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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interview

분쟁지역 전문 김영미 PD “탈레반보다 아버지와 오빠가 더 무서운 아프간 여성들의 삶”

글 정혜연 기자

2021. 09. 24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다시 장악하자 여성들은 벗어뒀던 부르카를 꺼내 입었다. 일부는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다 피를 흘렸고, 그들의 모습에 세계는 참담함을 금치 못했다. 수차례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한 바 있는 분쟁지역 전문 김영미 PD 역시 무거운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지난 8월 15일을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시계는 20년 전으로 돌아갔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은 2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해 있던 미군의 철수가 완료되기도 전에 수도 카불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3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맞대응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수도를 내줬고,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탈레반의 카불 입성 전에 아랍에미리트로 도피했다. 총과 포탄으로 무장한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하자 시민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탈레반은 저항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북부 판지시르까지 함락시키며 아프가니스탄의 공식 정부로서의 새 출발을 세계에 알렸다
.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공포에 떠는 이유는 무엇보다 탈레반이 1996년부터 5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면서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 특히 여성 인권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다. 당시 탈레반 정부는 이슬람 원리주의 법인 ‘샤리아 법’을 빌미로 여성에게 가학적인 형을 집행했다. 이를 기억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망사로 눈을 가린 채 머리부터 발목까지 덮어쓰는 통옷 형태의 전통 복식인 ‘부르카’를 꺼내 입었다. 탈레반 정부는 카불 입성 당시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유화적인 메시지를 내놓았지만, 최근 도심 곳곳에서 일어난 여성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고 채찍과 몽둥이로 위협하는 등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탈레반보다 아버지와 오빠가 더 무서운 아프간 여성들”

아프가니스탄 내 일련의 사태를 남다른 시선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다. 지난 20년 동안 세계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해온 김영미(51) PD. 평범한 주부였던 그녀는 2000년 동티모르 여대생이 내전으로 희생당한 기사를 읽고 무작정 동티모르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이라크 등 분쟁지역을 취재해왔다. 이를 토대로 다큐멘터리 SBS ‘일촉즉발, 이라크를 가다’(2003), MBC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 부대’(2004), SBS ‘이슬람의 딸들’(2005), MBC ‘불타는 레바논’(2008) 등을 제작했다.

특히 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군이 침공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두 달 동안 취재한 내용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KBS 일요스페셜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2002)은 오랫동안 화제가 됐다. 당시 카불 방송국의 여성 아나운서 마리암이 부르카를 벗고 맨얼굴로 방송을 하는 장면은 국내외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데, 김 PD는 마리암의 집에 찾아가 변화의 중심에 선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현재를 취재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로도 그녀는 몇 차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취재를 이어나갔고, 지금까지 현지 취재원들과 접촉하고 있다. 9월 중순, 쏟아지는 취재 요청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한 달을 보낸 김 PD를 만났다.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지켜봤을 김 PD는 탈레반의 재점령에 대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며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탈레반 치하의 시대를 20년 만에 다시금 맞게 된 아프가니스탄을 보며 어떤 심정이었나요.

아프가니스탄은 제가 처음으로 종군 취재를 갔던 곳이기 때문에 남다른 감정이 남아 있죠. 2001년 겨울 그곳에 갔을 때 만났던 사람들과 계속 연락하고 있고, 지속적으로 내부 정세를 관찰하고 있었어요. 사실 탈레반이 다시 집권하리란 건 2005년에 예감했어요. 그때도 취재를 바탕으로 탈레반이 돌아온다고 방송했는데,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를 꽤 받았죠. 사실 미군이 탈레반을 보는 시각과 제 관점은 상당히 달랐어요. 중동은 아시아 정서로 접근해야 하는데 미군은 그런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고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현지 소식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졌는데요, 아프간의 상황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요.

8월 15일부터 제 스마트폰으로 탈출을 도와달라는 메시지가 쏟아졌어요. 가깝게 지냈던 취재원 이외에 스쳐 지났던 사람들까지 모두 연락을 해오니 ‘이 모하마드가 어떤 모하마드지?’ 싶을 정도로 헷갈리더라고요. 특히 한국 정부가 미라클 작전을 수행해 특별 기여자를 데려간 소식이 알려지자 제게 “2차 수송 계획은 없는가?”라고 묻기도 했죠. 더러는 ‘내가 안 되면 아이라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고요. 20년 전에는 자녀의 미래나 교육에 대해 신경 쓰지 않던 사람들도 이제는 달라졌다는 걸 느꼈고, 그들도 서양 문물을 맛보면서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됐어요. 1996년부터 5년간 탈레반 치하에서 여자아이들은 교육받은 적이 없고, 글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거든요. 최근 도심 곳곳에서 여성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보며, 이 사회가 변화 과정에 있었는데 이제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될 거라 생각하니 참 안타까워요.



2001년 이후 여러 차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는데요. 미군 점령 이후 20년간 여성 인권이 신장된 걸 직접 체감하셨나요.

외부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인권이 신장됐다고 보는 건 겉모습에 불과해요. 20년 동안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직접적인 사회 참여가 많지 않았어요. 여성들이 자체적인 노력으로 인권을 신장했던 것도 아니었죠. 아프가니스탄 여성에 대한 하대 의식은 탈레반뿐만 아니라 각 가정 남성들에게 확고히 자리 잡혀 있었어요. 사실 탈레반보다 아버지와 오빠가 더 무서워요. 2006년 아프가니스탄 ’명예살인’에 대한 다큐를 만들 때였는데, 톨로 TV 아나운서가 명예살인을 당해 취재차 미군 통역관으로 일하는 그녀의 오빠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어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카펫을 들춰보라는 거예요. 핏자국이 선명했는데 그 자리에서 자신의 동생을 명예살인 했다고 말하더라고요. 탈레반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자국 남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라도 여성을 탄압했던 거죠.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인가요.

종교 때문이 아니라 몇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풍습이고 문화예요. 요르단의 기독교 집안에서도 명예살인이 행해지거든요. 중동에서 여성을 보는 관점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고, 이슬람 국가에선 코란을 명분 삼아 탄압하기도 하죠. 사실 이슬람교는 ‘자비’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종교예요. 제가 취재를 위해 섭외를 부탁할 때 “이슬람교의 최고 가치는 ‘라흐만(자비)’인데 왜 먼 길을 날아온 이방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가”라고 물었어요. 그러면 “기다려보라”며 의논한 뒤 문을 열어줬죠. 또 저는 기독교인데 사람들이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이슬람교가 아니지만 이슬람교에 대해 배우는 중이다”라고 답했고, 그러면 다들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했죠. 직접적으로 접촉하면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아요. 악행을 저지르는 건 종교 가 아니라 뿌리 깊은 문화와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봐야죠.

그렇다고 보기에 탈레반은 유독 잔혹합니다. 특히 여성과 어린아이 그리고 약자에 대해 가혹한데, 왜 사람은 여성의 배 속에서 나왔고 모두가 한때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그 사회에는 ‘약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는 걸 느꼈어요. 대부분의 탈레반은 ‘마드라사’라는 율법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요. 1996년 탈레반이 자신들의 정부를 세웠을 때 아프가니스탄 전체를 마드라사로 만들었어요. 거기엔 어린 남자아이들만 있었고, 그들의 머릿속엔 탈레반밖에 없었죠. 여성에겐 부르카를 씌우고 집에만 있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배제했고요. 제가 2001년 카불에서 여성들을 취재하며 시장에서 촬영하는데 모두 부르카를 쓰고 있으니 나중에는 누구랑 왔는지 헷갈릴 정도였어요. 그때 ‘이렇게 여성의 의상을 유니폼화시킨 것도 국가를 마드라사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죠. 취재를 마친 후 집에 데려다주려고 차에 타라 했더니 같이 온 여성들이 트렁크에 앉으려 하는 거예요. 뒷좌석에 앉으라고 했더니 “우리가 거기에 앉아도 되나요?”라고 묻더라고요. 평생 그런 대우를 받았으니 차 안에 들어갈 생각조차 못 한 거예요.

그런 여성들이 지금은 총을 든 탈레반 앞에서 거리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탈레반도 과거와 달리 여성의 인권을 보장한다고 공표했고요. 20년 전과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여성 인권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탈레반 내각에 여성은 없었어요. 부르카를 벗어도 된다고 했지만 아바야(얼굴과 손발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복장)와 니캅(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덮는 얼굴 가리개)을 동시에 쓰라고 했고요. 교육을 받아도 된다고 했지만 남녀 출입구를 달리 하고 공간을 분리시켰어요. 물론 탈레반으로서는 어마어마한 파격이긴 해요. 탈레반 내부적으로는 “우리의 변화에 세계가 놀랄 것”이라고 한다더라고요. 탈레반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국제사회에서 ‘합법 정부’로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아프가니스탄과 수교한 나라들에 자신들을 정식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죠.

실제로 탈레반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수교국인 우리나라에 대사관 재설치와 경제협력을 요구하고 있어요. 탈레반이 입국할 수 있다는 우려도 표하셨는데요.

우리나라도 아프가니스탄과 탈레반 사이에서 외교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에요. 지금 우리나라와 아프가니스탄은 수교 국가이기 때문에 탈레반을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면 단교하는 수밖에 없어요. 때문에 미래에 아프가니스탄과 어떤 외교관계를 가져갈 것인지 차원 높은 고민이 필요해요. 중요한 건 이제부터 우리 정부도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미군도 철수하면서 탈레반이 카불을 순식간에 점령할 줄은 몰랐거든요. 20년 동안 쌓아온 미군의 정보력이 성적표를 받은 셈이죠.

“취재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아이들 ‘내 아이’ 같아”

분쟁지역은 가보지 않아도 얼마나 위험할지 알 수 있다.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 모르고 누구에게 총을 맞아 쓰러질지 가늠할 수 없다. 김영미 PD는 그런 나라들로 거침없이 날아갔다. 위험천만한 취재 현장에 나갈 때마다 현지 스태프에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한국 대사관 위치를 알려주며 마지막을 부탁했다. 그렇게 현장을 누빈 덕에 국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진 분쟁지역 전문 PD가 됐다. 그 노력의 결과로 2002년 여성인권 디딤돌상, 2004년 MBC 방송대상 공로상, 2004년 일본 NTV 10대 디렉터상 등을 받았다. 그사이 아들은 성인이 됐고, 김 PD는 지금 아들로부터 누구보다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그녀는 “20년 동안 분쟁지역 전문 PD로 일하며 행복했고, 생이 다할 때 좋은 기억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일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이번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주목을 많이 받고 계신데, 어떤 계기로 분쟁지역 전문 PD가 되셨나요.

2000년 동티모르 여대생이 내전으로 희생당한 기사를 읽고 취재를 갔는데, 그때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제대로 몰랐던 것 같아요. 취재할 줄도 몰랐고, 일을 막 시작한 터라 이룬 것도 많지 않았죠. 귀국 후 초짜 PD로 돌아가 방송을 만들었어요. 2001년 아프가니스탄 취재를 하면서 조금씩 뭔가를 알아갔어요. 극단적인 상황에서 사람을 만날 때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어떤 촬영 테크닉이 있어야 하는지 등을 경험하면서 서서히 PD가 되어갔어요.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날 때는 특별한 결심이 있으셨던 건가요.

한국에 있는 모든 일을 정리하고 떠났어요. ‘인생에 한 번쯤 올인해야 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조직의 성장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나의 성장을 위해 일하고 싶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어요.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으니까 뭣 모르고 떠났던 거죠. 두 달 가까이 머물렀는데, 3주 동안 판지시르 계곡의 난민촌에 있었어요. 그때 군벌이 저지르는 만행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요. 쉽지 않은 시간이었어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아프가니스탄에서 2007년 폭탄 테러로 윤장호 하사가 목숨을 잃었고, 샘물교회 선교단이 피랍돼 살해당하는 사건도 있었어요.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적은 없으신가요.

굉장히 많았어요. 트라우마가 크기 때문에 돌아와서는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무용담이랍시고 떠들지도 않았고요. 말을 하는 도중에 트라우마를 자극해 괴로웠거든요. 가장 무서웠던 기억은 지뢰밭을 지날 때였어요. 지금도 길 가다 가끔 발을 딛는 게 불안할 때가 있어요.

여러 다큐멘터리로 실력을 인정받으셨는데요. 개인적으로 어떤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첫 작품인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저 혼자 만든 게 아니라 아프간 여성들과 같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 마음과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요. 아나운서로서 부르카를 벗고 방송에 출연했던 마리암은 결혼한 이후로 일을 나갈 수 없었어요. 마리암 이외에 테러 감시 단체인 인텔리전스에서 일하며 취재에 많은 도움을 준 친구도 기억에 남아요. 최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가 “당분간 나는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해서 참 안타까웠어요.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데, 언제 이 일을 선택한 것에 보람을 느끼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그저 대한민국 취재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요. 제가 취재한 기록과 정보가 언젠가 우리나라 여행자 혹은 사업하러 가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지금은 필요 없는 정보라도 1백 년 후에 필요한 정보가 될 수도 있고요. 특정 누군가를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오픈해서 모두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 사회에 정확한 정보가 많을수록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생각이 1순위기 때문에 분쟁지역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아요. 많은 분들이 수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수상 여부는 크게 중요히 생각지 않아요. 그래도 하나 꼽으라면 제 아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해준 ‘기자협회상’이 가장 뜻깊어요. 아들이 “엄마가 PD인데 기자들이 상을 준 건 그들로부터 인정받은 것 아니냐”고 말해서 뿌듯했죠.

2001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날 때 아들이 다섯 살이었어요. 힘들지 않으셨나요.

취재할 때 아들이 있다고 하면 그분들도 마음을 열어줬어요. 엄마로서 느끼는 감정은 세계 어디를 가도 같을 거예요. 제가 다큐멘터리에 담은 영상은 전체 여정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그곳 사람들과 공감하고 교감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여성들과 소통하려 했던 게 나머지 전부였어요. 그래서 취재 현장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 전부 내 아이 같았죠. 아들이 보고 싶을 때가 많았는데, 마침 카불 숙소 앞에 AP통신이 있어서 위성 전화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부탁해 아들 목소리를 듣곤 했어요. 이후로는 개인 위성 전화를 가지고 다니면서 통화했고요. 그런 일을 겪고 보니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의 아이들에게 우리 모두 부모가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현장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봤는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그저 버려지잖아요. 육신보다는 정신적으로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하는 취재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다녔어요.

현장에서 20년을 누비셨어요. 아직도 현장을 꿈꾸시나요.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정확한 건 없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가라고 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정보가 있다고 생각되면 갈 거예요. 물론 제 스스로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에는 과감하게 그만둘 거예요. 돌아보면 참 행복한 인생이었어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많은 사람이 응원해줬기 때문이에요. 엄청난 재산을 남기고 갈 순 없겠지만 취재진으로서 기본 의무를 다했고, 많은 이로부터 응원받았던 사람이라는 것만 남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진 홍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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