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LTURE

BOOK | 내 안의 유령이 말을 건다

jainy@donga.com

2024. 03. 08

마나즈루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류리수 옮김, 은행나무, 1만6800원

사랑하는 사람이 증발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 빈 공간에는 어떤 파도가 밀려올까. 케이의 남편 레이는 12년 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케이는 모친과 딸 모모와 함께 도쿄에 살며 세이지라는 남자와 연애한다. 이제 남편과 함께 지낸 시간보다 세이지와의 만남이 길어졌지만 케이는 어쩔 수 없이 레이를 생각한다. 레이가 실종되기 얼마 전 일기장에 마나즈루(真鶴)라는 지명을 써뒀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기차로 2시간 떨어진 바닷가 마을을 이끌리듯 방문한다.

한국에 많은 소설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작가 가와카미 히로미는 일본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다. 2019년, 예술 분야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 수여하는 문화 훈장을 받았다. 1958년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1996년 ‘뱀을 밟다’로 일본 현대문학의 지표로 불리는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수상 당시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닌 근원적 심리와 여성 내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라는 극적 세계를 표현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마나즈루’ 역시 케이라는 여성의 내면에 집중한다. 어떤 소설에 대한 설명을 ‘주인공의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일’로 대신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작가는 장치를 하나 더 얹어뒀다. “걷고 있는데 따라오는 자가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 말하는 ‘따라오는 자’는 유령이다. 성별도 바뀌고, 여러 명이 되기도 하는 유령은 케이에게 자꾸 말을 건넨다. 케이와 유령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유령은 다름 아닌 케이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기억이기도 하고 예감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일 때도 있고 모르는 사람일 때도 있다. 독자에게도 독자 안의 유령이 말을 걸어온다.

그 위에 케이의 일상의 포개진다. 케이는 사라진 남편을 생각하면서도 다시마와 멸치를 간장으로 조리고, 새 계절이 오기 전에 옷장을 정리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죽지 않으면 생활은 계속된다는 듯. 케이의 일상과 상념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은 작가의 문체다. 가와카미는 케이를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그의 무의식에서 벌어지는 일을 곱게 채로 걸러 활자로 새겨두었다. 가령 딸 모모를 보며 케이가 소중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대목이다.



“남자를, 남편을 원치 않았다. 모모가 충분히 뜨거웠기 때문에. 젖을 주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남편을 원하지 않았다. 남편의 경우 소중하지는 않았다. 소중하지 않지만 머리로는 남편을 사랑했다. 밤이 되어 몸 표면으로만 쾌활하게 맞이했다. 머리와 몸이 따로따로인가 생각했지만 사실은 몸뿐이었다. 머리는 몸의 일부였다.”

다시 아쿠타가와상 수상 당시 평으로 돌아가서, ‘인류 보편의 근원적 심리’를 묘사하는 스킬 역시 이름을 남긴 작가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자질이다. ‘마나즈루’가 이를 이룩한 소설인 이유는 솔직함이다. 작가는 위 문장에서처럼 케이라는 인물을 모조리 내어놓는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생각하는 글이란 무엇일까. 지난해 9월 ‘아사히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뭔가를 숨기려고 하면 한 줄도 쓸 수 없다. 자신의 나쁘거나 틀린 부분도, 부끄러움도 모두 나와버리는 것이 소설이다.”


#마나즈루 #가와카미히로미 #여성동아

사진제공 은행나무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