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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영광의 두얼굴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 기획·최호열 기자 ■ 글·김순희‘자유기고가’ ■ 사진·지재만 홍중식 기자

2005. 02. 11

국·영·수 등 입시과목에 매달리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열중해 서울대와 카이스트에 수시합격한 이준호, 정찬일군. 공부의 중압감 없이 세계올림피아드에서 거둔 좋은 성적으로 대학 진학에 성공한 두 학생과 부모들로부터 남다른 공부법 & 교육법에 대해 들어보았다.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이준호군(18)은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올해 서울대학교 물리학부에 수시합격한 ‘공인된’ 영재다. 하지만 영·유아기 때부터 체계적이고 남다른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려서부터 어떻게 공부를 했느냐”고 묻자 이군이나 그의 부모 모두 “공부는커녕 놀기만 좋아했다”고 말한다.
“어려서 ‘노는 아이’로 불렸어요. 초등학교 때 학원 안 다니는 아이는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다른 아이들은 학원을 순례하느라 바빠 같이 놀 친구가 없었죠. 그때는 함께 놀 친구가 없다는 게 참 아쉬웠어요.”
외아들인 이군을 학원에 보내지 않은 것은 부모의 소신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로 인한 중압감에 휩싸이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 이군의 부모는 공부에 대한 욕심은 ‘뒷전’이었지만 건강과 취미생활을 겸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주는 데는 ‘욕심’을 부렸다고 한다.
“아이의 성격과 적성 등을 고려해 검도를 선택했어요. 남편이 검도를 적극 추천했죠. 학원에 보내면서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고요. 혼자 놀면 심심하잖아요. 준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해요. 전학 간 학교에서 시험을 보지 않았거든요. 학교에서 시험을 전혀 안 보니까 아이가 심적인 부담 없이 놀 수 있었죠.”
이군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일주일에 한번 배달되는 수학학습지를 한 것이 유일한 ‘과외공부’였다고 말한다.
“수학의 기초는 다져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습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아이가 공부에 할애하는 시간이 적어야 하고 연산 위주가 아닌 이해력을 요하는 학습지여야 한다는 것이었죠. 시중에 판매되는 학습지의 특성을 꼼꼼히 살펴보고 선택했어요.”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이군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어머니 양영애씨(45)는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 비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어 슬슬 조바심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의 손을 잡고 학원으로 향했다.
“처음엔 저를 학원에 보낼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곳에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는지를 파악하는 시험을 치렀는데 공부 잘 한다고 소문난 아이들과 비교해 성적이 뒤떨어지지 않으니까 부모님께서 ‘굳이 안 다녀도 되겠다’고 하셨어요. 학원에 다니나 안 다니나 비슷하다면 고생하면서 학원에 다닐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죠.”
이군은 “한때 컴퓨터 게임에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PC방을 제집처럼 드나든 것. 이때 어머니 양씨는 “이제 컴퓨터 게임은 그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타이르기는 했지만 강압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준호가 ‘조금 있으면 내가 알아서 그만두겠다’고 하더군요. 실제 그렇게 얘기한 지 2주일쯤 후에 ‘이제는 컴퓨터 게임이 시시해졌다’면서 PC방 출입을 자제하더라고요. 컴퓨터 게임을 통해 성취욕, 목표 등이 충족되니까 스스로 그만뒀어요. 그때까지 남편과 저는 아이를 지켜볼 뿐이었죠.”
중계중학교 교사인 이군의 아버지 이용주씨(50)는 “초등학교 때 아이에게 마음껏 놀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것이 중·고등학교 때 공부에 흥미를 느끼는 데 밑받침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이군은 공부가 재미없을 땐 컴퓨터나 판타지 소설에 심취했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서울시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할 학교 대표를 뽑는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다른 학생들에게 뒤졌다고 생각하니까 수학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공부를 해야겠다는 동기유발이 된 거죠. 학교 대표 선발전에서 떨어진 이후 수학 단과학원에 다니면서 실력을 다졌어요.”
1년 후. 이군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시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수학경시대회에 학교 대표로 참가할 자격을 얻었지만 이번에는 대회에 참석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려서 마음껏 놀았더니 중·고등학교 때 공부에 욕심 생겨
“준호가 (서울시 수학경시대회에서) 아무 상도 못 타고 떨어진 후 ‘해볼 만하다’면서 ‘재도전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아내와 저는 ‘그렇다면 한번 해봐라’ 하고 독려했죠.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대회에 나가 은상을 받았고 전국대회에서 동상을 받았어요.”
이씨는 “공부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의지와 끈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울과학고에 입학한 이군은 ‘수학’보다 ‘물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지만 수학경시대회 등을 준비하느라 과학 분야를 소홀히 했던 이군은 입학과 동시에 ‘물리학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력질주했다. 이군은 지난해 세계 각국에서 ‘영재’와 ‘천재’소리를 듣는 학생들과 겨룬 국제물리올림피아드 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다들 공부만 하고 사는 줄 아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공부가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재미없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지 등을 읽기도 하고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기도 하죠. 놀고 나면 머리가 가벼워지는데, 그때 다시 공부를 해요. 1년 3백65일 공부에만 매달려 살 수 없잖아요.”
이군은 지난해 ‘삼성 이건희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이 장학금은 삼성이건희장학재단에서 글로벌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공학, 이학, 인문·사회계열의 해외유학 희망 학생 1백 명에게 지급된다.
“이건희 장학금은 학부 과정부터 최대 박사 과정까지 ‘조건 없이’ 학비와 현지 생활비를 지원해줘요. 국가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미국을 기준으로 볼 때 연간 5만 달러(6천만원) 수준의 장학금이 지급돼요. 대학교에 다니면서 해외 유학을 언제 갈지 결정하려고 해요. 부모님께 기대지 않고 부담 없이 유학 갈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요.”
이군의 부모는 인터뷰 말미에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고 다그치면 정말로 공부를 해야 할 때 지치고 힘들어한다”면서 “조기교육보다는 공부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공부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아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말하는 이준호군과 부모님.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정찬일군은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일찍 컴퓨터를 사줄 정도로 자녀교육에 관심을 쏟은 어머니 김정숙씨 덕분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올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수시합격한 정찬일군(18). 어린 시절을 봉천동 산동네 단칸방에서 보낸 정군의 가정 형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지금까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정군의 어머니 김정숙씨(50)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업에 열중해야 했지만 자녀 교육에도 남다르게 신경을 썼다고 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읽는 습관을 지닌 김씨는 무엇보다도 교육 관련 기사를 꼼꼼히 읽었고 정군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자 컴퓨터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해 빠듯한 형편에도 컴퓨터를 사주었다.
컴퓨터는 정군에게 둘도 없이 친한 친구가 됐다. 정군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컴퓨터에 푹 빠져 살았다. 하지만 김씨는 게임에 빠져든 아들에게 “하지 말라”고 제지하지 않았다.
“찬일이가 무슨 게임을 하는지 살펴봤어요. 타자 실력을 향상시키는 게임을 하거나 바둑, 축구, 골프 등 운동 관련 게임을 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왜 그렇게 게임만 하냐고 닦달하는 대신 오히려 컴퓨터 학원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혹시 이 방면에 소질이 있다면 키워주고 싶어서요. 아이가 좋아하고 적성에 맞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죠.”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컴퓨터 학원에 등록한 정군은 워드프로세서와 베이직(BASIC) 등을 배웠다.
“컴퓨터가 재미있었어요. 게임만 하고 놀다가 컴퓨터의 구조 등을 알고 싶어서 하드웨어를 살펴보기도 했죠. 그러다 어느 날 ‘하드’가 날아가버렸어요. 몇 번 A/S를 신청해 고쳤는데 나중에는 자주 고장이 나니까 그것도 귀찮더라고요.”
고장 난 컴퓨터가 정군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줬다. 대개의 아이들은 컴퓨터가 고장 나면 고쳐달라거나 새 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데 반해 정군은 스스로 고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하고, 컴퓨터가 고장 난 원인을 찾는 데 골몰했다.
“컴퓨터가 고장 나니까 너무 심심하더라고요. 그때 베이직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가동이 돼 그걸 이용해 컴퓨터 게임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어요. 제가 만든 게임이 재미없어지면 또다시 만들기를 반복했죠.”
자신이 개발한 컴퓨터 게임을 동생과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한 정군은 초등학교 5학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다. 몇 개월 후에는 구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컴퓨터 정보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돼 더욱 컴퓨터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한국정보올림피아드 대회’가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고 한국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한국정보올림피아드는 국내 IT 영재들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로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이 대회는 각 지역(시·도)에서 선발된 학생들이 주어진 문제해결능력을 겨루는 경시대회와 중·고등학생들이 개발한 창의적인 S/W의 작품성을 평가하는 공모대회로 진행된다.
“중학교 3학년 때 한국정보올림피아드에서 동상을 받았어요. 은상 이상을 받아야 과학고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져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죠. 다행히 동상부터 국제정보올림피아드 대회에 나갈 수 있는 국가대표 ‘후보선수’ 자격이 주어져 이때부터 방학 때마다 2주일씩 아주대학교에서 합숙을 하며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
고1 때 국가대표 선발시험에 응시한 정군은 보기 좋게 낙방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이듬해인 2003년 5월 국가대표에 선정, 같은 해 9월 미국에서 열린 제15회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 참가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정군은 은상을 수상했다. 당시 4명의 한국 대표 가운데 2명이 금상, 정군을 비롯한 2명이 은메달을 받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모두 과학고 학생들이었다.

자신의 적성과 취미 살려 서울대와 카이스트 수시 합격한 이준호·정찬일

2003년 국제정보올림피아드에서 은상을 수상할 때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찬일군.


“가정 형편상 노트북 컴퓨터를 살 돈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노트북이 필요하긴 한데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가 없었죠. 그런데 2003년에 열린 아주대학교 정보대회 최우수상 부상이 노트북 컴퓨터였어요. 상품에 눈이 어두워서 그 대회에 참가했죠. 노트북이요? 지금 제 책상 위에 있어요(웃음).”
정군은 현재 ‘대통령 과학 장학금’을 신청해놓은 상태다. 대통령 장학금은 한국과학재단이 국내 이공계 대학에 진학한 1백 명에게 4년간 매년 1천만원씩의 연구 장려금을 지급하고, 해외 우수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는 20명에게는 연간 학비와 체재비 등 실소요 경비를 지원하는 장학제도다.
“현재 서류 심사에서 통과된 상태인데, 장학생 선발 결과는 1월 말에 발표해요. 이 장학금은 가정 형편과 상관없이 과학도로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지, 향후 기초 과학 발전에 기여할 것인지 등이 심사기준이라고 해요. 꼭 됐으면 좋겠어요.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거든요.”
아들의 말을 듣고 있던 김씨가 눈물을 내비쳤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자식 교육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옛날 어른들이 논 팔고 밭 팔아서 자식 교육시켰잖아요. 부모가 자식의 잠재된 재능을 찾아주고 그것을 계발하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공부는 ‘때’가 있어요. 가난하다고 해서 조금 돈 번 후에 자식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짓이에요. 요즘에는 공부만 잘 하면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잖아요.”
김씨가 “고액과외는커녕 중·고등학교 때 단과학원에도 맘 놓고 못 다닐 정도로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찬일이가 불평 한번 없이 올곧게 자라준 것이 고맙다”고 하자 정군이 어머니를 슬며시 끌어안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고 해서 친구들 앞에서 기죽어 본 적 없어요. 오히려 돈 들지 않고 공부했다는 자긍심을 갖고 살아요.”
정군과 김씨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부모와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치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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