66%에서 4.03%로 높아졌다. 이번 증여로 정 부사장과 정 상무가 취득한 주식의 총액은 시가로 약 7천억원. 증여세 세율이 50%인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내야 하는 세금은 3천5백억원에 이른다.
구학서 신세계 사장은 “주식 증여 시 세금 납부시기는 통상 6개월 이후이므로 내년 2월쯤 이 세금을 내게 될 것”이라며 “이후 이 회장의 주식도 계획대로 자녀들에게 증여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이 자신의 주식을 모두 자녀들에게 증여할 경우 신세계 오너 일가가 낼 세금은 1조원 대에 이른다. 지금까지 기록된 최고 액수가 지난 2003년 교보생명 고 신용호 회장의 2세들이 납부한 1천8백30억원인 것과 비교하면 천문학적인 액수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정 부사장 남매는 이에 대한 주위의 관심에 “증여받은 만큼 세금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인데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게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분이 늘었다 해도 어차피 보유하고 있는 것일 뿐, 팔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인 것. 신세계 관계자는 “이회장 부부가 자신들의 주식을 자녀에게 증여하겠다는 계획은 이미 3~4년 전부터 얘기돼온 것으로, 정 명예회장이 이 회장보다 고령이기 때문에 먼저 증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재계 사상 처음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쳐 거액의 세금을 내고 재산을 증여받은 일이 정 부사장 남매가 신세계를 경영하는데 두고두고 큰 힘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은 보수적인 재계에서 여성의 경영 참여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손꼽히는 기업. 특히 신세계의 경우 장남인 정 부사장뿐 아니라 딸인 정 상무도 회사 경영에 적극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남매는 또한 돈독한 우애를 과시하고 있다. 이혼한 탤런트 고현정씨와의 사이에 여덟 살 난 아들과 여섯 살배기 딸을 두고 있는 정 부사장은 지난 7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우리 아이들의 학부모 행사에 참석하는 등 육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각별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정 상무도 지난 2001년 결혼해 다섯 살, 세 살 난 두 딸을 키우고 있는데, 자신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때면 늘 오빠 정 부사장에게도 미리 얘기해 조카들도 함께 교육을 받게 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재계에서 보기 드문 우애를 나누는 배경에는 서로 닮은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 가운데 한 가지는 둘 다 예술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 정 부사장은 음악, 정 상무는 미술 쪽에 조예가 깊다고 한다.
최근 여덟 살배기 아들과 함께 첼로를 배우고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은 정 부사장은 얼마 전부터 1주일에 2~3번씩 음악사(史) 공부도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 열린 클래식 공연은 거의 다 관람하고, ‘맘마미아’ 등 화제를 모은 뮤지컬 공연장도 찾는 등 문화생활에 심취해 있다고. 그는 운동에도 관심이 많아서,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에는 닭가슴살과 야채만 먹으며 몸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 이화여대 미대와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를 졸업한 정 상무는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신세계백화점 매장에 걸린 그림은 거의 정 상무가 직접 고른 것이라고. 역시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한 어머니 이 회장과 함께 각종 전시를 관람하며 작품을 구매하고, 해외 트렌드를 읽기 위해 미국 일본 유럽 등으로 출장을 다니기도 한다고 한다. 신세계백화점과 웨스틴조선호텔의 인테리어 및 디자인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객실 이노베이션과 업그레이드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사상 최고액 증여세 납부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정용진 부사장(왼쪽)과 정유경 상무·문성욱 신세계 I&C 상무 부부.
최근 정 상무는 이러한 미적 감각을 살려 신세계백화점의 마케팅에도 관여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세일 광고에만 주력했던 신세계가 올해 설날을 맞아 ‘My Happy Life’를 테마로 한 이미지 광고를 제작한 건 “백화점은 장기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정 상무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 외에도 정 상무는 지난 3월 신세계가 잡지와 카탈로그를 결합한 ‘매가로그’ ‘S 신세계 스타일’을 창간하는 데도 깊이 관여했다고 한다. 그가 전 세계 명품 잡지 1백여 권을 구해 일일이 검토하고, 맘에 드는 화보는 사무실 벽을 둘러가며 붙여놓을 정도로 디자인, 색감, 구성, 글씨체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만든 이 신세계 멤버십 잡지는 신세계 VIP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이미 패션 리더들에게 화제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감각적이다.
어머니 이 회장 닮아 치밀하고 꼼꼼하며 패션 감각 뛰어난 남매
이들 남매는 둘 다 어머니 이 회장을 닮아 치밀하고 꼼꼼하며, 패션 감각이 뛰어난 점도 닮은꼴이다. 정 부사장은 정장부터 속옷까지 자신이 입는 옷을 직접 구입해 센스있게 맞춰 입는 ‘베스트 드레서’로 정평이 나있고, 정 상무도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지만 세련된 바지정장 차림으로 눈길을 끄는 ‘패션 리더’라고 한다. 특히 정 상무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주)신세계 I·C의 기획담당 상무로 근무하는 남편 문성욱씨(34)의 넥타이 등 옷차림도 즐겨 챙겨준다고.
신세계 관계자는 “정 부사장과 정 상무 부부는 주말마다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만나 외식을 하는데, 평소 ‘몸 만들기’를 위해 음식을 조절하는 정 부사장은 ‘이 때가 일주일에 단 한 번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기회’라고 웃으며 말하더라”고 전했다. 정 부사장은 지난 9월 초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 선발모집에 지원해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달리기 테스트에 참가했을 때도 매제 문 상무와 함께 현장을 방문해 아버지를 응원했다고 한다.
투명한 기업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신세계의 두 남매, 또한 남다른 우애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정용진 부사장, 정유경 상무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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