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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power woman

농구선수 출신 정치인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농구선수 출신 사무직 노동자가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인터뷰 오홍석 기자 패션 최은초롱 기자

2022. 02. 04

‘보통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보통 사람’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평범한 은행원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이 된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제가 선거 공보물 사진도 따로 안 찍어요 이런 모습이 어색해서요. 모델은 정말 못할 일이야.”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영 어색한지 김영주(67) 더불어민주당 의원(서울 영등포구갑)은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웃어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도 내내 입꼬리가 무거웠다. 4선 국회의원. 낙선도 경험했으니 공인 생활을 한 지 적어도 2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카메라 렌즈가 여전히 익숙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소품으로 농구공을 건네자 포즈가 달라졌다. 자연스레 태가 나왔다.

김 의원은 중학교 때부터 농구선수로 뛰었다. 서울 무학여고를 거쳐 1974년 한국신탁은행(현 KEB하나은행) 실업팀에도 몸을 담았다. 3년간 활약하다 은퇴한 뒤엔 은행원으로 일했다. 당시 일터에서 성차별을 경험하며 자연스레 노조 활동을 시작한 그는 여성 최초로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현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상임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18년간 금융노조에서 활동했다. 채용과 임금, 승진 등에서 여성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남녀고용평등법 제·개정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김 의원이다. 이런 모습을 본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그를 정치권에 영입했다. 청와대 노동 태스크포스(TF) 자문위원 등을 거쳐 17·19·20·21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 의원은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

화려한 정치 경력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내 경쟁력은 비주류로서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다. 직장인·엄마·주부로 살아가며 한국 사회 보통 사람의 삶을 경험한 것이 정치인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원동력이라는 의미다. 그와 마주 앉아 ‘보통 사람’ 김영주의 삶에 대해 들었다.

농구선수로서의 커리어는 잘 알려진 반면 그 전의 삶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의원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제가 다섯째 딸이고, 남동생이 있어요. 제 태몽에 호랑이가 나와 부모님이 아들을 기대하셨대요. 그런데 딸이 태어났으니 처음엔 실망을 좀 하셨죠. 그래도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어릴 때부터 키가 커서 언니들이 입던 옷을 물려 입지 않고 새 옷을 많이 샀어요. 또 언니들은 경기 양평군 할머니 댁에서 컸지만 저는 몸이 약해 내내 서울 부모님 아래서 자랐죠.

베개가 코피로 젖을 때까지 훈련 거듭한 소녀

김영주 의원이 고용노동부 장관 재임 시절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주 의원이 고용노동부 장관 재임 시절 김부겸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몸이 약했는데 농구는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제가 다니던 중학교에 농구부가 있었어요. 몸이 약했지만 달리기는 곧잘 했는데 그 모습을 보신 체육 선생님이 “농구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셨죠. 농구팀에 들어가 처음에는 고생을 좀 했어요. 동기생들은 시합을 뛸 때 전 기초부터 배웠거든요. 주전자랑 농구공 나르는 역할부터 시작했죠.

그런데 어떻게 실업팀 입단까지 하신 건가요.

이를 악물고 했거든요. 방과 후 훈련을 마치면 혼자 코트에 남아 연습했어요. 새벽에 또 혼자 농구코트에 나가 개인 연습을 했고요. 자고 일어나면 베개가 코피에 젖어 있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농구를 늦게 시작했지만 김 의원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당시 농구 명문이던 서울 무학여고에 진학해 포워드로 활약했고, 졸업 뒤엔 한국신탁은행에 스카우트됐다. 그 시절 우리나라엔 여자농구 실업팀이 6개 밖에 없었다. 전국 여고생 가운데 순위권에 들어야 선수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만큼 김 의원 실력이 뛰어났던 셈이다.

그러나 김 의원은 실업팀 입단 이후 동료 선수들과의 체력 차이를 절감했다고 한다. 3년 만에 은퇴를 선택하고, 은행원으로 제2의 삶을 시작한 이유다. 그는 당시를 떠올리며 “직장 생활도 쉽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은행에 들어온 직원들과 비교하면 나이는 많은데 업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주판 사용법, 돈 세는 법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도장 정리 같은 허드렛일도 도맡아 했다. 결국 2년 만에 그는 “지점에 없어서는 안 될 행원”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큰 탈 없이 직장 생활을 하던 그가 노조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뭘까 궁금했다.

“1982년 6월 어느 날이었어요. 노조에서 ‘올해 여행원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고 발표하는데 겨우 300원이 올랐더군요. 당시 껌이 한 통에 100원하던 때거든요. 제가 맨 뒤에 앉아 있다가 너무 화가 나서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가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임신 8개월 때라 거의 만삭이었는데, 제 뒤통수에 대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 여자는 누구냐’ ‘남편이 참 불쌍하다’….”

이후 아이를 낳고 회사에 복귀하니 담당 업무가 바뀌어 있었다. 회사는 그를 신입 사원 보조직으로 발령냈다. 분노하는 김 의원에게 한 노조 간부가 “노조 활동을 같이하자”고 제안한 게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됐다.

김 의원에 따르면 그 시절 여성 직원이 남성 동료와 동일한 대우를 받으려면 상식, 영어, 논문, 실무 등 네 과목 필기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는 “당시 여행원들은 이 시험을 ‘성전환 고시’라고 불렀다”며 “이 외에도 여성에게만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내용의 퇴직 각서를 쓰게 하는 등 차별 대우가 무척 많았다”고 밝혔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김 의원은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게 됐고, 김 전 대통령 눈에 띄어 자연스레 정치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벌써 4선 국회의원이신데요. 국회 일정이 없는 날은 어떻게 보내시나요.

주로 지역구 활동을 해요. 운동선수 때 버릇이 남아 있어서 지금도 아침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납니다. 제가 의정 활동을 하면서 가장 주력하는 건 국민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부분을 개선하는 거예요. 그래서 악취방지법, 소음방지법 같은 법안을 발의했죠. 지역구 현안을 파악하고자 매주 서울시의원, 영등포구의원 등과 만나고 있고, 17년째 관내 학부모들과 정기적으로 간담회도 열어요. 덕분에 제가 ‘엄마’ 지지자들이 많습니다.

노동 현장 성차별에 맞서 싸우다 정치 시작

원래 성격이 사교적이었나요.

아니요. 운동선수는 폐쇄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사교적이 되기 힘들어요. 정치를 시작하면서 성격이 변했죠. 많은 사람을 만나 의견을 듣고, 입법을 통해 그들의 어려운 점을 해결해주는 게 참 보람된 일이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이 저를 조금씩 변하게 만든 거죠. 지역구 주민들 사이에서 제 별명은 ‘행당동 아가씨’입니다. 국회의원이라며 거리를 두기보다 친밀하게 다가가려 노력한 결과인 것 같아요.

행당동 아가씨요.

제가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무학여고를 나왔으니까요(웃음).

지역 구민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나요.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만나뵌 분이 떠오르네요. 당시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 첫해로, 서울에서 여당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이 강세였어요. 48개 선거구 가운데 통합민주당(현 더불어민주당)이 승리한 곳이 7개에 불과했죠. 저도 1.2%p 차이로 낙선했고요. 이튿날 낙선 인사를 다니는데 한 주민이 100일도 안 된 아이를 안고 펑펑 울면서 “우리 아이가 클 때까지 계속 영등포에 있을 테니 4년 있다 다시 나오라”고 위로해주셨어요. 그 외에도 저를 격려해주는 분이 많았고, 이분들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문재인 정부 초대 고용노동부 장관이던 시절 얘기를 여쭤보죠. 당시 장관이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솔직히 저는 제가 그런 제의를 받을지 몰랐어요. 지금까지 여성이 노동부 장관을 맡은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요. 문 대통령께서 제가 노동운동을 오래 한 점, 의정 활동을 하면서도 환경노동위원회에 오래 몸담은 점 등을 알고 제안해주신 것 같아요.

임명 당시 대통령이 특별히 부탁하신 점이 있나요.

두 가지를 말씀하시더군요. 첫째, 산업재해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달라고 하셨어요. 또 청년들이 임금 체불을 당하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고 하셨습니다.

장관으로서 어떤 노동부를 만들려고 노력하셨나요.

부처 이름이 고용노동부지만, 사실 고용에 해당하는 일자리 창출은 경제 성장을 담당하는 다른 부처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저는 노동문제에 집중해 노동자의 근로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동안 노동자에게 노동부는 너무 먼 기관이었어요. 부당한 대우를 받고 노동부에 건의해도 해결되기까지 한 세월이 걸렸죠. 저는 이 문제를 바로잡고 싶었어요. 그래서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현장노동청’을 설치하는 등 시민 곁으로 직접 다가가 민원을 받고 빠르게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또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주 52시간 근무제’ 정착에도 관심을 뒀고요. 연공서열보다 능력 중심으로 간부를 선발해 노동부에 여성 실장과 국장 세 명을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정도로 성평등이 실현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여전히 많이 부족하죠.

내부에서 불만은 없던가요.

왜 없었겠어요(웃음). 다만 누구도 저한테 내놓고 말은 않더군요.

대선을 앞두고 여성할당제에 대한 논쟁이 뜨겁습니다. “여성할당제 때문에 능력이 부족한 여성들이 자리를 차지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약자의 사회 진출을 위해 어느 정도의 할당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간 한국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를 여성 몫으로 여기는 인식 때문에 여성의 사회 진출이 어려웠던 게 사실이죠. 이 문제가 점차 개선되고 있고, 지금이 변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다고 생각해요. 과도기를 거쳐 사회가 좀 더 투명해지고 공정해지면 할당제가 필요 없어지겠죠.

21대 국회에 여성 의원이 19%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과거 정치자금 모집 제한이 없던 시절에는 선거에서 이기려면 학연, 지연이 중요했어요. 남성들로 이뤄진 ‘그들만의 리그’에 여성이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죠. 정치 문화가 워낙 남성 위주라 여성이 살아남기도 힘들었고요. 그나마 19대 국회부터 비례대표 홀수 번호에 여성을 공천하는 제도가 만들어지며 여성 의원 수가 20%에 가까워진 겁니다. 최근 제가 만나본 젊은 여성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용감하더군요. ‘나는 여자라 못 해’ 같은 생각에 자기 자신을 가두지도 않고요. 22대 국회에는 여성 의원이 좀 더 늘어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열정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어떤 사람이 국회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나요.

제가 느낀 정치는 대단한 게 아니에요. 저부터 철저하게 비주류로 이 자리까지 왔잖아요. 저는 학생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전문직 출신도 아니에요. 여성 사무직 노동자 경력으로 국회에 들어왔죠.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멸시의 시선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여성으로서, 주부로서, 직장인으로서 경험한 것들이 국민 생활에 밀접한 입법 활동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정치를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청년들에게도 더욱더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국민들께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언제나 초선의원처럼 열정을 갖고 의정 활동을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네요. 저는 제가 거만해지거나 나태해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어요. 영등포 골목 하나하나 안 걸어본 길이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챙긴 일꾼으로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김영주 의원 러브 스토리
“숙맥이라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고 경기장만 찾아오던 남편”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남편 민긍기 전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만남은 선수와 팬 관계로 시작됐다. 김 의원이 서울 무학여고 1학년이던 시절, 김 의원 사촌오빠가 재학 중인 고등학교 근처에서 농구 시합이 열렸다. 김 의원 사촌오빠는 동생 경기를 보러 가자며 친구들을 불러 모았고, 그 무리에 민 전 교수가 끼어 있었다. 이날 김 의원에게 마음이 생긴 민 전 교수는 이후 묵묵히 경기를 보러 다녔다. 부끄러움이 많아 관심을 표현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 의원님께서 먼저 대시를 하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의원은 웃으며 “둘 다 성인이 된 이후 남편이 사촌오빠한테 나를 소개시켜달라고 졸랐다고 하더라”라고 답했다. 김 의원은 그 전까지 민 전 교수 이름도 몰랐다고.

두 사람은 이후 8년의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김 의원은 민 전 교수에 대해 “여전히 무뚝뚝하다”고 했다. 하지만 2015년 김 의원이 골절상을 당한 뒤부터 살림을 도맡을 만큼 묵묵히 배려하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김 의원 집에서는 부부 가운데 좀 더 시간이 있는 사람이 요리를 한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한 명 있다. 김 의원은 “시댁에서 남편한테 ‘명색이 박사인데 아들 한 명은 둬야 하지 않겠느냐’고 채근했다고 들었다. 남편이 ‘내 배로 낳는 거면 진작 낳았겠지만, 저 사람 배라서 안 된다’고 막아섰다더라”고 전했다.

지난해 대학교수직에서 은퇴한 민 전 교수는 요즘 여유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김 의원은 “결혼기념일에 꽃 한 송이를 선물하고 직접 요리해서 같이 저녁을 먹는 평범한 부부로 살고 있다”고 했다.


패셔니스타 김영주
김 의원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멋쟁이’로 잘 알려져 있다. 이날 여성동아 화보 촬영 의상도 모두 김 의원이 직접 준비한 것이다. 단정한 재킷에 브로치를 달아 포인트를 준 섬세함에서 그의 패션 센스를 엿볼 수 있다.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55 사이즈를 입는다.

옷을 잘 입는 비결이 있으신가요.
옷을 특별히 잘 입는 건 아니에요. 키가 커서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닐까요(웃음). 굳이 비결을 찾자면 직장 생활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은행원은 고객 응대 업무를 하니 깔끔하고 단정한 복장이 필수거든요. 사회생활 할 때 정장 입은 멋진 언니들을 많이 보면서 배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정치인이다 보니 비싼 옷을 입으실 거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에이, 요즘 인터넷이 발달해서 비싼 옷 입으면 국민들이 다 알아요(웃음). 은행원 시절 비싼 옷을 입어보기도 했는데 다 부질없어요.

옷을 구매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있다면요.
제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촉감과 길이예요. 비싸다고 촉감이 좋은 것만은 아니잖아요. 또 제 키가 170cm인데 예전에는 저한테 맞는 옷을 찾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요즘은 좀 상황이 나아졌지만, 지금 이 바지도 실은 단을 덧댄 겁니다(웃음).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뉴스1 
헤어&메이크업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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