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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여성주의 고전, 베리 프리던 ‘여성의 신비’ 다시 읽기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2022. 07. 16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리는 ‘여성의 신비’를 책장에서 다시 뽑았다. 세상에 나온 지 60년이 돼 가지만 여성의 자유와 의식 회복을 외쳤던 베티 프리던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1977년 11월 여성운동가들이 
미국 뉴욕에서 텍사스 휴스턴까지 전국여성대회를 위한 성화를 봉송하고 있다. 붉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작가 베티 프리던이다.

1977년 11월 여성운동가들이 미국 뉴욕에서 텍사스 휴스턴까지 전국여성대회를 위한 성화를 봉송하고 있다. 붉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작가 베티 프리던이다.

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문기자 출신 가정주부 베티 프리던(Betty Friedan)은 미국 여성지들 속 주인공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50년대 이전에는 대담하고 매력적이며 공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주인공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행복한 주부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 여성들은 왜 세계를 외면하고 가정으로 돌아간 걸까.

이 질문과 답변을 담은 책이 1963년 발표한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다. 제목은 여성의 삶을 ‘신비(mystique)’ 속에 놓아둔다는 의미다. 이 책은 미국에서만 300만 부 이상이 팔리며 서구 사회 전역에서 놀라운 호응을 얻었다. ‘제3의 물결’(1980)을 쓴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여성의 신비’가 “역사의 방아쇠를 당긴 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프리던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

1950년대 말 미국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10대로 낮아졌다. 대학 재학생 중 여성 비율은 1920년 47%에서 1958년 35%로 떨어졌다. 프리던은 100년 전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고자 투쟁했던 반면 이제는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대학에 간다고 지적했다.

당시 미국 출생률은 인도를 능가했다. 여성들은 금발과 마른 몸매를 갖는 데 몰두했고, 그들의 꿈은 결혼해 많은 아이를 낳고 교외에 있는 멋진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꿈을 꾸는 여성들은 이른바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the problem that has no name)’에 시달렸다. 공허감, 피로, 이유 없는 눈물 등이 그 사례다. 당시 이 문제들은 ‘가정주부 증후군’으로 불렸다.

프리던 자신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1942년 어느 봄날 자신의 꿈이 예기치 않은 종말을 맞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당시 그는 심리학 박사과정 장학금을 받을 예정이었다. 남자 친구는 반대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업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결국 프리던은 장학금을 포기하고 신문사에서 일했다. 곧이어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여성의 신비’에 이끌려 교외의 가정주부로 살았다. 문제는 프리던이 그 과정에서 인생의 목적의식이나 심리적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자신의 지성을 활용해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의 역할을 맡으면서도 훌륭한 연애를 하고, 아이도 기르고 있는 여성을 한 사람도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어느 날 찾아온 프리던의 깨달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많은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대학 졸업반 여학생들의 절망, 부인과 어머니 역할 말고 일생을 걸고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가정주부의 한탄을 들었다.

프리던 본인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의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주변에서 찾기 힘들다는 데 있었다. 그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좌절감을 안은 채 주부로 살았던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노처녀 고교 교사나 도서관 사서처럼 따듯한 생활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처럼 되고 싶지도 않았다.

프리던이 책에서 인용하는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청년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위기를 ‘자아의 위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를 결정 내릴 때 발생한다. 남성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남성의 이상적 모델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고통과 불안을 경험한다. 그래서 성장의 괴로움을 겪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프리던은 여성들의 경우 앞서 말한 ‘여성의 신비’가 그 정체성의 빈자리를 파고든다고 분석한다.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성장하는 길이 막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신비’는 누가 만들어낸 걸까. 프리던에 따르면 미디어 종사자, 광고 제작자, 심리학자, 사회과학자, 교육자들의 공모다. 이들은 여성을 가정에 묶어두려고 했다. 대학에 다닐 여성들을 일찍 결혼하게 했고, 그들에게 행복한 주부라는 ‘여성의 신비’에서 삶의 성취를 느끼도록 만들었다.

책에서 주목할 것은 고소득 주택단지에 사는 주부 28명과의 인터뷰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이들의 내면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28명 중 정신분석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이 16명이었다. 그 가운데 8명은 신경안정제를 복용했고, 자살을 기도한 이도 있었다. 프리던의 질문은 간단하다. 훌륭하고 지적인 미국 여성들이 왜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존재가 됐는가. 프리던이 발견한 이들의 공통점은 교육을 통해 능력을 개발했지만 이후 교외 가정주부로서의 삶이 그들의 재능을 부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등장을 사회가 꺼릴수록 ‘여성의 역할’에 대한 찬미는 비례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역할이 갖는 기능이 적을수록, 여성의 신비는 그 무의미를 위장하기 위해 뜻도 없는 갖가지 말들로 장식되어왔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유능한 여성들은 충실한 가정주부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얻으려 노력했다. 계속해서 아이를 갖거나, 자질구레한 집안일에 창조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프리던이 보기에 집안일은 인간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니었다.

당시 대다수 주부들은 반복되는 일, 단조로운 환경, 고립감, 자극의 결핍에서 비롯된 만성피로를 겪고 있었다. 가정주부에게서 나타나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병은 자녀들에게도 나타났는데, 미국 어린이들이 수동성, 우유부단함, 지루함을 겪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어머니와의 공생 관계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아동 병리 증세들이 생겨났다.

인간은 발전하려는 충동과 새로운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갈등 속에서 성장한다. ‘여성의 신비’는 소녀들에게 성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여성들은 일에 몰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 대가를 정서적, 육체적으로 치른 것이다.

안전한 포로수용소

프리던은 경고한다. 훌륭한 가정주부로 거듭나려는 여성은 마치 수용소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포로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유일한 현실인 수용소에 적응하면서 정신적으로 감금된다. ‘여성의 신비’라는 관념에 깊게 구속된 여성들은 자신을 가정이라는 사면(四面)의 벽 안에 가뒀다. 프리던에게 가정이란 결국 ‘안전한 포로수용소’에 불과하다.

이 책을 발표한 뒤 프리던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이웃의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고, 프리던의 아이들은 카풀에서 쫓겨나 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교외의 주부들에게 프리던은 점점 더 별난 존재가 됐고, 결국 도시로 이사를 가야 했다. 어떤 여성들은 프리던에 대한 적개심까지 드러냈다.

1960년대 미국 여성 처지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오랫동안 주부로 살아온 나도 프리던의 발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과장해서 해석하자면, 프리던은 주부들이 ‘여성의 신비’에 속아서 아무 의미도 없는 집안일에 인생을 낭비한다고 지적한다. 무의미에 뒤따르는 공허감을 피하고자 아이를 더 낳든지,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청소를 해가며 집안일이 힘들다고 엄살을 피운다고 비판한 셈이다.

물론 프리던은 여성들을 비난할 의도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단지 여성이 스스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프리던 자신도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 무력한 주부였다. 하지만 그 무력함에 맞서 이제 포로수용소와 다름없는 가정을 벗어나기를 희망했다.

“나는 ‘여성의 신비’가 주부라는 역할의 허무함을 감추는 한, ‘여성의 신비’는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리던은 사회의 변화 없이는 여성이 겪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책을 낸 이후 전미여성기구(NOW)를 창립하는가 하면 이를 포함해 여성운동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미여성기구는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여성단체로 성장했다.

프리던이 고심 끝에 도달한 대안은 경제적 독립과 게임 규칙의 변경이다. 먼저 여성이 완전한 인간의 잠재력에 도달하려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한 장벽을 제거하고 직업, 결혼, 가정에서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책 ‘여성의 신비’가 여성운동 제2의 물결에 큰 영향을 미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세기 초 제1의 물결이 참정권 등 공적 영역에서 남녀평등의 권리 획득에 주력했다면, 제2의 물결은 그 범위를 직업과 가족 등 사적 영역까지 넓혔다. 법적 평등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실질적 평등을 향해 가는 길은 멀고, 때로는 퇴행의 시기를 맞기도 한다. 프리던은 이 퇴행의 시기를 고발하고, 새로운 전진을 요청했다.

여전히 유효한 프리던의 일갈

2022년 한국은 어떨까. 여성들이 다 같은 종류의 삶을 사는 건 아니니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다. 나와 같은 50대 이상의 주부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는 가사 노동에 시달려왔을 것이다. 젊은 주부들은 가사 노동과 함께 직업을 구해 가계 수입을 창출해야 한다는 이중고를 겪었을 터다.

“이 시대 여성들의 근본적 고민은 여전히 남성과의 불평등 때문이다. 단지 ‘선택’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2018년 ‘여성성의 신화’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된 책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이 쓴 해제의 일부다. 불평등은 통계수치로도 드러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021년 유리천장지수에서 한국은 10년째 조사 대상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가운데 최하위다. 성별 임금 격차, 관리직 여성 비율, 기업 내 여성 이사 비율 모두 꼴찌다. 우리 바로 앞에 놓인 국가들은 가부장적 문화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28위)과 터키(27위)다. 스웨덴, 아이슬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가 상위권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성별 임금 격차다. 바로 앞에 놓인 일본이 22.5%를 기록한 반면, 우리나라는 31.5%였다. 남성이 100만원의 임금을 받는다면 여성은 68만5000원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는 조사 대상국 평균(13.5%)의 두 배가 넘는 수치다. ‘이코노미스트’는 우리나라와 일본 여성이 남성의 5배나 많은 무보수 활동을 하는 것을 예로 들어 가정 내 노동의 불균형 현상을 비판한다.

오늘의 한국 여성은 가정 내에서는 가사 노동의 압박에, 가정 밖에서는 임금과 승진에서의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프리던이 제안하는 것처럼 가정이라는 포로수용소를 넘어서 직업을 갖고 공적 일에 참여하려면 무엇보다 가정 내에서의 차별 없는 노동 분담과 남녀평등의 제도적인 뒷받침이 시급하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최근 페미니즘과 양성평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분명한 차별이 존재하는 데도 이를 시정하기보다는 정치권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남성과 여성 간의 갈라치기를 시도하는 것을 지켜보면, 여성의 앞날은 물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주부들은 (중략) 자신의 인간적인 자유를 행사해 자아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중략) 자신의 선택에 따라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고, 이름 없고 비인간적으로 조종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성장해야만 한다.”

프리던의 말이다. ‘여성의 신비’가 발표된 지 60년이 돼 가지만, 그의 주장은 여전히 경청할 만하다. 특히 한국에서 살아가는 내게 안기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다시 살아보라고 하면 프리던처럼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살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나 프리던의 충고처럼 당당한 주체로서의 자아의식을 가진 인간이자 여성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리던과 같은 언니가 있어 참 든든하다.

#베티프리던 #여성의신비 #성지연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AP뉴시스 
사진제공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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