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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behind atelier

투박하지만 따뜻한 아날로그의 힘, 임지민 작가

이진수 기자

2022. 11. 23

기억에서 비롯한 따뜻한 필치로 사람 손, 나뭇잎, 꽃 등 자연물을 그리는 임지민 작가. 그의 그림이 따뜻한 이유는 작가 내면의 소리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임 작가는 목탄과 유화 물감을 사용해 사람 손, 나뭇잎, 꽃 같은 자연물을 그리고 자신의 내면 이야기를 표현한다. 그의 그림에선 유행과 트렌드에 흔들리지 않는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난다.

임 작가는 지난해 월간 ‘퍼블릭아트’ 유망 작가 발굴 · 지원 프로그램 ‘뉴히어로’에 선정됐다. 당시 한 평론가가 그에게 “이 작업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의 큰 강점이야”라며 그의 성실성을 높게 샀다. 임 작가는 지난해 3월 화랑미술제 신진작가 특별전 ‘ZOOM-IN’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으며 촉망받는 신진 작가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임 작가는 건국대와 건국대 대학원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OCI 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를 거쳐 현재 경기도 양주의 가나 장흥 아틀리에에서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학교 졸업 후 전업 작가로 달려온 11년, 요즘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나는 여전히 신진 작가일까?’다. 임 작가는 “이제는 신진이라는 수식어를 벗고 선배 작가로 길을 다져가야 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레지던시 입주 작가로 사는 법

작가 생활은 곧 현실이다. 이름 석 자를 알리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그림을 계속 그리려면 우선 작업실이 있어야 하고, 재료 비용 등을 충당할 수 있는 금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을 지지해주는 응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레지던시 입주 작가’ 타이틀은 직장인에게 대기업 인턴 경력과 같다. 머물렀던 곳의 명성이 곧 작가의 스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레지던시 경력을 발판 삼아 유명 갤러리의 소속 작가가 되기도 한다. 현재 임 작가가 소속된 가나 장흥 아틀리에는 국내 대표 현대미술 갤러리 가나아트에서 운영하고 있다.



작업실 전경

작업실 전경

입주 작가 경험은 세 번째인데, 장흥에 오신 계기는 뭔가요.

지인 작가가 “작업실 자리가 하나 났는데 추천해줄 테니 지원해보라”고 해서 오게 됐어요. 처음에는 큰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곳이고, 운전면허도 없는데 서울에서 다닐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제가 좀 소극적인 성격이거든요. 추천해주신 분이 “해보고 아니면 나오면 되지”라고 해서 그 덕에 용기 내 입주하게 됐어요. 결정하자마자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해서 면허부터 땄어요(웃음).

규모가 큰 곳일수록 작업 환경이 좋지 않나요.

처음에는 전에 있던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와 성격이 달라서 걱정을 좀 했어요. 청주는 청주시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고, 가나 장흥 아틀리에는 갤러리가 직접 운영하는 곳이다 보니 운영 방식이 조금 다르거든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린 개인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열린 개인전.

지자체가 운영하는 레지던시는 어떤가요.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같은 경우에는 대부분을 청주시에서 지원해줘서 제가 내는 건 전기세 정도였어요. 수면실은 물론 화장실 등이 다 갖춰진 곳이었죠.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도 있고, 작가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해서 레지던시를 나올 때 전시도 해야 해요. 레지던시마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곳이 벌써 12번째 작업실이라고 들었어요.

서울 성내동, 대학원 근처, 재건축 전 아파트 1·2, 그다음에 상일동 주택 작업실도 친구랑 썼었고···. 청주 갔다가 분당 태평동으로, 그리고 이곳으로 왔어요. 역마살이 있는지 계속 옮겨 다녔어요(웃음). 제가 매번 이용하는 탑차 사장님이 계신데, 이사한다고 연락하면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세요. 짐이 많은 걸 아시거든요. 그래도 워낙 베테랑이시라 계속 연락드려요. 이번에 장흥으로 이사 올 때도 “남자 셋은 데려오라”고 당부하시더라고요(웃음).

오다 보니 주변에 아무것도 없던데요.

중고로 소형차 모닝을 샀는데, 라이트가 시원치 않아요. 안 그래도 초보라 밤 운전이 무섭더라고요. 요즘도 여전히 무섭긴 하지만 처음보다는 잘 다녀요. 작업할 양이 많아서 밤에까지 자주 있어요.

“조금 틀려도 내 방식대로 투박하게”

송여사의 자, oil on canvas, 90.9x72.7cm, 2010

송여사의 자, oil on canvas, 90.9x72.7cm, 2010

임 작가의 개인전 주제는 ‘독백’ ‘흔적’ 등 내면에 짊어지고 있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림에는 얼굴과 손, 주변에서 보기 쉬운 자연물 등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2010년 대학 졸업 즈음 미술 작가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아픔을 겪었다. 감정을 어떻게 추스를지 몰라 방황하면서 자연스럽게 내면을 들여다보게 됐고,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오빠의 어릴 적 사진을 따라 그리면서 작업 방향의 전환점을 맞았다. 가족들의 옛날 사진을 보며 자신이 가진 ‘기억’을 바탕으로 인물을 그리기 시작한 것.

학부 시절에는 어떤 그림을 그렸나요.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건물 공간을 그리고 구조를 해체하는 추상적인 그림이었죠. 인물을 그려본 적이 없었어요.

지금은 정물을 그리는데요.

더 이상 인물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의 부재로 작업을 시작했지만, 누군가를 애도하는 방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잖아요. 표현 방식에 변화가 필요했어요. 그렇게 인물의 손이나 얼굴 아랫부분과 같이 특정 부위를 확대해서 그리기 시작했죠.

손 작업은 주름도 많아서 까다로울 것 같아요.

어렵죠. 사실 저는 인물도 잘 못 그렸어요. 제 인물 작업을 좋아해주셨던 교수님 말씀이 “네가 참 인물을 못 그리는데 그게 특징이다” 하시더라고요(웃음). 잘 그릴 필요가 없는 작업인데 굳이 남과 비교해서 그에 맞출 필요가 없다고요. 비율이 조금 틀려도 제 방식대로 투박하게 그려야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것 같다며 힘을 실어주셨어요. 어색하고 낯선 제 기분이 다 나오는 것 같다면서요. 손도 마찬가지로 그릴 때마다 항상 어려워요. 이 구조를 제대로 살려야 하는데 잘 못 해요. 그렇다고 신체 구조를 연구할 필요는 없으니까 제 느낌대로 하고 있죠. 그래도 계속 쌓이니 어느덧 그게 제 강점이 되더라고요.

손을 그린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땐 키가 작으니까, 제 눈높이에서는 늘 어른들의 손이 보였어요. 손에는 그 사람의 감정이 다 나타나 있어요. 불안할 때도 사람들이 시선을 내려 손을 보잖아요. 손은 숨기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그 시선의 의미가 작업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아요.

재료로 목탄을 사용하고 계신데요.

붓 사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잘 안 그려져서 쓰기 싫어요. ‘내 손을 직접 그려야겠다’ 해서 목탄과 오일 파스텔을 사용했어요. 손으로 문질러서 작업할 수 있는 재료로요. 그 작업을 한참 하다 보니 이제는 유화 색을 다시 쓰고 싶어져요.

섬세하게 그려야 하는 작업인데 목탄이 잘 번지지 않나요.

‘픽서티브’라고 목탄을 정착시키는 스프레이를 사용해요. 고정이 잘 안 될 때도 많아서 뿌리고, 또 뿌리죠. 사용하는 종이에 따라서도 달라요. 수채화 종이와 목탄지 2개를 사용하는데 둘이 스타일이 달라요. 수채화는 조금 더 단단하고, 목탄지는 굵게 표현된다고 할까요. 그리고 싶은 장면마다 사용하고 싶은 종이가 달라서 둘 다 쓰고 있어요.

유화 작업은 어떻게 하세요.

1차 드로잉을 많이 해요. 본 작업 들어가기 전에 캔버스를 러프하게 잘라서 거기에 이것저것 생각나는 것들이나 이미지를 참고해서 막 그려봐요. 그다음에 정식으로 캔버스에 다시 옮겨 그리는 편이에요. 예전보다 캔버스를 대하기가 힘들더라고요. 망칠까 봐요. 어느 순간 캔버스에 그리려고 하면 작업이 꼭 마음에 안 들게 나와요. 천에 막 할 때가 더 마음에 들고요(웃음).

아버님이 화실도 운영하시고, 미술 작가셨다고요.

“대학 졸업하면 아빠 화실에서 같이 작업하면 되겠다”고 얘기하곤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워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친한 선배 작가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빠가 사용하던 색감이 제 그림에서 자주 보인다고요. 아빠는 옐로 톤처럼 따뜻한 계열을 주로 쓰셨는데, 제가 사용하는 물감을 봐도 옐로 톤이 많긴 해요. 저는 인물이나 손, 자연물을 주로 그리고 아빠는 풍경화를 그려서 소재가 아예 다른데도 그렇게 느껴지나 봐요. 아빠는 편안하지만 묘사가 치밀하고, 힘이 강한 그림체거든요. 투박한 표현 방식도 닮지 않았나 싶어요.

작가들도 어려운 신진의 경계

임웅(임지민 작가 父), 빛과 그림자, oil on canvas, 116.8x91.0(50F), 2003

임웅(임지민 작가 父), 빛과 그림자, oil on canvas, 116.8x91.0(50F), 2003

‘신진’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회나 분야에 새로 나섬. 또는 그런 사람’이다. 보통은 활동 경력과 연차에 따라 신진, 중견, 원로 작가로 나뉘는데, 1980~90년대생 작가들을 두고 신진 작가라 부르기도 해 그 경계가 모호하다. 11년 차 작가에게 신진이란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조심스럽다.

아직 신진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애매해요. 저랑 주변 동료 작가들도 공모에 지원할 때마다 ‘우리가 신진인가?’ 하는 고민에 빠져요. 이번에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 통합공모에서도 활동 경력과 지원 목적에 따라 지원 트랙이 A, B, C로 나뉘었어요. A는 신진, C가 중견이라고 하면 저는 B일 텐데 A에 넣어야 하나, B에 넣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죠. 신진으로 가자니 양심이 없는 것 같은데 B로 가자니 아주 안정된 작가는 아닌 듯하고요. 선배 작가님들께 의논드리니 “연차도 있고, 레지던시 경력이나 나이도 있으니 B를 써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어요. 그런데 문제는 B 트랙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는 거예요.

경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작가들도 어려워해요. 40~50대에 신진으로 불리는 작가분도 많아요. 40대에 활동을 시작했으면 신진이라 할 수 있잖아요. 이제껏 해온 경력을 봐야 하니까요. 공모 트랙에도 내가 왜 B에 해당하는 작가인지, 지금까지 뭘 했고 어떤 연구 과정을 거쳤다는 내용을 다 적어야 하더라고요. 레지던시 이력이 어느 정도일 때 신진이라는 말을 안 써도 되는 건지, 대학원생까지가 신진 작가인지 잘 모르겠어요. 활동 경력과 해온 작업의 결 등을 봐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작은 빛, charcoal on paper, 20x20cm(each)_21 pieces, 2020

작은 빛, charcoal on paper, 20x20cm(each)_21 pieces, 2020

지난해부터 작품 수입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작년 화랑미술제 때 작업했던 정방(25×25cm) 사이즈 반응이 좋았어요. 작은 그림들을 모아 크게 만드는 시리즈 작업이라 168점 정도를 그렸죠. 그 덕분에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도 연락을 주셔서 개인전을 열게 됐고, 컬렉터분들이 조금씩 제 그림을 찾아주셨어요.

처음 그림 가격은 작가가 직접 책정하나요.

네. 금액대를 정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인물화 초반 시절에는 학교 교수님께 자문을 구하면 “학생 때는 호당 5만 원으로 해라” 그러셨거든요. 주위 동료 작가들한테 “너는 대략 얼마야?” 하고 묻기도 했죠. 저는 작품 금액이 낮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비슷한 경력이나 또래 작가들을 보면 저보다 훨씬 높은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다고 가격을 올리는 건 조심스러워요. 기존의 제 작품을 좋아해주시는 컬렉터층이 있는데 ‘가격을 높이면 그분들이 구입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소심한 성격답네요(웃음).

작가들은 경제적으로 항상 불안해요. 좋은 작업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 내년에 어떻게 해서 먹고살지도 걱정. 내년 2월 개인전 준비를 한창 하고 있는데, 예산이 많이 들게 생겨서 이것도 걱정이에요. 영상이 주인공이라 빔을 사용해야 하는데, 빔 설치비와 대여료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플립 북도 제작해서 보여드리고 싶은데, 이 예산도 크네요. 새로운 걸 시도하려다 보니 새해부터 돈이 많이 들게 생겼어요. 일단 개인전을 무사히 마치고, 내년에도 아무 탈 없이 작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임지민작가 #가나장흥아틀리에 #여성동아

이진수 기자의 비하인드 아틀리에
美에 사는 기자.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공간이 좋아서 갤러리에 간다. 참을성이 없지만 근성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 선생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세계 곳곳 아틀리에 탐험을 계속할 참이다.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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