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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도전하는 삶

처참한 아프가니스탄 실상 세계에 알린 포토 저널리스트 정은진

글·김민지 기자‘동아일보 출판국’ / 사진·김형우 기자, 성종윤‘프리랜서’ || ■ 장소협찬·게코스 가든(02-790-0540)

2008. 03. 21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세계를 누비며 보도사진 전문기자로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정은진씨. 지난해 아프간 여성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을 취재, 유명 보도 사진제에서 상을 받기도 한 그를 만나 남다른 삶을 선택한 사연과 애환, 그리고 카메라 렌즈에 담은 세상 이야기를 들었다.

처참한 아프가니스탄 실상 세계에 알린 포토 저널리스트 정은진

지난해 가을 아프간 산모 사망에 관한 사진으로 세계적인 보도사진 상을 받은 정은진씨(38). 그는 전 세계 사진 관계자 18만 명이 몰려드는 페르피냥 포토 페스티벌에서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케어 인터내셔널 휴머니티 르포르타주’ 부문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국제무대에서 첫 수상의 영광을 안긴 작품 ‘카미르 스토리’는 아프간의 스물여섯 살 된 산모 카미르가 아기를 출산한 뒤 합병증으로 사망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것이다.
“산모가 27분에 한 명꼴로 죽어가는 곳이 아프가니스탄이에요. 대부분의 산모들이 남편이나 시아버지가 산모의 몸을 병원에 있는 의료진에게 보이기 싫어해 집에서 분만을 하거든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산모 사망률이 높은 그곳의 열악한 환경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사진을 찍었어요.”
그가 아프간의 시골 병원에서 만난 카미르는 결핵에 걸린 몸으로 출산까지 해 산후 합병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고 그와 만난지 2주 뒤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의 카미르가 퀭한 눈으로 시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어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광경을 사진에 담아냈다. 그것은 그가 포토 저널리스트로서 삶의 전환기를 마련하고자 아프간에서 산 지 1년 만에 거둔 결실이었다.
“뉴스의 현장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은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래가 보장된 안락한 삶을 뒤로한 채 아프간에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죠.”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던 그가 사진기를 손에 잡은 것은 3학년 1학기 때 우연히 교양강의를 들으면서였다.
“사진 수업에서 낸 과제로 칭찬을 받았어요. 제가 동양화에 재능이 없어서였는지 전공교수님들한테는 별로 칭찬을 받지 못했거든요(웃음). 그렇게 사진은 제게 좋은 취미로 다가왔죠.”

9·11 테러 목격 후 이슬람 문화에 관심 갖게 돼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는 무작정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그가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답답한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싶었기 때문.
“저희 부모님은 무척 엄해서 밤 10시가 통금시간이었어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대학 기숙사에서 자유롭게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 그래서 미국 유학을 결심했죠. 저 혼자 할 수 있는 뭔가를 향해 떠나고 싶었거든요.”
그는 부모 몰래 미국의 여러 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어 뉴욕대 사진학과에 합격했다. 유학을 통해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그가 공부하기로 선택한 것은 미술이 아닌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을 찍는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그 사진을 통해 사람들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뉴욕대를 졸업한 뒤 그는 미주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기자로 일하는 6년간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저는 항상 정체돼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매일 미국 주류 사회에 진출한 젊은 한인들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도 전 그대로였거든요. 저도 언젠가는 꼭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뉴욕대학 시절 지도교수이자 그의 사진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프레드 리친 교수는 그에게 미주리대학원에서 보도사진학에 관해 공부해보라고 추천했다. 그는 2001년 여름, 8년 동안 정든 뉴욕 생활을 마감하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미주리로 갔다. 그리고 그해 9월11일,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주리에 왔지만 뉴욕 생활이 무척 그리워서 9월 초 뉴욕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죠. 그런데 9월11일 TV를 보니 제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비행기 두 대가 뉴욕 한복판에 있는 월드트레이드센터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거예요.”

처참한 아프가니스탄 실상 세계에 알린 포토 저널리스트 정은진

그에게 9·11 테러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는 뉴욕을 제2의 고향이라 여길 만큼 그곳을 사랑했고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그는 이슬람에 관심 갖기 시작했다. 마침 그가 있었던 미주리주에는 미국 중부에서 제일 큰 이슬람 사원이 있었고 그가 다니던 학교에는 모슬렘 학생들도 있었다.
“이슬람에 대한 관심으로 방글라데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리자나라는 여고생의 삶을 포토스토리로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전 리자나가 모슬렘으로서 미국에서 어떻게 사춘기를 보내는지, 어떤 고민을 안고 사는지 있는 그대로 필름에 담았어요.”
이후 그는 자연스럽게 중동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원 봄방학을 이용해 그는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 날아갔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는 서안지구까지 찾아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직접 보고 느꼈다. 그리고 뉴스의 중심지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할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그의 마음가짐과 달리 그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원 졸업 후 LA타임즈에서 인턴으로, 또 뉴욕에서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활동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별다른 활동 없이 3년을 있게 된 것. 슬럼프에 빠진 그와 달리 프리랜서 포토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옛 남자친구 모이세스 사만은 아프간을 비롯해 이라크·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을 다니며 그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그는 더 이상 허송세월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태국·이라크·아프간 등 여러 나라를 놓고 고민하다 아프간에 가기로 결정했어요. 다른 분쟁지역에 비해 서구 언론의 관심에서 소외돼 있던 아프간의 실상을 기록하며 마음껏 사진작업을 하고 싶었거든요.”
2006년 여름, 그는 아프간 카불로 떠났다.
“탈레반이 단 5년간 점령했을 뿐인데도 아프간은 매우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시각으로 바뀌어 있었어요. 아프간 남자들은 여자들이 부르카를 하지 않고 다니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발끝까지 내려오고 시야를 가리는 부르카를 할 수 없었죠.”
그가 새로운 터전으로 삼은 아프간은 동양인으로, 더욱이 여성으로 살기 쉽지 않은 땅이었다. 거리만 나가면 그를 만지려고 하는 아프간 남성들 때문에 그는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비싼 방세에다 각종 통역 및 취재를 돕는 현지 가이드와 운전수까지 고용해야 하는 아프간 생활 유지비도 만만치 않았다. 또 돌발적인 취재상황 때문에 비싼 렌즈가 깨지고 다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여기에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탈레반 자살폭탄과 로켓 공격도 끊이지 않았다.
“처음엔 ‘쾅’하는 소리만 나도 무서웠어요. 그래도 취재를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갔죠. 나중엔 웬만한 폭발음에도 그러려니 하게 되더라고요.”
그가 살던 곳은 분명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였다. 그리고 2007년 3월 바그람 다산부대 소속인 윤장호 병장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 공군기지 정문에서 자살테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땐 한국 군인이 죽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처참한 아프가니스탄 실상 세계에 알린 포토 저널리스트 정은진

정은진씨가 직접 촬영한 아프가니스탄 현지 사진. 아프간은 전 세계 아편의 90% 이상을 공급하는 세계 최대 마약 수출국이다. 아프간 경찰이 양귀비 밭에서 마약 퇴치하는 모습(왼쪽)을 어린이들이 지켜보고(오른쪽) 있다.


한국의 한 일간지가 그에게 취재를 부탁해 사건 발생 다음 날 그는 바그람 부대로 향했다. 윤 병장의 시신은 이미 미군 수송기를 통해 쿠웨이트로 운구된 후였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언론사 최초로 바그람 부대를 촬영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7월 잠시 귀국해 있는 동안 또 한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한국인 스물 세 명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아프간에서 납치됐기 때문.
“사람들 모두 제게 그곳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사는 곳은 아프간이었어요. 남들이 저보고 어디서 사냐고 물을 때마다 전 당당하게 아프간 카불이 제 집이라고 말했어요. 그곳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전 꼭 돌아가야만 했어요.”
결국 그는 아프간으로 날아가 아프간 피랍사태를 취재해 김주선이라는 필명으로 국내에 보도했다. 하지만 피랍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한국 정부는 아프간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강제 출국하도록 조처했고 그 또한 카불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큰 상실감을 느꼈다.

“사진은 내 인생의 전부, 지금의 삶 후회하지 않아요”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갑자기 떠나라고 해서 힘들었어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6개월간 쉬면서 사진작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죠.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절대 편치 않았어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던 그는 이 시간 동안 아프간에서의 일년을 돌이켜보는 작업을 했다. 아프간에서 썼던 일년간의 일기를 묶어 책 ‘카불의 사진사’를 펴낸 것.
“아프간에서 매일 일기를 썼어요. 일기를 쓰지 않으면 제가 너무 힘들어서 이겨낼 수 없었거든요. 책을 쓴 이유는 취재기자들의 뒷이야기를 알려주고 싶었고 또 젊은 사람들에게 세계를 다양하게 바라보는 눈이 생기길 바라서였죠.”
그는 국제적인 보도사진 상을 받을 때도, 아프간 피랍사태로 한 일간지 통신원으로 활동할 때도 김주선이란 이름으로 활동해왔다. 하지만 그가 쓴 책표지에는 그의 본명 정은진, 세 글자가 똑바로 아로새겨져 있었다.
“제가 필명을 쓴 것은 부모님께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말씀드릴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많으시거든요. 하지만 평생 숨기고 살 순 없어 책을 내면서 밝히려고 결심했죠. 이제 성인이 된 딸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면 좋겠어요.”
6개월간의 휴식을 마치고 이제 다음 행선지로 떠난다는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사냐고 묻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것도, 특이하게 사는 것도 아니에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행복의 우선순위가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가족이고, 어떤 사람은 돈일 수도 있고요. 제겐 사진이 인생의 행복이자 전부예요. 그래서 지금의 제 삶을 후회하지 않아요.”
이제야 포토 저널리스트로 한 걸음 내디뎠다는 그는 다시 또 한 발자국을 떼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했다.
“처음처럼 두렵거나 떨리지 않아요. 아프간에서 맨땅에 헤딩도 해봤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낫겠죠. 제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전쟁과 가난 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여자·어린이·노인 등 소외된 약자들의 삶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예요. 미지의 땅 아프리카에서 저만의 시각으로 아프리카 문제를 사진으로 담아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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