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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대한민국 ‘정부기관 제1호’ 동시통역사 임종령

정세영 기자

2023. 08. 07

수십 년간 국내외 최정상의 입과 귀로 살아온 임종령 통역사. 일의 축적이 만들어낸 삶의 태도에 대해 들었다.

통역사는 화려한 무대 뒤의 숨은 조력자나 다름없다. 서로 다른 언어를 이어주고, 세계 각국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돕는 연결고리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통역사라는 직업을 한 번쯤은 꿈꿔봤을 것이다. 정상회담장에서 대통령 뒤에 앉아 속삭이듯 통역을 하거나, 헤드폰을 끼고 능수능란하게 동시통역을 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멋있다. 통역사는 단순히 언어를 번역해서 전달하는 일만 하지 않는다. 그림자처럼 누군가와 같이 움직이며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고 일상생활을 돕기도 한다.

동시통역 분야 1세대 임종령 씨는 대한민국 ‘정부기관 제 1호’ 동시통역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졸업 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를 시작으로 미국대사관에서도 통번역사 일을 했다. 현재는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학과장과 교수를 겸직하며 프리랜서로 통역 일을 하고 있다.

임종령 통역사를 이야기할 때 ‘일’과 ‘공부’ 두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을 얻었고, 일을 하며 사람과 인생에 대해 배웠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지는 않았어요. 좌절감과 허무감을 느끼기도 했죠. 그럴 때 자신을 몰아세우기보다 실패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임 통역사는 “일을 위해 시작한 공부가 어느새 삶을 위한 공부로 연결됐다”고 말한다. 세계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대한민국 정부 ‘최초’ 통역사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는 주위 사람들을 먼저 챙기고, 사소한 질문에도 신중하고 겸손하게 답한다. 진심으로 일할 때, 일이 곧 인격이 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는 32년째 언어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중이다.

임종령 통역사는 G20 정상회담장 등 대통령 뒤에 앉아 통역을 하거나 부스 안에서 동시통역을 한다.

임종령 통역사는 G20 정상회담장 등 대통령 뒤에 앉아 통역을 하거나 부스 안에서 동시통역을 한다.

외국어를 일상어로 처음 접한 건 언제인가요.

영어권 국가에서 체류한 경험은 없어요.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따라 브라질에서 4년간 있었는데, 영어보다는 포르투갈어를 더 많이 사용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영어, 한국어 중 어느 하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없는 상태였죠. 첫 영어 시험에서 50점 만점에 34점을 맞을 정도였으니까요.

동시통역사는 어떻게 시작한 건가요.

브라질에 살 때 어머니와 장을 보러 가서 포르투갈어로 의사소통을 도와드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당시에는 그게 통역이라는 걸 알진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뜻이 통하도록 말을 옮겨주는 일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통역 일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건 대학교 4학년 때부터예요. 세계축구협회 아벨란제 회장이 방한했을 때 포르투갈어로 며칠간 수행 통역을 맡게 됐거든요. 매일 좋은 호텔에서 식사하고, 쇼핑 가고, 경찰이 호송하는 가운데 서울 시내를 누비는 등 마치 VIP가 된 듯했죠. 통역사는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는구나, 착각한 거죠(웃음). 그러다 졸업 시즌이 되면서 직업과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여자는 여대를 졸업한 뒤 결혼해서 현모양처가 되면 성공했다는 것이 시대적 통념이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여자도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거든요. 제가 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공부했으니 전공을 살려보라고 하시면서 통역대학원 원서를 구해다 주셨죠. 당시 제일 크고 내용이 꽉 찬 영한사전을 사주시면서 응원하셨고요.

동시통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아직 한국에는 정부가 제공하는 국제회의 국가공인자격증이 없어요. 통역대학원에 입학해서 2년간 동시통역과 번역 교육을 받은 뒤 국제회의 전공으로 졸업하면 국제회의 통역사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돼요. 졸업시험은 학교마다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으로 국제회의, 순차 번역, 번역 시험으로 구성돼 있어요. 졸업시험은 통과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제 기수에는 50명 중 5명만 국제회의 전공으로 졸업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첫 시작은 걸프전 생중계였죠. 당시 상황 기억나시나요. 많이 떨렸을 것 같은데요.

통역대학원 졸업시험을 치르고 나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영어권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게 항상 콤플렉스여서 정말 집요하게 공부했어요. 시험이 끝나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오더군요. 매일 보던 책, 신문 등이 꼴도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동물이 겨울잠을 자듯 이불 뒤집어쓰고 연말을 보내는데, 성탄절에 대학원 교수님께 전화가 왔어요. 지금 걸프전이 터졌으니 MBC에 가서 동시통역을 해보라고요. 연락을 받고 황급히 밀린 신문과 뉴스를 보고 전쟁 관련 용어, 당시 중책에 계신 분들의 성함을 정리한 뒤 방송국으로 갔죠. 현장은 생각보다 프로페셔널했어요.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서 따라가기 어려웠거든요. 통역을 마친 첫날은 좌절 그 자체였습니다. 순발력도 없고 모든 게 서툰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통역대학원을 졸업한 뒤 기자로 일하고 있던 선배가 오더니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는 거예요. 더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셔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몇 주 더 걸프전 동시통역 일을 했어요.

국가 행사 또는 정상과의 만남을 위한 동시통역 준비 과정이 궁금합니다.

내용 난이도에 따라 달라요. 익숙한 분야는 몇 시간 만에 준비가 끝나기도 하는데, 배경지식이 필요하거나 고유명사가 많은 분야는 준비 기간이 길어요. 예를 들어 G20, 아세안(ASEAN)처럼 각국의 현황과 현안 과제를 파악하고 과거 회의록과 타결 협정문 등을 알고 가야 하는 자리면 최소 1~2주 이상은 걸리는 것 같아요. 2022년 대통령선거 때 안철수 후보의 외신 기자회견을 맡은 적이 있어요. 당시 준비 기간도 정말 길었던 것 같아요. 안 후보의 과거 5년간의 행보와 발언, 철학, 원칙, 대선 공약 등을 모두 파악해야 했거든요.

동시통역을 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지식을 갖춰야 하는군요.

동시통역은 언어에만 한정돼 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물론 언어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해요. 상대 국가의 역사와 문화까지도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꼼꼼하게 공부해놓아야 합니다.

아찔했던 순간도 있나요.

VIP들이 많이 초대된 중요한 행사에 순차 통역을 하러 간 적이 있어요. 귀빈들을 소개하는 와중에 아주 높은 분의 성함과 직함을 잘못 말한 거예요. 행사를 주최하는 기관의 기관장이니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분인데, 그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거죠. 쉬는 시간에 실무자가 찾아와서 크게 화를 내셨어요. 죄송하다고 한참 사과했지만 화가 풀리지 않으신 것 같더라고요. 결국 통역료를 받지 않고 사건을 마무리했던 기억이 나네요. 사실 당시에는 억울한 마음도 있었어요.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갔는데 교통비도 지급받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실무자에게 그런 행사는 업무 능력을 테스트 받는 순간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너무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거죠. 그 후로 행사 내용뿐 아니라 참가자들의 이름과 직함, 이력 등을 한국어와 영어로 재차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됐어요.

외국 인사들은 국적이 다양해서 영어 표기만으로는 발음을 정확하게 알기 어려울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럴 때는 에이전시나 클라이언트 측 행사 실무자에게 부탁해 최대한 정확한 발음을 여쭤봐요. 그 사건 덕분에 이름 관련한 실수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통역료를 떼인 대신 엄청난 가르침을 받은 거죠.

만났던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누구인가요.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님요. 정말 남다른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7년에 한국 기업 대부분이 IMF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었어요. LG도 외국 경영컨설턴트들과 하버드 경영대 교수들을 초청해 위기 대처를 논의하는 글로벌 콘퍼런스를 열었죠. 저는 그 자리에서 동시통역을 하게 됐고요. 당시 가장 놀랐던 건 분위기였어요. 해외에서 초청된 인사들과 LG 임원들이 함께 있는데, 분위기가 여느 기업과는 사뭇 달랐거든요. 제 눈을 의심할 정도였죠. 회의 시작 전까지 농담을 주고받고 자유롭게 어울리는 등 회의실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즐거워 보였죠.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구 회장이었어요. 내내 웃는 얼굴을 하며 회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주도하더라고요. 구조조정, 정리해고 등의 주제가 등장하자 구 회장은 사람은 소중하다며 끝까지 정리해고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또 통역사들에게도 먼저 다가와 고생이 많다는 말을 건네주셨어요.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다정함과 친절이 몸에 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외 인사 중에서는요.

미국 대통령의 동시통역은 거의 맡았지만 대부분 부스 안에서 통역 일을 진행했기 때문에 마주칠 기회가 많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트럼프 대통령이에요. 한미 확대 정상회담부터 기자회견, 만찬 사회까지 연달아 담당하니 제 목소리를 기억했던 것 같아요. 만찬이 끝나고 일부러 제가 서 있는 연단으로 다가와서 엄지를 들고 “You were great”라고 하며 시원하게 웃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귀빈과 함께 다니면 대접도 동일하게 받나요.

전혀 아닙니다(하하). 다자 회담 동시통역의 경우 통역사가 언어별로 2명씩 있어요. 통역사만 수십 명이나 되죠. 또 행사장이 아닌 별도의 룸에 통역 부스가 세워져 있는 경우도 허다해요. 보안 검색이 까다로워서 통역사가 단체로 대형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도 많고요. 특히 해외 순방 때는 공부해야 할 게 많아서 호텔 밖은 거의 안 나가요. 호텔 입구를 포함해 각 층에 경호원들이 있기 때문에 밖에 한번 나갔다 들어오기 번거롭기도 하고요. 교통체증 때문에 호텔까지 걸어간 적도 있어요.

해외를 자주 다니니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잠을 정말 잘 자서 피로가 많이 쌓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숙면이에요(웃음). 쪽잠도 잘 자는 편이고요. 통역 준비로 잠을 많이 못 잔 날에는 동시통역 파트너가 통역할 때 책상에 잠깐 엎드려 5~10분만 자도 피로가 풀려요. 유일한 체력 관리는 반려견 ‘마롱이’를 데리고 아파트를 돌거나 남편과 집 앞 석촌호수를 산책하는 정도예요.

선호하는 통역 스타일이 있나요.

자유 토론식 회의 통역을 좋아해요. 특히 연사와 좌장(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중심이 되어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이 1:1 인터뷰 형식의 좌담회를 진행할 때는 통역을 통해 연사의 모든 생각을 파악할 수 있어 더욱 재미있는 것 같고요.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을 듣고 통역하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만큼 짜릿해요.

AI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직업 중 하나가 통역사예요. 불안하지 않은가요.

AI가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고 있죠. 세계 명작이나 영화, 뉴스 자막 등 AI를 이용해 번역하는 일도 허다하고요.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국제회의 통역사는 문자 그대로 통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회의 분위기나 연사의 감정, 말의 뉘앙스까지 잘 파악해야 하는 직업이거든요. AI가 언어를 완벽하게 익힐 순 있어도 감정이나 분위기 등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또 스피치 서비스의 말투가 부자연스러워 거부감이 든다고 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AI가 아직 통번역사라는 직업을 위협할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동시통역사라는 직업의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세계 정상급 리더들과 한 무대에 서기 때문에 그저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환상 때문에 이 직업을 꿈꾸는 학생들도 있고요. 하지만 동시통역사는 누군가의 그림자로 사는 직업이에요. 전문성은 물론 행동과 차림새, 말투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합니다. 물론 큰 세상을 경험하고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는 등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해요. 하지만 동시통역 부스에 앉아 목소리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며칠을 수행해도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는 인사들을 접할 때는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죠. 해외 스케줄이 빡빡할 때는 밥 먹을 시간조차 주지 않아 며칠을 굶기도 하고요. 하지만 힘들지 않은 직업이 있을까요? 즐거운 것이 있으면 괴로운 면도 분명 존재해요. 그 순간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해야죠. 그건 각자의 몫이고요.

32년째 새벽 공부하는 베테랑

지금도 영어 공부를 하고 있나요.

저는 아침형 인간이라 새벽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져요. 일어나면 국내 신문을 정독하고 영자신문을 읽은 뒤 번역을 하죠. 밤에는 다음 날 있을 통역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잠자리에 들어요. 이 루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자 하는 저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영어는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며칠 사용하지 않으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요. 한마디로 감이 떨어지죠. 집안일을 하거나 운전할 때 영어 오디오를 듣거나 틈틈이 영어 소설을 보는 등 일상에서도 영어를 가까이하려고 노력해요.

영어 실력을 향상하기 위한 포인트가 있다면요.

공부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꾸준함과 반복이 중요하죠. 실력 향상을 위한 빠른 공부법은 없어요. 저는 통역대학원 입시 준비할 때 책에 수록된 3만3000개의 단어를 모조리 외웠어요.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800쪽 가까운 책을 외우게 하고요. 임계량을 채워야 실력이 폭발합니다. 쉽게 가려는 마음을 버리고 기본부터 차근차근 공부해야겠다는 태도가 먼저예요.

따님 둘이 하버드대학교와 버클리대학교 다니는 수재로 알려졌어요. 특별한 교육법이 있나요.

사실 저는 좋은 엄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쏟는 애정과 열정의 반만이라도 두 딸에게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거든요.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스스로에게 칭찬해주고 싶어요. 각자의 개성과 흥미를 존중해준 거요. 저는 두 딸을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어요. 영어로 대화도 해보고, 집 안 곳곳에 영어 단어를 붙여놓았죠. 첫째는 다행히 영어를 잘 따라 하고 재미있어하더라고요. 그래서 영어유치원까지 보냈고요. 하지만 둘째는 영어로 말을 꺼내면 입을 다물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거예요. 심지어 저를 외면했죠. 나중에 물어보니 제가 영어를 하면 외계인이 된 것 같아 무서웠다고 하더라고요(하하). 영어를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대로 뭔가를 강요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뒤로는 애들이 먼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만 기회를 주고 도와주는 엄마로 변했어요. 조바심이 들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저의 그런 태도가 아이들의 독립성을 키우고 스스로 적성을 찾게 한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게 한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거네요.

맞아요. 부모의 강요보다 스스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중요해요. 둘째는 조기교육 탓에 영어 자체에 거부감이 생겨 늦게 영어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영어를 잘하지 못했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영어가 서툴러서 친구들과 선생님들 사이에 존재감이 없었다고 해요. 사교적이고 밝은 아이인데 정말 힘들었겠죠. 하지만 수학을 잘해서 시험을 보면 항상 최고점을 받고, 영어 실력이 점점 늘자 주변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공부를 잘해야 대접받는구나. 학교에서는 영어 하나로 주변의 인식이 이렇게 달라지는데 사회에 나가면 더 심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이렇듯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스스로 찾게 해야 합니다. 또 무언가를 잘해냈을 때는 달콤함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세요. 칭찬이든 선물이든 아이가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괜찮아요. 그걸 위해서라도 더 발전하고 노력할 테니까요.

매일 공부하는 엄마 모습에 따님들도 자극을 받을 것 같아요.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평생 공부를 벗 삼으니 아이들도 공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에 공감하거든요. 아이들 시험기간에는 함께 공부했고, 성적이 안 나왔을 때는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믿어줬어요. 아이들이 방학 때 한국에 오면 커피숍에서 하루 종일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요. 공부하라고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아이들 공부 습관을 들이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통역사 #최초통역사 #공부법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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