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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interview

건축에서 생태로, 영역 확장한 ‘고양이들의 아파트’ 정재은 감독

글 문영훈 기자

2022. 03. 24

정재은 감독이 ‘고양이들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건축 3부작’을 통해 인간과 건축의 관계를 다루던 그가 생태로 영역을 확장했다.

#낡은 아파트 단지 전경이 보인다. 카메라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면 사다리차가 굉음을 내며 부지런히 이삿짐을 나르는 모습이 보인다. 고양이들은 별안간 나는 소리가 신기한 듯 이삿짐이 아파트 창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정재은 감독의 신작 ‘고양이들의 아파트’ 배경은 1979년 준공된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둔촌주공). 5930세대가 거주했던 대단지 아파트다. 강남의 베드타운으로 강동구가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지어졌다. 40여 년간 수만 명의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을 터. 2017년 재건축 이주가 시작되며 주민들은 하나둘 둔촌주공을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 이별이라고!”

이사를 앞둔 한 중학생이 ‘공순이’에게 소리치자 그는 눈만 끔뻑일 뿐이다. 준공 당시 심은 묘목은 아파트 사이사이 빈 공간을 메워 울창한 숲을 이뤘고 그곳에서 약 250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자주 마주치는 고양이를 알아봤고, 자연스레 둔촌주공 안에서 공유되는 고양이 이름도 생겨났다. ‘공순이’는 공자처럼 점잖은 성격이라 붙은 이름. 그는 오랫동안 둔촌주공 사람들과 이웃으로 지냈으나, 재건축 결정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저 몸의 감각으로 무언가 주위 상황이 변하는 걸 느낄 뿐이다.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양이들 이주를 돕고자 ‘둔촌냥이(둔촌주공아파트 동네 고양이들이 재건축 이후 안전하게 이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모임)’라는 이름의 모임이 결성됐다. 입양·근거리 이주·장거리 이주, 총 세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다. 그 풍경이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 감독은 갓 스무 살 된 여성들의 우정을 다룬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 를 연출한 인물. ‘고양이를 부탁해’ 속 고양이가 주인공들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 구실을 했다면 이번에는 당당히 카메라의 중심에 섰다. 이는 정 감독이 ‘고양이들의 아파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의 이야기를 3월 10일 들을 수 있었다.



아파트 생태계

영화 초반, 주민들이 고양이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은 흡사 무릉도원을 보는 듯했습니다.

둔춘주공 주민의 기억을 담는 프로젝트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진행한 이인규 씨 초대로 처음 그곳에 방문했어요. 고양이들이 눈에 띄었는데, 보통 도시에서 마주치는 고양이와 달랐어요. 사람에게 쉽게 다가오고 친근감 있게 대하더라고요. 고양이가 살기 좋게 보인 건 환경적인 영향도 있어요. 아파트 내 녹지가 잘 조성돼 있고, 숨을 지하 공간도 넓은 편이고요. 이 아파트가 재건축된다고 하니 ‘그럼 고양이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인규 씨와 나누기 시작한 게 영화 촬영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고양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앵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고양이가 돼보는 것, 고양이 시각으로 공간을 체험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 눈높이에서 카메라를 들고 고양이를 담으면 하이레벨로 찍히잖아요. 실제로 고양이가 보는 눈높이에서 촬영하고자 노력했어요. 그러려면 카메라가 완전히 바닥에 붙어야 하죠.

타이틀 롤 ‘고양이들’뿐 아니라 새와 너구리도 등장합니다.

고양이는 새와 밀접한 관계를 맺죠. 새뿐 아니라 나무와도, 사람과도 상호작용을 해요. 아파트의 생태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고양이 이주 프로젝트’라는 포스터 카피를 보고 단계별로 착착 진행되는 이주 과정을 그릴 것이라고 추측했어요. 하지만 고양이의 거처를 옮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사람과 비슷해요. 250마리의 고양이가 있다면 각각의 개체마다 다른 접근이 필요하죠. 동물원처럼 통제가 되는 시스템이라면 다소 쉬울지 몰라요. 동물원 사자는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울타리 밖 현실에서는 오늘 보이는 고양이가 내일도 그 자리에 나타날지 아무도 몰라요.

“응시하고, 느끼도록”

고양이 이주 프로젝트의 난관은 종잡을 수 없는 고양이의 행동반경만은 아니었다. 둔촌냥이 회원들은 이주 과정에서 둔촌주공 ‘캣맘’들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간 고양이를 돌본 것은 자신들인데 정작 이주 과정에서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항의를 한 것이다. 정 감독은 이러한 갈등이 길고양이의 공공재 성격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해석한다.

“도시의 길고양이는 지자체 관리 대상입니다. 일종의 공공재인 거죠.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는 보호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둔촌주공 고양이는 그렇지 않아요. 그럼에도 고양이를 돌봐온 분들은 자신들이 고양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고양이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저는 길에 고양이가 있으면 밥을 주는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고양이가 이 도시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어떤 분은 길고양이를 보면 ‘배고프겠다’, 다친 고양이를 보면 ‘아프겠구나’ 생각하죠. 고양이와의 관계 맺기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는 처음에 둔촌주공에 살찐 고양이가 많아서 걱정했어요. 그런데 영화에도 등장하는 ‘동물권행동 카라’ 전진경 이사님은 “고양이들이 뚱뚱해야 갑자기 먹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비축한 에너지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인간도 많이 먹으면 행복해지잖아요.

그러네요. 체중 관리도 인간의 관점일 수 있겠네요(웃음).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이도 있을 텐데 촬영하면서 부딪히는 일은 없었나요.

주민들이 이주한 다음 촬영해서 트러블을 겪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도시에 살다 보면 늘 생기는 문제죠.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저 사람은 고양이가 보이는 게 싫을 수도 있거든요. 그렇다고 고양이를 눈에 보이지 않도록 없애버릴 수는 없잖아요.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영화에서 싹트는 다양한 갈등과 난관이 어떻게 봉합됐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 고양이들의 이주 과정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대신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개체가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영화에 여백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관객에게 어느 정도까지 설명해야 할지가 큰 고민입니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은 다양해요.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넣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1분짜리 뉴스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관객이 (영화를) 응시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어요. 설명을 배제하고 관객들이 보도록 만드는 거죠.

사적 욕망의 도시

기자 간담회에서 “이 영화가 특정 아파트의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한국, 특히 서울이라는 공간은 부가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한 개발을 짧은 시간에 반복하는 과정에서 형성됐어요. 아파트가 대표적 사례죠. 재건축 아파트는 가격이 두세 배 뛰면서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고요. 그런데 미국 뉴욕이나 유럽 대도시 아파트는 100년 이상 사용되기도 해요. 한국은 아파트 생애주기가 너무 짧죠. 이미 재건축이 진행된 둔촌주공 외에도 서울에는 재건축을 앞둔 곳이 많아요. 아파트 생태계가 무너지는 게 둔촌주공만의 일이 아니라는 거죠.

건축물의 생애주기가 지금보다 길어져야 한다고 보시나요.

국가적인 낭비라고 봐요. 고쳐 쓸 수 있는 것도 부수고 새로 짓는 데 자원을 쏟아붓는 거죠. 물론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가령 둔촌주공을 설계할 때는 가구당 차가 두 대씩 있을지, 가족 구성원 모습이 얼마나 다양해질지 예측하지 못했겠죠. 앞으로는 아파트를 지을 때부터 미래를 생각하면서 설계를 했으면 좋겠어요. 아파트에서 나오는 녹물이 문제라면 배수관을 교체하기 쉽도록 밖으로 설치한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정 감독은 건축의 공공성을 다루는 영화를 다수 연출해왔다. 한국에 공공건축 개념을 들여왔다고 평가받는 정기용 건축가의 마지막 순간을 담은 ‘말하는 건축가’(2011), 서울시청 새 청사 디자인을 두고 벌어진 갈등을 그린 ‘말하는 건축 시티:홀’(2013), 한국의 독특한 아파트 문화와 역사를 정리한 ‘아파트 생태계’(2017) 연작을 선보였다. 세 작품은 이른바 ‘건축 3부작’으로 불린다. 이번 영화에서는 관심 영역을 ‘건축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태로까지 확장해간다. 정 감독은 이 작품을 “한 아파트의 죽음”으로 볼 수 있다고도 했다.

건축에 대한 관심이 크신 듯합니다.

도시 공간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영화감독이 시간 예술을 다룬다면 건축가는 공간을 다룬다고 생각하거든요. ‘건축 시리즈’를 만들면서 그 관심이 도시라는 공간으로 확장됐고 그래서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공공성에 대한 이야기가 건축 4부작을 관통합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공공의 원칙이 매우 중요해요. 만약 나와 네가 사는 공간 사이에 공유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해보죠. 자신의 공간에 길을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죠. 그럼 그 공유하는 길이 어떻게 사용돼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민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방식으로 공유할 것인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그런 원칙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죠. 그런데 한국 도시에서는 사적인 욕망이 강조되다 보니 공공 개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고요. 다시 고양이 얘기로 돌아간다면 공공의 영역에 있는 길고양이에게 내가 밥을 준다고 해서 내 소유물이 되는 게 아니잖아요.

한 아파트의 죽음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정 감독은 도나 해러웨이의 반려종(companion species) 개념을 꺼냈다. 해러웨이는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생물학자, 과학 학자, 문화 비평가다. 그는 2003년 저서 ‘반려종 선언’을 통해 인간과 개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평등한 권력 관계를 지적했다. 이 문제의식은 개와 인간의 관계에서 머물지 않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다른 종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적용할 수 있다.

“고양이를 객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주체로 보는 게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인 것 같아요. 반려종이라는 표현은 함께 사는 생명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죠. 인간에게 고양이가 반려종이듯 고양이에게 인간도 반려종이에요. 길고양이는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달라져왔고 사람 역시 마찬가지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동물을 넘어서 식물이나 사물도 마찬가지고요.”

건축물도 ‘반려종’인가요.

사람은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해요. 주거 형식은 개인 성격에도 영향을 미치죠. 살고 있던 공간의 일원으로 지내다가 그 생태계가 어떤 이유로든 사라지면 상실감을 느낄 것 같아요. 둔촌주공도 마찬가지죠. 이 아파트가 철거됐을 때 그 영향을 받은 분들이 계시겠죠.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둔촌주공의 죽음으로 끝난다. 영화 초반과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다.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죠. 어떤 황폐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보면서 주민들은,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둔촌주공 #길고양이 #정재은 #여성동아

사진 홍태식 기자
사진제공 필앤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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