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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여성동아 표지화로 돌아보는 1970~80년대

안현배 예술사학자

2023. 10. 09

이숙자 화백이 그린 1979년 1월호 표지화

이숙자 화백이 그린 1979년 1월호 표지화

프랑스에서 19세기 후반의 역사를 공부하던 시절, 지도교수는 ‘시간의 역설’을 이야기하면서 17세기나 18세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시대가 19세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객관적인 검증이 끝난 자료와 역사적인 평가 그리고 명료한 관계 설명 등이 가까운 시대일수록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실제로 책으로 출판됐거나 문서고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상대적으로 19세기보다 18세기가 월등히 많았던 걸 보고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동아’ 표지화를 통해 한국 근현대의 서양화, 서양화가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본 칼럼의 이번 주제는 1970~80년대의 표지화들이다. 김숙진, 김태, 김형근, 장완, 이숙자 작가의 작품으로 채워진 이 시기의 표지화들이 그려낸 여자 주인공들을 보노라면 낯선 느낌을 받는다. 모두 1930년대를 전후해 태어나 1970년대 들어 원숙한 전성기를 보낸 작가들이라는 공통점 그리고 일본 등 외국에서 공부한 경험 없이도 한국에서 성공한 첫 세대라는 특징을 지닌다.

하지만 그런 분석 이전에 화가들이 활동했던 시간이 벌써 50여 년 전이라는 게 새삼스럽다. 표지화 속 인물들의 독특한 패션과 살아 있는 색감에서 현재와 거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흑백사진 속의 기록일 것만 같은 그 시기의 일상은 ‘여성동아’ 표지에서 화려하게 살아 있다. 사실 1970~80년대는 독재와 군부 쿠데타의 어두운 압박이 지배하는 시대였고, 이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날이 서 있던 치열한 시간이었다. 그 대결의 국면에서도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전하는 예술의 서사가 이어졌다는 게 어쩌면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럽다. 그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 시대에 대한 정립과 이해가 부족해서 일지도 모른다. 마치 19세기가 비어 있단 느낌을 받는 프랑스처럼.

이숙자와 김숙진

김숙진 화백이 그린 1980년 9월호 표지화 .

김숙진 화백이 그린 1980년 9월호 표지화 .

이 시대의 화가들이 남긴 표지화 속에서 5명의 화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우선 이숙자 화가가 딱 한 번 참여한 표지화(1979년 1월호)에서는 그의 스승인 천경자 작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큰 눈이 인상적이면서 단순화된 표정과 대비되는 파란 색깔의 강한 표현은 천경자 미인도의 여인들과 닮은 부분이 많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이숙자의 그림은 푸른 보리밭을 기점으로 색채에 관한 깊은 연구, 추상과 구상을 크게 나누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게 구성된 풍경의 색다른 표현이 눈에 띈다. 이는 곧 스승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음을 뜻한다. 사실 천경자 같은 큰 스승에게서 벗어나는 건 모든 제자들의 숙제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이숙자 화가의 표지화는 어쩌면 천경자 작가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귀한 예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화가 김숙진의 표지화는 어땠을까. 김 화백은 이숙자 화백과 활동 시기가 비슷하고 둘 다 국내파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은 당시 한국에서 널리 퍼졌던 추상예술 대신 구상예술을 고집했다는 점도 닮았다.

1931년에 태어나 1956년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하고 국전을 통해 등단한 후, 꾸준한 작품 활동은 물론 국전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던 김숙진 화백은 본인의 구상미술에 관한 주장이 확고했다. 김숙진 화백은 자연을 묘사할 때 ‘사실과 사실이 아닌 관념적인 것’으로 그 방향을 구분했다. 그는 미술 표현에 있어서 사실이라는 것은 자연 형태를 그대로 긍정하며 재현하는 것이고, 추상이라는 것은 대상의 순수한 본질을 찾아 기하학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은 다시 2가지로 갈라진다고 주장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사실과 작가의 안목이 들어가는 구상으로 나뉜다. 둘 다 자연의 외형을 아름다움 그대로 전달하는 태도겠지만 구상은 거기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숙진 화백의 이런 구분은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이숙자 화백(왼쪽)과 김숙진 화백.

이숙자 화백(왼쪽)과 김숙진 화백.

‘여성동아’ 표지화에서도 김숙진 화백의 구상에 대한 접근법은 유효하다. 인물의 피부색에 대해서도 세밀하고 힘 있게 표현하는 그는, 형태를 붕괴시키는 앵포르멜(informel)류의 추상화 대세에는 반대하면서 현실(외형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을 소화해내는 자신만의 접근법을 보여준다. 또한 이는 당시 한국의 국전이 제시하는 틀로도 작용했다.

7080을 기억하기 위해

1978년 8월호, 1979년 5월호, 1980년 5월호 표지화(왼쪽부터), 김형근 화백, 김태 화백, 장완 화백의 작품이다.

1978년 8월호, 1979년 5월호, 1980년 5월호 표지화(왼쪽부터), 김형근 화백, 김태 화백, 장완 화백의 작품이다.

2명의 화가 외에도 ‘여성동아’의 표지화에서 김태, 김형근, 장완의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김태는 김숙진과 마찬가지로 1931년에 태어났는데 1·4후퇴 때 남쪽으로 넘어와 다시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전위적인 추상화풍에 반대하고, 구상화를 고집하며 우리 감수성에 맞는 양식을 스스로 추구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한 작가다. 사실과 구상에 집중해 묵직한 재질감과 수평 위주의 안정된 구조가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김태의 그림 속 요소들은 모두 미묘한 율동감을 지닌다. 상대적으로 인물화에서는 표현 면에서 특징이 있기보다 다양한 색을 살려 대상을 힘 있게 그려내고 안정적인 구도를 더해 상반된 2개의 목표를 좇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김태 역시 민족 기록화 장르에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리얼리즘이 중요한 민족 기록화야말로 그의 뛰어남을 잘 표현할 수 있는 기회였다.

장완과 김형근은 특색 있는 주인공들을 ‘여성동아’의 표지화로 그렸다. 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은 아니지만 신여성, 변화한 시대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 같은 힘 있는 주인공들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경제발전에 따라 1970년대 말부터 ‘미대생’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늘어난 학생들은 훌륭한 프로 작가로 성장했을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일제강점기 때 숱한 억압과 어려움 속에서도 창의성을 발현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인 선대 작가들과 다르게 이 시대의 미술가들에게서는 그런 후광이 느껴지지 않는다.

김형근 화백, 김태 화백, 장완 화백(왼쪽부터).

김형근 화백, 김태 화백, 장완 화백(왼쪽부터).

물론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 탓으로 책임을 돌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 예술가들은 사회적 억압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순수예술의 우수성만을 주장했다. 순수예술은 종종 그렇게 정치성에서 벗어나 예술을 위한 예술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존재가치가 더 크다. 위협적인 감시와 창작 정신에 관한 근거 없는 비난이 난무했던 그때도 화가들은 끝없이 뭔가를 보여주고, 작품을 남기기 위해 치열하게 활동했다. 이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또 하나의 고비가 넘어가고 새로운 예술가들이 더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됐다.

1978년 동아일보는 점차 확대되어가는 미술의 열망을 수용하기 위해 동아미술제를 만들어 국전에 대응하는 민전의 시대를 이끌어간다. ‘여성동아’의 표지화에 머물지 않고 더 많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고, 예술로서 대중과 더 많이 소통하려 했다. 어둠의 시절, 예술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고 자신만의 계단을 묵묵히 걸어 올라간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안현배는 
파리 제1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사를 공부했다. 프랑스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소에서 ‘예술과 정치의 사회학’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술사학자로서 예술을 사회와 역사의 관계 속에서 살핀다. 저서로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안현배의 예술수업’ 등이 있다.

#여성동아90주년 #표지화 #안현배 #여성동아

사진 홍중식 기자 뉴시스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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