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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불행의 요소가 없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어요”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홍석 기자

2023. 02. 15

내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현실은 바뀌지 않는데 불안을 멈출 수 있을까.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만나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했다.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이어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서일까. 해가 바뀌어도 설렘보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하다. 서점가에는 ‘마음 챙김’ 관련 서적이 인기고, 각종 명상 애플리케이션이 연이어 출시되고 있다. 오은영 박사 등의 스타급 정신과의사가 탄생한 배경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개인의 불안한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말도 많은 사람이 스스럼없이 사용한다.

한국인들이 최근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UN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공개한 ‘2022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36위를 기록했다. 전 세계 146개국 중에서는 59위다. 2022년 기준 세계 국내총생산(GDP) 13위, K-콘텐츠의 세계적 흥행 등으로 경제·문화 강국으로 자리 잡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에 비하면 행복 수위는 매우 낮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불안한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까. 질문을 품고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을 찾았다. 나해란 원장은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와 뇌건강센터 교수 출신으로 오랜 기간 우울증, 번아웃, 공황장애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만나왔다. 지난해 8월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병원을 열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부작용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선 그게 더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개업 후 나 원장은 다양한 직군의 직장인 환자를 주로 만나고 있다고 한다.

개별 정체성 부족, 불안·불행으로 이어져

사용이 급증한 SNS는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사용이 급증한 SNS는 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는데도 행복도는 높지 않은데, 원인이 뭘까요.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하고 좁은 면적에 모여 살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비싼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으면 ‘쟤가 나랑 뭐가 그렇게 달라? 나도 할 수 있는데’란 생각이 강한 거죠. 사람마다 개별화가 부족해 남과 자꾸 비교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거죠.

개별화의 부재는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나요.

다른 사람은 하는 걸 나는 못 한다고 느끼면 열등감이 생기죠. 이 경우 대개는 자기 비하로 이어져요. 경제적·사회적 배경이나 교육 수준이 개인마다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거기에 맞게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합니다.



MBTI(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가 인기인 것도 개별화되지 않은, 정형화된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걸까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한국에서 유독 MBTI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한국인들이 자기를 규정하는 데 관심이 많아서인 것 같아요. 대다수의 한국 사람이 자기소개를 ‘제 회사는 00이고 직급은 00입니다. 00의 어머니고 학교는 00를 나왔고…’라는 식으로 많이 해요. 개인보다는 소속돼 있는 집단, 타이틀을 더 내세우죠. 개인이 아닌 집단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죠. 그러니 (어떤 지표를 통해서라도)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은 거죠.

SNS는 되도록이면 하지 않는 게 좋을까요.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알게 모르게 SNS로 다른 사람과 계속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이 많아요. SNS 속 세상이나 관계는 대체로 허상이란 점을 사람들이 알면 좋겠어요. ‘좋아요’의 숫자로 누군가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도요. SNS가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에 굳이 끊을 필요는 없지만 SNS 속 세계는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현실이 불만족스러울 땐 어떤 방식으로 삶의 위안을 찾아야 할까요.

환경을 바꾸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고 때론 불가능해요. 요즘 긍정심리학에서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약점을 걱정하기보단 강점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라고 얘기해요. 배로 비유하자면, 전동 프로펠러를 부러워하기보단 내가 가진 큰 돛에 집중하라는 거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에서 답을 찾기 시작하면 정말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요.

어느 정도의 불안감을 느낄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어느 정도의 불안과 히스테리는 정상이라고 말했어요. 병원을 찾아야 할 때는, 이전의 나와 비교해 스스로 알아챌 만한 변화가 느껴지는 순간이에요. 일상생활에 악영향을 줄 정도라면 전문가를 찾길 권합니다.

불안의 원인부터 탐구해야

최근 한국에도 ‘마음 챙김’이라는 용어가 유행하며 명상 열풍이 불고 있다. 불안감을 인정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마음 챙김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과연 명상만으로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제는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마트폰 같은 방해 요소가 있는데도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는 행위가 가능할까. 의문이 뒤따랐다. 이에 대한 질문에 나 원장은 다양한 솔루션을 제시했다.

마음 챙김은 무엇인가요.

마음 챙김은 미국의 존 카밧진 박사가 창안한 ‘마인드풀니스(mindful ness)’라는 개념이 번역된 단어입니다. 쉽게 풀어서 이야기하면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왜 내가 불행한지, 왜 자괴감이 드는지, 왜 질투가 나는지 등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자기 마음을 돌볼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나요.

마인드풀니스는 명상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자고 말합니다. 원래 불교에서 나오는 명상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 동부 사람들이 가져다 쓰면서 붐이 일었죠. 그리고 돌고 돌아 한국에까지 오게 된 거예요.

그러면 명상을 하면 누구나 초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명상은 잡생각을 없애는 훈련인데 쉽지 않죠. 과학적인 효과도 증명됐지만, 저는 마음 챙김이 꼭 명상일 필요는 없다고 봐요. 초연의 상태는 잡생각이 없어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인데, 쉽지 않습니다. 차라리 걱정의 원인에 계속해서 마음을 두기보다는 다른 일을 열심히 하면서 잡생각을 잊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가령 운동 같은 건가요.

네. 예를 들어 스쿼시를 하더라도 온몸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공을 받아 칠 수 없어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다 보니 저절로 걱정을 잊게 됩니다. 환자분들께도 신체 활동을 활발하게 하라고 적극 권유합니다. 참고로 저는 히말라야를 두 번 다녀왔어요(웃음).

직장인 환자들이 번아웃을 겪는 주요 원인은 무엇인가요.

직장인들이 병원을 자주 찾는 현상이 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에 제가 주로 보던 환자 중에는 40대 중후반 여성이 많았어요. 전업주부라 할 수 있는 일은 가사 노동밖에 없고, 자식도 남편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화병’ 난 분이 많이 오셨죠. 그런데 최근에는 직장인이 많이 늘었어요.

변화가 체감된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2010년대 중후반 정도인 것 같아요. 1990년대생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시점이죠. 코로나19 이후로도 굉장히 많이 늘었는데 제가 진단하는 원인은 다음과 같아요. 오랜 재택근무로 사람들과의 마찰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사람들은 변했는데 기업의 조직문화는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문화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데 직장인들에게는 어떤 조언을 하나요.

우선 회사가 바뀌는 게 맞아요. 최근에는 일부 기업에서 자정작용이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대다수의 회사는 쉽게 바뀌지 않으니 환자분들에게는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보라고 조언합니다. 회사에서 힘든 이유가 일을 못해서인지, 상사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업무적 인간관계가 힘든 것인지 먼저 고민해라보는 거죠.

힘들어서 병원을 찾지만 정작 힘든 원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 많군요.

대부분 증상이 있어서 오시죠. 회의 전에 공황발작이 일어난다든지, 우울증 증세가 있다든지. 일단 불안의 원인을 각자 스스로 명확히 해야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주어져요.

훈련받지 않은 개인이 혼자서 정확히 자신의 문제를 잘 찾아낼 수 있을까요.

원인을 제대로 못 찾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제대로 찾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이미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어요. 또 어쩌면 남이 찾아주는 것보다 정확할 수도 있고요. 자신의 문제는 자기가 잘 알 테니까요.

문제에 직면하고 나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다음은 쉽습니다. 받아들이는 거죠.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비로소 긍정적인 혹은 발전적인 변화의 방향을 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상사에게 인정받지 못해 불행했구나” “나는 일을 잘 못 해 직장생활이 힘들었구나”처럼요. 심리학에서는 인정으로 시작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아픔을 딛고 일어날 때 성숙해진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제 환자들을 봐도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개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가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로버트 월딩어 하버드대 의대 교수가 이끄는 연구 팀이 85년간 실험자들을 추적한 연구다. 다양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오랜 시간 추적한 끝에 연구 팀은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을 ‘따듯하고 의지할 수 있는 인간관계’라고 결론지었다.

인간관계가 행복의 가장 큰 요인이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인간관계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반대로 많은 사람에게 너무나 큰 스트레스 요인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인간관계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불행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일까.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존감 높여

직장인 번아웃이 급증한 가운데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스스로 불안의 원인을 탐구해 구체화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조언했다.

직장인 번아웃이 급증한 가운데 나해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스스로 불안의 원인을 탐구해 구체화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하는데, 어떤 관계를 말하는 걸까요.

먼저 인간관계도 나름이기에 어떤 인간관계가 행복을 가져오는지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속 얘기를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행복을 주는 인간관계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자존감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은 자신을 진심으로 서포트해주는 사람을 옆에 많이 두는 것이거든요. SNS 속 관계나 업무로 만들어진 인간관계는 이 범주에 해당하기 힘들고요.

반대로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인지도 말해주는 듯하네요.

그렇죠. 그냥 일상 얘기할 땐 “야, 그냥 때려쳐”라고 속 시원히 말할 수 있겠지만, 친구가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위로인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행복은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하던데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불행이 없는 삶이 곧 행복한 삶’이란 말을 굉장히 좋아해요. 많은 분이 알고 계셨으면 좋겠는 게, 행복의 기준을 모든 것이 충족된 이상적인 삶으로 설정하면 만족하기 어려워요.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자극적인 쾌락이 있는 삶을 행복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많죠.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마찰이나 스트레스가 조금 있더라도 유지 가능한 일상적인 삶이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데도요. 꼭 남보다 더 가져야 하고 인정받아야 행복한 건 아니에요. 많은 분이 불행한 일이 일어난 이후에야 일상이 큰 행복이었다는 것을 깨달으세요. 개인적으로는, 행복의 정의를 다시 정립하는 것이 더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돌봄 #박해란 #번아웃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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