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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따뜻한 가슴으로 나누자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치유의 말하기’ 대회

격려의 박수 치고 공감의 눈물 흘리고…

글·이남희 기자 / 사진·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2006. 10. 24

최근 올해로 4회를 맞은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피해자이면서도 숨죽여야 했던 이들이 서로 힘든 경험을 나누며 지지를 보내는 행사에 참여한 것. 성폭력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 행사의 이모저모와 성폭력 피해 상처를 극복하는 법에 대해 취재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치유의 말하기’ 대회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 행사장에서는 폭력 반대 메시지를 티셔츠에 적어 빨랫줄에 매다는 일명 ‘빨랫줄 프로젝트’가 열렸다.


피해자가 더 비난받는 속성을 지니며, 가해자는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억울해하는 범죄가 있다. 바로 성폭력이다. 가슴속으로만 아픔을 삭이던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상처를 보듬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하는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에서다.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에서는 ‘피해자’라는 말 대신 ‘생존자’란 말을 쓴다. 소극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존재로서 상처를 안고 혹은 그로부터 벗어나 살아가는 힘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지난 8월12일 저녁 서울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1백30여 명의 사람이 모인 가운데 제4회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의 특징은 지난 대회와 달리 폐쇄된 공간이 아닌 ‘운동장’이라는 공개적인 장소를 택했다는 점. 무대를 광장으로 옮긴 것은 ‘밀실에 혼자 갇혀 있지 말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피해와 분노를 외치며 아픔을 극복하자’는 의미에서다. 운동장 곳곳에 설치된 마이크를 건네받은 참가자들은 성폭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온갖 경험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초등학생 때 성폭행을 당한 후 그 상처를 털어버리지 못했어요. 제가 힘겨워하면 사람들은 ‘이제 잊어버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며 충고를 해줍니다.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저는 아픔을 감추고 괜찮은 척해요. 제가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쉬운 충고가 아니라, ‘이제까지 잘 버텨왔다’는 칭찬인데….” (생존자 A씨)
“어렸을 때부터 오빠에게 지속적인 추행을 당했어요. 그런데 가슴 만지는 정도로는 성폭력으로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가족들은 가해자인 오빠를 감싸며 아예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게 했어요. 제 고통을 어디에도 호소할 수가 없었어요.”(생존자 B씨)
“남자친구와 성적 접촉이 어느 정도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완력을 사용해 갑자기 성기 삽입을 시도한 겁니다. 저는 스스로를 ‘데이트 강간 피해자’로 정의하면서도 정작 그 피해를 스스로 설명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어요. ‘연애 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변화하는 것도 혼란스럽고, 제 성적 주체성에 대해서도 좌절하게 됐습니다.”(생존자 C씨)
어린 시절 경험한 성폭력, 가해자가 친족이기에 더욱 발설할 수 없었던 가족 구성원 내 성폭력, 대학 동아리나 직장에서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성폭력, 동성간에 일어나는 성폭력…. 성폭력 생존자들의 ‘치유의 말하기’는 은은한 달빛 아래서 자정까지 이어졌다. 마이크를 든 후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피해 생존자에게 사람들은 격려의 박수를 쳐주었고, 공감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가해자를 혼내준 한 생존자의 무용담에는 깔깔 웃음도 터져나왔다.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치유의 말하기’ 대회

참가자들은 행사에 앞서 대학로 일대에서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를 향한 메시지를 담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전 대회의 참가자들은 말하기를 통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며 다른 이들을 격려했다. 지난해 대회에서 “5년간 이어진 가해자와의 소송에서 승리했다”고 외쳤던 한 참가자는 그 뒷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5년간 잘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판결이 난 후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처벌받아야 할 가해자는 사라지고, 그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모두 발뺌하기 바쁘더군요. 제가 원한 것은 가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는 일이었는데…. 어이없는 상황에 분노를 느낍니다.”
이번 행사를 함께 기획한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민혜정 간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듣고 지지받는 경험만으로도 치유받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한다. ‘나만이 이런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도 강간, 친족 성폭력, 데이트 성폭력, 어린이 성폭력 등 수많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다양한 상처극복 노하우’를 서로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스피크아웃(speak out)’의 장점이다.
김민혜정 간사는 “앞으로 ‘집단 치유의 장’을 원하는 생존자들의 요구에 따라 한 달에 한 번씩 ‘작은말하기 대회’를 열 계획”이라며 “말하는 순간이 바로 치유의 시작”임을 강조했다.

성폭력 피해의 고통에서 치유의 길로
지난해 한국의 성폭력범죄 발생건수는 1만2천4백46건. 피해자가 신변의 노출을 꺼려하는 범죄의 속성 탓에 신고율은 연간 2~10%에 머문다니, 실제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성범죄의 70%가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데, 이 경우 피해자는 더 큰 상처를 입는다. 성폭력 피해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성적 주체성에 대한 혼란,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의 후유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성폭력 피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민혜정 간사가 ‘성폭력 피해의 고통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해 들려줬다.

자신의 상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라 상대가 있어도 좋고, 혼자 이야기해도 되고, 글을 써도 좋다. 자신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터놓고 말하라. 용기 내 말하는 순간, ‘나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꺼내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싶어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이렇게 잘 버텨왔으니 대단하다’고 칭찬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 명 이상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내게 힘이 될 사람들과 연대하라 직장 내에서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당했을 때, 피해자가 가해자와 1대 1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 권력을 지닌 가해자는 주변세력을 동원해 피해자를 ‘비난의 대상’으로 공격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믿을 만한 회사 동료, 상사 등 많은 사람과 연대할수록 경찰 고소에서도 유리해진다. 또한 동료, 친구, 지지집단의 성원을 받으면서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다.
기억을 애써 지우려고 하지도, 잊지도 말라 최선의 행동은 긴장을 풀고 기억나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 기억을 누르려고 음식이나 술, 약물 등에 의지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런 나를 받아들이고 기다려줘야 한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은 오래전에 일어났던 피해에 대한 기억일 뿐, 내게 가해를 했던 사람이 실제 지금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니다. 기억을 해방시키는 것은 피해의 또 다른 연장이 아니라 치유과정의 한 부분이다. 나의 잘못이 아니므로 결코 잊지 말라.
성폭력상담기관의 도움을 받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www.sisters. or.kr) 등 다양한 상담기관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에게 무료 상담을 해준다. 또 각 상담기관을 통해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안! ‘치유를 향한 여행길에 동행하면 좋은 책들’
비슷한 생존자의 삶 속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책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자전적 소설 혹은 에세이)

▼ ‘푸쉬’ 사파이어, 범우사
▼ ‘찔레꽃 그여자’ 박순애, 북하우스
▼ ‘세월’ 김형경, 문학동네
▼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김형경, 푸른숲
▼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 박서원, 동아일보사
▼ ‘나는 인생을 믿는다’ 사미라 벨릴, 마음산책
▼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수잔 브라이슨, 인향
▼ ‘용감한 여성들, 늑대를 타고 달리는’ 막달레나의 집, 삼인

어린이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과 같이 읽어보면 좋은 책 (어린이 성폭력에 대한 동화)



▼ ‘이럴 땐 싫다고 말해요’ 마리 프랑스 보트 외, 문학동네
▼ ‘가족앨범’ 울리케 볼얀 외, 사계절출판사
▼ ‘네 잘못이 아니야, 나탈리!’ 질 티보, 어린이작가정신
▼ ‘슬픈 란돌린’ 카트린 마이어 외, 문학동네
▼ ‘성폭력 싫어요!’ 델핀느 쏠리에르, 푸른숲
▼ ‘너는 특별하단다-작은 나무 사람 펀치넬로 이야기’ 맥스 루카도, 고슴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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