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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0세대 페미니스트, 경성을 뒤흔든 나혜석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2023. 03. 04

“4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
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은 자신의 에세이 ‘신생활에 들면서’에 이렇게 썼다.
지금 시점에서는 가능한 말이겠지만, 90년 전 쓰인 글임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채로운 발언이다.

화가이자 작가였던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1896~1948).

화가이자 작가였던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1896~1948).

나혜석의 삶은 남달랐다. 그는 1896년 경기 수원에서 태어났다.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정신여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5개월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그의 삶은 1920년, 김우영과의 결혼으로 전환점을 맞이한다. 나혜석도 그러했지만, 교토 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김우영은 당시 유명 인사였다. 두 사람의 결혼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초혼이었지만, 김우영은 재혼이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의 친구였는데, 수원 집에 친구를 만나러 온 김우영이 나혜석을 보고 마음에 들어 계속 구애했다. 이 일화는 나혜석의 조카인 영문학자 나영균이 쓴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2004)에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언론은 ‘셀럽’인 나혜석 커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뤘다.

나혜석은 김우영의 청혼을 3가지 조건을 붙여 받아들였다. 일생을 두고 사랑해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처 딸과 별거할 것. 20세기 초라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나혜석의 요구는 당당하면서도 색다른 것이었다. 결혼에서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결혼관과 결혼이 자신의 정체성을 침해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자립의 의지가 드러난다. 시어머니와 김우영이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독립해 살겠다는 건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그리 가벼운 요구는 아닐 것이다.

세기의 결혼과 이혼

나혜석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화조’(1979)의 스틸컷. 배우 윤정희(왼쪽)가 나혜석 역할을 맡았다.

나혜석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화조’(1979)의 스틸컷. 배우 윤정희(왼쪽)가 나혜석 역할을 맡았다.

나혜석은 자신의 의지대로 결혼한 뒤에도 왕성하게 작업했다. 1921년 여성 화가로서는 한국 최초로 개인 전시회를 열었고, 1922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 ‘봄’과 ‘농가’를 출품해 입선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선전(鮮展)에 출품하고 입선했다. 남겨진 작품들을 보면 화가로서의 역량은 탁월했다.

나혜석 부부의 삶은 거침없었다. 1923년 김우영은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돼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고, 1927년 일본 외무성은 벽지 근무를 끝낸 김우영에게 구미(歐美·유럽과 미국) 시찰 기회를 준다. 시베리아철도로 러시아를 횡단해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를 돌고 미국을 거쳐 귀국하는 16개월의 여정이었다. 나혜석 부부는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



나혜석은 이 여행으로 자신의 인생관을 정돈하는 기회를 가졌다. 서구 사회를 관찰하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좋을까, 부부는 어떻게 하면 화합하며 살 수 있을까, 구미 여자의 지위는 어떠한지 등에 대해 생각했다. 여기에 더해 화가로서의 삶의 정체성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구미 여행은 나혜석을 운명의 줄에 흔들리게 할 사건을 품고 있었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최린을 만났다. 최린은 복잡한 인물이다. 3·1운동 때의 민족 대표 33인 중 1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이후 광복까지는 친일파로 반민족적인 활동을 벌였다.

구미 여행 중 김우영이 독일에 잠시 가 있었을 때 나혜석은 최린과 파리 구경을 하며 사랑에 빠졌다. 나혜석은 이때 최린에게 당신을 사랑하나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구미 부부 사이에 이런 공공연한 비밀은 죄나 실수가 아니며, 이런 연애는 오히려 남편과의 정을 두텁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 일은 나혜석의 이혼에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했고, 나혜석은 저항했다. 김우영은 이틀에 한 번씩 이혼 독촉장을 보내며 도장을 찍지 않으면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나혜석은 이혼하지 못할 이유로 노모와 아이들을 들었고, 부부 공동의 가정이었으니 이혼을 하더라도 생계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나혜석은 김우영이 2년간 재혼하지 않고, 재결합할 수 있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받은 이후 이혼 도장을 내주었다. 하지만 김우영은 이혼 넉 달 후 재혼을 택한다.

세상은 그들의 결혼만큼이나 이혼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나혜석에 대한 여론은 싸늘했다. 나혜석은 잡지 ‘삼천리’(1934년 8~9월호)에 ‘이혼 고백장’이라는 글을 실어 자초지종을 스스로 밝혔다. 자신의 불륜 사실뿐 아니라 남편 역시 외도했다는 사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정조에만 엄격한 사실을 지적했다. 또한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지더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며 재기하려 한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혼 과정과 자신이 원하는 바를 글로 써 언론에 공개한 나혜석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나혜석은 사회로부터의 도덕적 비난을 크게 의식한 것 같지 않다. 글에는 최린을 사랑했다는 고백이나, 일찍부터 역경을 겪으라며 아이들을 떠난 결정까지 본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것을 알고 한 고백이 넘쳤다. 스스로 더없이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참으로 당당했다.

모성 신화를 고발하다

1921년 3월 18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혜석의 첫 개인전 기사.

1921년 3월 18일 ‘동아일보’에 실린 나혜석의 첫 개인전 기사.

나혜석이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을 정체화한 것은 20대 시절이다. 1923년 잡지 ‘동명’에 실린 나혜석의 에세이 ‘모(母) 된 감상기’는 발표하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이 글에서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와 같은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한 것을 보면 이에 대한 논란은 사실 당연해 보인다. 나혜석이 이러한 반발을 모르고 이런 표현을 썼을 리 없다. 오히려 마음먹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생각으로 쓴 글이었다. 잡지 ‘동명’에는 이 글에 대한 비판으로 백결생의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가 실렸고, 이에 대해 나혜석은 ‘백결생에게 답함’으로 공개 반박했다.

나혜석이 겨냥한 것은 ‘모성 신화’의 해체다. 그 무기는 구체적인 자기 경험이었다. 나혜석은 막상 결혼과 출산이 닥치자 이전에 생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고 고백했다. 여러 부인이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며 시집가서 아이 하나만 낳으면 볼일 다 본다”고 얘기하면 코웃음을 쳤던 그다. 가정이란 기본적으로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도 생각과 너무 달랐다.

나혜석은 자신에게 태기가 닥치자 마치 꿈속 일처럼 부정하고만 싶었다. 고통과 속박은 그의 추측을 넘는 것이었다. 이제 예술이 무엇인지, 인생이 어떤지, 조선 사람과 조선 여성은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해 눈이 좀 뜨이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출산과 육아는 그를 가로막았다. 나혜석은 이에 대한 억울함과 원통함을 토로했다.

그가 쓴 시 ‘산욕’(1921)은 이때의 고통을 미사여구 없이 생생히 담고 있다. 10여 시간의 고통을 겪고 아이를 낳은 나혜석은 서럽고 원통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나아가 아기를 돌보는 것도 중노동이었다. 얼마나 잠이 모자랐는지 1시간만이라도 마음 놓고 실컷 자면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다고 고백했다. 나혜석은 그래서 태고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어머니가 불쌍한 줄을 이제 알았다고 적어놓았다.

이런 현실은 가정을 이루고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여성에겐 너무나 익숙한 세계다. 모성이 천상의 가치로 포장될 때 지상에선 여성이 통곡과 지독한 노동을 겪는다. ‘이혼 고백장’에서 나혜석은 모성애에 만족하고 행복한 여성도 있지만 모성애에 얽매여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비참한 운명 속에 울고 있는 여성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글 쓰는 여자로서 나혜석은 결혼,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모성에 씌워져 있는 아름다운 포장을 벗겨낸 셈이다.

이혼 후 나혜석의 삶은 격랑 속으로 들어간다. 1931년 작품 ‘정원’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지만 1933년 집에 불이 나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해 서울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세웠지만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 1932년경 파킨슨병에 걸려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상태였다. 이후 충남 예산 수덕사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면서 기거했다.

나영균은 1941년 회색 승복을 입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지척거리며 비탈길을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입은 덜덜 떨리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 보이는 그 할머니가 나혜석인 걸 알고 놀랐다고 했다. 1948년 나혜석은 결국 행려병자로 서울 원효로 시립자제원에서 사망했다.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고독과 신화 파괴자로서의 형벌은 이렇게 안타까운 마감으로 끝이 났다.

상처받은 시대의 선각자

문학연구자 장영은이 나혜석이 쓴 글을 엮은 책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2018).

문학연구자 장영은이 나혜석이 쓴 글을 엮은 책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2018).

나혜석의 삶과 예술, 그리고 페미니즘을 다룬 책은 적지 않다. 이 가운데 내 시선을 특히 끈 것은 문학연구자 장영은이 편집한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2018)이다. 이 책은 나혜석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장영은에 따르면 나혜석은 ‘칼자루를 쥔 남성 중심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칼날을 쥔 여성들이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은 여성이었다.

앞서 인용했듯 나혜석은 여성의 삶을 옥죈 장본인이 사회제도와 도덕, 법률과 인습이라고 선구적으로 경고했다. 그가 고난을 겪은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정을 꾸리고 출산과 육아를 떠맡는 과정에서 당시 여성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했다. 자신이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이혼 과정에서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사실 그대로 고백하고 대중에게 알렸다. 우리 현대사에서 상처받은 시대의 선각자 또는 모성 신화 파괴자라는 말이 나혜석만큼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 이 행복에 도달하는 데는 기본조건과 충분조건이 있기 마련이다. 나와 같은 여성들에게는 그 기본조건 중 하나가 성평등일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자신의 행복을 온전히 이루기 어렵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여성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20세기 초라는 시대적 구속을 돌아볼 때 나혜석의 삶은 더없이 주체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의 자유분방함이 지나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삶이 하나일 수 없다. 복수로 존재하는 게 인생이며, 그 개인들의 자발적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꿈꾸는 우리 사회 여성들에게 나혜석의 삶은 작지 않은 용기를 선사한다. 내가 때때로 이 상처 입은 선각자의 삶을 떠올리는 이유다.

#나혜석 #페미니스트 #성지연 #다시만난그녀들 #여성동아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사진 동아DB
사진제공 민음사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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