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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route1

디자이너 루비나, 그리고 조카 박자현

해외 브랜드에 맞서 루트원(ROUTE1)으로 새로운 길 찾아가는

editor 김지은

2017. 03. 02

오전 10시 30분. 기분 좋은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약속했던 시각에서 1분의 오차도 없이 매장 문을 열고 들어선 그들 덕분이다. 허둥대거나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시간을 다른 사람과 나눠 쓰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들. 오롯이 약속한 상대에게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공들여 준비한 느낌이 들었다. 커피에 문외한인 사람도 반할  만큼 풍미 좋은 커피를 내왔고 곁에는 물 한 잔이 따라 나왔다. ‘대화를 하게 되면 목이 마를 것이니 물이 필요할 것’이라는, 소소한 배려에 마음이 솔깃해졌다.  



옷을 연인 삼아

“저는 디자이너가 정말 매력 있는 직업이라 생각해요. 진태옥 선생님은 올해 83세이신데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계시잖아요. 건강만 허락한다면 평생을 해나갈 수 있는 일인 데다 매번 새로운 색감,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는 것으로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어요. 일을 하는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거죠.”

디자이너로 데뷔하기 전, 1970년대 루비나(72  본명 박상숙)는 국내 정상의 모델로 이름을 날렸다. 몇 장의 앨범이 인기를 모으며 가수로서의 재능도 인정받았다. ‘한마디만 말해주’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눈이 내리네’ 등이 그의 대표곡이다. 영화 〈여자 형사 마리〉에서는 서구적인 마스크를 지닌 매력적인 여형사로 열연을 펼쳐 화제가 됐다. 모델로, 가수로, 배우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넘치도록 사랑을 받던 그가 돌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선언했을 때 세간에는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도 늘 불안했어요.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는 건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거잖아요. 눈앞에 보이는 인기에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제 자신이 잘 알았어요. 변화가 필요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패션 디자인이었어요. 저는 제 인생의 전부라 해도 좋을 만큼 옷을 사랑하거든요.”



모델 시절 루비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패션쇼 무대에 섰고, 그때마다 20여 벌의 옷을 혼자 소화했다. 당시로서는 그처럼 늘씬한 체형에 서구적 마스크를 지닌 모델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기에 너도나도 루비나만 찾았다. 지금처럼 매니저가 따로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진 상황도 아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백, 수천 벌의 옷이 집 안 가득 산처럼 쌓였다. 그 옷들을 일일이 입어보고 자신에게 맞는 형태로 소화해내는 것도 모두 모델의 몫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루를 48시간처럼 열심히 살아온 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어요. 모델 일을 하던 시절에도 틈이 날 때마다 청량리로 가서 구두나 가방 같은 것들을 디자인해서 맞추곤 했죠. 혼자 니트 브러싱을 하기도 하고 옷에 비즈를 다느라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어요. 가끔 제가 입을 무대 의상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제가 살던 아파트 위층에 세를 얻어 작은 작업실을 꾸몄죠. 그곳에서 가내수공업 형태로 옷을 만들었는데 이신우 선생님께서 미싱사와 재단하는 분을 소개해주셨어요. 물론 잘되지는 못했어요. 패션쇼 나가랴, 촬영 다니랴, 노래하랴 바쁘다 보니 경영까지 잘해내지는 못하겠더라고요. 결국 6개월 만에 문을 닫았죠.”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은 큰 자산이 되었다. 모든 일을 혼자 다 잘해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1980년 본격적으로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땐 하던 일을 과감히 그만두는 결단력도 생기게 되었다.

‘루트원’은 루비나가 만든 두 번째 세컨드 라인이다. 과거 ‘루비나2’를 론칭한 적이 있었지만 조력자를 만나지 못한 탓에 곧 접어야 했다.

“루비나도 잘되던 시기였는데 루비나2까지 반응이 좋으니 오히려 감당하기 힘들어지더라고요. 혼자서 두 브랜드를 이끌어나가려 한 것부터가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거죠. 디자인이 혼재되기도 하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그 뒤로도 세컨드 라인에 대한 욕심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더 큰 각오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제 뜻을 믿고 오래 함께해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죠. 숱한 제자들을 길렀지만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나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고, 그들을 응원해줘야 했으니까요.”

10년을 입어도 늘 감각적이고 질리지 않는 옷, 처음 입어도 어색하지 않고 오랫동안 함께해온 듯 편안한 옷. 루비나와 루트원의 공통점은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트렌디하다는 것이다. 이는 디자이너 루비나가 추구하는 패션의 모토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루비나가 멋스러운 느낌이 강한 이지적인 스타일인 반면 루트원은 스트리트적인 요소를 가미해 젊은 감각을 강조하고 가격대도 부담스럽지 않게 조정했다는 것이다.

루트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그와 16년을 함께 일해온 박자현(38) 실장이 맡았다. 그가 루비나의 조카라는 건 업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만큼 조심스러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굳이 혈연관계에 얽매여 편견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보니 요즘 젊은 세대들은 감성이 정말 풍부해요. 하지만 그만큼 근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흐트러지지 않고 꾸준히 자기 길을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인데, 박 실장은 그런 점에서 정말 잘해왔어요.”

수많은 2세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론칭했다가 좌절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 최근 수입 브랜드의 범람으로 유통시장에서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들을 외면하는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루비나는 기존 디자이너 부티크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는 정말 잘 만든 젊은 브랜드로 승부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박자현 실장만 한 적격자가 없을 것이란 확신도 있었다.

“디자이너가 되어야지, 결심을 한 적은 없었어요. 그냥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거든요. 어릴 때부터 고모가 디자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액세서리 만드는 걸 도왔어요. 조금 더 자라서는 컬렉션 일을 돕기도 하고 그러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죠. 다른 일을 하는 제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달까요.”

한눈에 보아도 손끝 야무지고 똑 부러질 것 같은 박자현 실장은 스스로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했다. 심각한 길치에 돈 계산 같은 것은 할 줄도 모르고, 경영에는 여전히 젬병이다.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옷 만드는 일 하나뿐인데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되었으니 일생에 이보다 큰 행운은 없다 싶다. 그래서 브랜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나면 경영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모든 것을 잘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가 잘하는 일을 나눠서 하는 것. 무릇 ‘전문가’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루비나 옷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 중 하나는 입체 패턴이다. 옷걸이에 걸어두었을 때는 어딘지 둥그스름해 보이던 부분도 입으면 정말 맞춘 것처럼 정확한 핏을 드러내는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졌다. 루트원의 옷들도 마찬가지다. 컬러와 디자인에서 1차적으로 드러나는 트렌디함을 뛰어넘는 진가는 입었을 때 발현된다.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과 기본기에 충실한 것이 상반될 수는 없어요. 이는 루트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지켜졌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여름 어깨가 한참 뒤로 젖혀진 옷들이 유행을 했어요. 하지만 여성들의 신체 구조상 박시한 느낌을 암홀 라인에서 잡아주지 않으면 가슴 때문에 옷이 앞으로 뻗칠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너도나도 그런 디자인을 내놓았죠. 루트원은 그런 것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요즘엔 국내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 중에도 해외에서 공부를 많이 하고 온 친구들이 꽤 있지만 의외로 패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패턴뿐만 아니라 옷의 실루엣이나 피팅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놓치는 경우도 많고요. 하지만 무언가를 덕지덕지 붙이고, 거기에만 눈이 가게끔 하는 옷들은 겉보기에만 화려한 가짜입니다.”

기본기에 대한 루비나의 생각은 단호했다. 정치도, 경제도, 뉴스를 볼 때마다 나오는 세상 이야기의 많은 부분들이 가짜로 채워지다 보니 이제는 디자인계에도 그런 것들이 진짜인 양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트렌드를 읽을 때 무엇을 중심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박자현 실장에게도 중요한 화두다.

“결론은 언제나 선생님 생각이 맞다는 거예요. 100% 정확하신 분이거든요. 하다못해 10여 년 전에 보았던 원단이나 자재 같은 것들도 ‘그거 예전에 쓰던 게 남아 있어’ 하시거든요. 그런데 설마, 하면서 뒤져보면 정말로 어디에선가 꼭 발견되더라고요. 그 많은 소재와 패턴을 어떻게 다 기억하시는지 놀라울 정도죠. 선생님의 제자들도 벽에 부딪힐 때마다 ‘이럴 때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한대요. 그러면 답이 곧 나오곤 하더라고요.”

박 실장은 디자이너 루비나를 ‘언제나 옳은 사람’이라 했다. 이제 ‘고모’보단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자연스러워진 데는 단순히 직장 상사 혹은 옷을 디자인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수해준 사람에 대한 존경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가 루비나에게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성실과 근면,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패션은 하루가 다르게, 빨리 변해가지만 변화를 좇아가는 것만이 답은 아니라 생각해요. 빠르게 바뀌는 건 그만큼 빠르게 없어지니까요. 옷을 젊은 감각으로 풀어내는 것은 제 몫이지만 그 뿌리는 선생님이 갖고 계시니까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을 거라 믿어요.”



패션은 언제나 ing

루트원의 이번 시즌 테마는 ‘Become the Beat of the City’. 젊은 여성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 옷들을 선보이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잔잔한 플라워 프린트 패턴에 프릴을 달아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옷과 데님에 스트리트적인 요소를 가미한 스타일이 독특하게 믹스된다. 최근의 경향인 자연주의를 레트로풍 혹은 모던풍으로 재해석한 아이템들도 있다. 체크무늬에 나뭇잎 모양을 업 프린트한다거나 심플한 직선 배열에 부드러운 자연의 색감을 더하는 식이다.

루트원 론칭을 앞두고 박자현 실장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요즘 패션계의 유통 구조였다.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안정적인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좀 더 다각적이고 전문적인 유통망 확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루트원은 바이어들의 반응이 좋아서 백화점과 온라인 몰은 물론 해외 쇼룸과 온라인 사이트 준비도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017년 디자이너 루비나의 계획은 딱 하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패션은 언제나 ing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읽어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루트원이 잘될까, 힘들어지면 어쩌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일찌감치 터득한 것이 있다면, 힘든 순간이 올 때마다 불안해하고 걱정할 시간에 돌파구를 찾는 게 낫다는 거예요. 일은 일로 풀어야 하니까, 최선을 다해 부딪쳐보는 거죠.”

요즘 루트원은 4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리는 컬렉션 준비에 한창이다. 지난 37년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저력을 과시해온 루비나와 16년간 누구보다 가까이서 그녀의 디자인 철학을 공유해온 박자현 실장. 이들 두 사람의 멋진 콜래보레이션을 기대해본다.

사진 이상윤
디자인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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