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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첫 단독 주연 ‘오마주’ 이정은

심미성 프리랜서 기자

입력 2022.05.26 10:30:02

포털사이트에 ‘이정은’을 검색하면 여전히 ‘연극배우’라는 수식이 찍혀 있다. 1991년 연극 ‘한여름 밤의 꿈’으로 데뷔한 이래 수많은 연극, 드라마, 영화를 경유해온 잔뼈 굵은 배우지만 대중이 이름 석 자를 기억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기생충’의 문광 이후, 이정은의 행보가 몹시 바빠졌다. 영화 ‘오마주’는 그의 첫 단독 주연작. 그는 어떤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스크린 속 이정은이 곧게 뻗은 단발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등장했다. 곧장 ‘이 영화는 분명 신수원 감독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스친다. 단발머리와 뿔테 안경의 단출한 외양은 영화 ‘명왕성’(2013)과 ‘마돈나’(2015)를 연출한 신수원의 시그니처이기 때문. 이정은이 분한 ‘지완’은 인기 없는 독립영화를 찍는 중년의 여성 감독으로, 신수원 감독의 자아가 일정 부분 투영된 캐릭터다. ‘오마주’는 지완이 만든 세 번째 영화가 관객의 외면을 받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1세대 여성 영화인 홍은원 감독이 연출한 ‘여판사’(1962)의 필름 복원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지완은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흔적을 따라가는 데 깊이 몰두하며 환영의 그림자를 본다.

홍은원 감독은 1999년 작고한 실존 인물이다. 여성 인력 자체가 드물었던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여성 영화인의 저력을 입증한 입지전적인 감독. 선배 영화인과 시네마의 역사에 경배를 바치는 영화 ‘오마주’는 감독 신수원에게도, 배우 이정은에게도 변곡점으로 남게 될 작품이다.

그동안 음울하고 염세적인 세계관을 강렬하게 묘사해왔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이토록 현실적이고도 담담한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은 없었다. 극의 중심을 지탱하는 이정은의 단단한 연기도 일품이다. 아마도 ‘오마주’의 지완은 이정은이 만난 가장 정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내면의 파도를 묵묵히 견디고 살피는 지완으로부터 영화의 어제와 오늘을 묻는 여정이 펼쳐진다. 개봉을 10일 앞두고 설렘과 긴장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이정은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단독 주연의 무게

영화 ‘오마주’ 포스터.

영화 ‘오마주’ 포스터.

장편영화의 첫 단독 주연입니다. 작품에 임하는 느낌이 남다를 듯합니다.

개봉을 앞둔 지금에서야 실감 나는 것 같아요. 조연으로 임할 때는 전체적인 흐름을 해치지 않는 부분에 신경을 써왔다면, 주연은 서사를 계속 이끌어가는 중심적인 역할이잖아요. 관객이 캐릭터에 대한 공감대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어요. TV 드라마는 하루에 촬영해야 할 물리적인 분량이 빠듯해서 배역에 대한 논의를 꼼꼼하게 할 만한 여력이 없어요. 이번엔 감독님과 매 장면을 모니터하고 의논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작업할 수 있어 좋았어요. 어떤 각도에서의 얼굴이 느낌을 잘 전달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누며 정성스럽게 찍었어요.

그만큼 부담이 컸을 것 같아요.

요즘은 주 52시간 근무제를 최대한 지키면서 촬영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연 배우는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아요. 예전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을 찍을 때 김태리 배우가 3박 4일 정도 굉장히 집중해서 촬영한 적이 있었어요. 조연이었던 저는 어깨 두드리면서 “잘하고 있어!” 응원을 하고는 뒤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거든요. 그때는 집중력을 오래 가져가야 하는 주인공의 무게를 몰랐어요. ‘오마주’를 촬영하면서 경험하게 된 거죠.



이런 점도 있어요. 주로 조연을 할 때는 ‘(캐릭터에 대한) 서사가 분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주연 캐릭터는 전사(前事)나 주어진 환경이 구체적이지만, 조연은 그렇지 않거든요. 주어진 내용 너머는 스스로 생각하고 만들어가야 해요. 그렇게 현장에서 충돌해보고 이후에 걷어내기도 하면서 캐릭터가 완성되죠. 물론 자유롭다는 장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속에 던져진 느낌이 들 때도 있거든요. 주연을 맡는다는 건 무엇보다 그 점에서 가장 달랐어요. 캐릭터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죠.

신수원 감독의 자아가 투영된 영화감독 ‘지완’ 역을 맡았습니다.

지완은 중년의 나이에 신체적으로 갱년기를 겪고, 사회적으로 직업적인 실패를 함께 겪어요. 이를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던 과거 여성 영화인의 흔적을 좇는 데 몰두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꿈을 가진 중년의 여자가 현실적인 벽을 크게 느낄 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선배 영화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게 되는 이야기잖아요. 그 연결이 마음에 와닿아서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하겠다고 했어요.

배우로서 감독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경험은 또 달랐을 것 같아요.

사실 우리 직업군이 밖에서 보면 마냥 멋지게 느껴질 수 있어요. 대중에게 비치는 모습은 보통 기쁜 소식 위주니까요. 영화가 잘되면 전 세계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참석하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그 누구도 계속 응원만 받기는 힘들어요. 극에서 그려졌듯 영화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도 많아요. 가정에서 겪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을 수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소외당하기도 하죠. 실패나 좌절도 경험하고요. 어떻게 보면 ‘오마주’는 어떤 직종에 있는 사람이든 모두 비슷한 경로를 밟게 된다는 걸 상기시켜줘요. 그래서 영화나 예술을 하는 관객이 아니라도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생각해요.

극 중에서 지완은 어렵사리 세 번째 영화를 찍었지만 객석은 텅텅 비고, 남편에게선 “꿈 있는 여자랑 사는 건 외롭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죠. 신수원 감독의 삶을 엿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완전히 감독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잖아요. 실제로 “이거 다 감독님 경험담 아니냐” 묻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는 20%밖에 투영되지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머지는 상상력의 결과물인 거죠. 저 역시 연극배우로 시작해서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늘 가족들의 응원만 받은 건 아니었어요. 연극 연출을 해서 크게 실패한 경험도 있고요. 감독님 개인사가 얼마나 투영됐는지와 무관하게 공감할 부분은 분명 많았죠.

그때 이정은 배우가 신수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 ‘레인보우’(2010)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영화에도 영화감독의 꿈을 꾸고 고군분투하는 캐릭터 ‘지완’이 나와요. 이번 영화에서 제가 맡은 역할도 ‘지완’이에요. 공식적인 연작은 아니지만 두 영화는 정체성이 포개져 있어요. 감독님도 이번 영화가 ‘레인보우’의 속편처럼 느껴지길 원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레인보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마주’는 아주 구체적인 현실 묘사나 코믹한 장면들도 많다는 거예요. 감독님은 이 이야기가 전반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길 바라셨죠. 덕분에 저도 지완 역할에 편하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신수원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요.

‘작은 거인’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외양으로 보면 자그마한 체구를 갖고 있지만 영화에 대한 열정이 정말 남다르시거든요. 특히 현장에서의 열정이 굉장히 뜨거워서 저도 작품을 하는 동안 그 열정에 동화돼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할 수 있었어요. 제가 장편영화에서 주연은 처음이라 불안감이 컸는데 그럴 때마다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죠. 누구보다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있는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리얼한 연기? 사실은 흠이 많아”

그동안 이정은 배우를 기억하게 만든 건 ‘허를 찌르는 연기’였다. ‘기생충’(2019)에서 보여준 문광이나 ‘미성년’(2018)의 방파제 아줌마가 그랬다. 드라마 ‘소년심판’(2022)에서도 흔히 예상하는 드라마 속 판사의 모습을 비껴갔다.

‘오마주’에선 또 다른 면을 보여줬습니다. 불필요한 감정을 걷어낸 미니멀한 연기라고 할까요.

처음에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촬영을 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지금 이 버전이 가장 적합하다고 감독님이 생각하신 것 같아요. ‘오마주’는 지완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세 번째 영화가 망하고 난 뒤에 어떤 대응을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예요. 마지막 열정을 쏟아낼 것인지, 다른 길로 가야 할 것인지 본인 스스로도 몰라서 침잠하고 있죠. 그 파동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드러내고 표현하는 쪽보다는 내면의 고민을 가져가면서, ‘여판사’ 필름을 찾아가는 여정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게끔 했어요.

저도 연기하면서 쉽진 않았어요. 감독님은 무표정한 얼굴에 미세하게 표현되는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전 원래 외향적인 성격인데 감독님을 보면서 힌트를 많이 얻었죠. 실제로 감독님이 차분하고 조용하게 힘을 응집하는 면이 있으시거든요. 지완은 신수원 감독님의 일부이기도 하니까, 그런 모습을 통해서 지완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간 거예요.

영화에서 디테일한 생활 연기도 돋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친한 김희원 배우가 “아니 선배님은 사실 들여다보면 연기에 흠이 많은데 남들이 속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웃음). 사실 많은 분이 리얼하다고 해주시지만 정통 연기의 발성과 호흡을 배운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부족한 지점이 있죠. 아무래도 제가 갖고 있는 분위기가 현실적이잖아요. 그래서 제 연기를 리얼하다고 표현해주시는 게 아닐까 싶고요(웃음).

담담하지만 묵직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인데 어떤 장면이 가장 마음에 남았나요.

지완이 편집 기사 이옥희 선생님을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참 좋았어요. 이옥희 역할을 맡은 이주실 선생님과도 “배우로서 이 장면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는 얘길 나눴어요. 이주실 선생님은 5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연기를 해오신 분이고, 그분 앞에서 저는 까마득한 후배예요. 극 중에선 1세대 영화인과 현재의 영화인이 만나는 장면이죠. 동시에 저도 선배님 앞에서 어떤 후배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어요. 영화 안에서도, 밖에서도 말이 되는 이야기랄까요. 우리만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 묘한 느낌을 받았어요. 저도 이렇게 연기하다가 더 나이를 먹을 테고, 훗날 사라지고 잊힐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지속해나가야 하죠.

지완이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되’와 ‘돼’를 헷갈려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혹시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신에 의문이 든 경험이 있나요.

‘되’와 ‘돼’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건 비유라고 생각해요. 맞춤법에 확신이 없다기보다 내가 쓴 글에 확신이 없는 거예요. 배우로서도 그런 하중이 있어요. 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해요.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주연을 맡은 선후배들을 생각하면 존경심이 일어요. 어느 날부터는 대본을 읽는데 글자가 쪼개져 보이는 거예요. 병원에서 나이를 먹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노화는 저도 어쩔 수 없죠. 운동 열심히 해서 지치지 않고 함께 가는 수밖에요.

바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요. 출연한 모든 작품을 직접 모니터링하나요.

빠짐없이 모니터링하는 편이에요. ‘전달’ 자체에 집중해서 보려고 하죠. 언제부턴가는 소리를 꺼두고 화면만 보면서 모니터링을 하게 됐는데, 그렇게 하면 대사 외에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디테일하게 보여요. ‘저런 부분이 덜 드러났다면 더 나았을 텐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봐요. 말로는 충분히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행동을 봐야 해요.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동에서 티가 날 때가 있거든요.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할 때 나타나는 행동 양식이 있대요. 내 연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기도 소리를 끄고 행동만 주시하면 그게 보일 때가 있어요. ‘긴장했구나’ ‘저런 버릇이 있구나’ 생각하며 다음에 최대한 보완하려고 노력하죠.

‘오마주’ 작업을 하면서 ‘영화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을 것 같아요.

‘오마주’에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영화인을 이번 작업을 통해 알게 됐어요. ‘여판사’를 찍은 홍은원 감독의 따님이 남긴 책을 읽고, 신수원 감독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죠. 그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계속 영화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어요. 불가능에서 가능을 만들어낸 역사라고 생각해요. 저도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를 보고 자란 시네마 키드였지만, 이번에 새삼 그때 본 작품들이 힘든 환경에서 제작됐다는 걸 느꼈어요. 살아오며 만난 모든 작품이 지금의 저를 이루는 자양분이 됐어요. 모든 선배들에게 오마주(존경)를 바치고 싶어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영향이 잦아들고 있는 시점에 관객을 만나게 됐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다시 붐비는 영화관을 상상할 수 있는 시점에 극장 상영을 하게 돼서 의미가 깊어요. ‘오마주’는 화려한 인물이 나오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성을 되짚어보는 영화예요. 지나간 영화인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생각하게 돼요. 아마도 많은 분이 이런 이야기를 기다리셨을 것 같아요. 코로나19 시대를 보내면서 이제는 따뜻한 위로라든가 세밀한 감정이 들어 있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지금까지 다양한 역을 소화했는데 요즘 눈길이 가는 역할이 있나요.

앞으로는 ‘다작하지 말자’는 태도로 임하려고 해요. 고민하는 시간을 좀 더 늘리고 내실을 다지고 싶어요. 그런데 또 제가 사람 욕심이 많아서, 주변에서 좋은 작품을 준비하고 있으면 금세 솔깃해질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쯤은 재밌는 액션도 해보고 싶어요. 추리물을 좋아하거든요. 요즘은 중년 여성이 할 수 있는 연기의 폭이 넓어지고 있잖아요. 굉장히 현실감 있는 형사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그동안 많이 비쳤던 형사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정은 #오마주 #신수원 #영화인 #여성동아

사진제공 준필름



여성동아 2022년 6월 7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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