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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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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교육법’

6남매 모두 하버드대·예일대 보낸 전혜성 박사 조언

기획·이남희 기자 / 글·이주영 자유기고가 / 사진ㆍ조영철 기자

2006. 07. 14

미 국무부 차관보, 매사추세츠주 보건후생부 장관, 예일대 석좌교수…. 이 사람들이 모두 한국인이며, 그것도 한 남매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단한 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바로 전 예일대 교수인 전혜성 박사. 6남매를 모두 미국 주류사회 리더로 키운 그로부터 자녀를 글로벌 인재로 만든 특별한 교육비결을 들었다.

‘우리 아이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교육법’
전혜성 박사(77)를 만나기 전부터 살짝 기가 죽는 건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갖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6남매를 모두 미국 최고 명문인 하버드대와 예일대 출신 박사로, 미국 주류사회 리더로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 게다가 6남매를 키우면서 본인 자신도 예일대 교수로 일했다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일단 더 낳으세요. 최소 3명 이상 자식을 낳으세요.”
자식을 모두 세계적인 리더로 키운 비결을 묻는 질문에 전 박사는 환하게 웃으며 먼저 ‘다산’할 것을 권한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자식 한 명을 대학교육까지 시키는 데 최소 3억원이 든다는 통계가 있는데, 무슨 소리?’ 하는 의문이 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 박사가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 그의 교육법이 왜 ‘성공한 자녀교육의 표본’으로 꼽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전혜성 박사의 가족은 모두 하버드대와 예일대 출신으로, 가족 여덟 명이 취득한 박사학위만 해도 11개가 넘는다. 전 박사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두 번째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부군인 고 고광림 박사 역시 초대 주미특명전권공사, UN 대표, 예일대 교수를 역임한 엘리트다. 하지만 이 가족이 유명한 이유는 단순히 모두 명문대 박사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은 소수 민족과 인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왔다. 미국 교육부는 전 박사 가족을 ‘동양계 미국인 가정교육 연구대상’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MIT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장녀 경신씨는 현재 중앙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장남인 둘째 경주씨는 예일대 의대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주 보건후생부 장관을 지낸 뒤 하버드 공공보건대학원 부학장으로 일하고 있다. 셋째인 아들 동주씨는 하버드대와 MIT에서 공동으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클린턴 미국 대통령 시절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를 지내 유명세를 탄 넷째인 아들 홍주씨는 한국인 최초의 예일대 법대 석좌교수이며, 현재 예일대 법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차녀인 다섯째 경은씨는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대 법대 부교수를 거쳐 예일대 법대 석좌 임상교수로 있다. 하버드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막내아들 정주씨는 미술로 전공을 바꿔 보스턴 뮤지엄 미대와 뉴욕 비주얼 아트 대학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8명이 사는 집에 책상은 18개, 집 어디에서든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만들어
“이화여대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 온 후 이듬해 한국전쟁이 일어났어요. 장학금을 받고 오긴 했지만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연락마저 잘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요.”

‘우리 아이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교육법’

전혜성 박사 부부와 6남매의 가족 사진. 장녀 경신씨가 사진에서 빠졌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절박함 때문에 더 치열하게 살았다는 전 박사는 미국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고학생 부부인 두 사람은 공부와 육아를 치열하게 병행했다.
“여섯 명을 모두 우리 부부 손으로 키웠어요. 가정 형편상 베이비 시터를 쓸 수 없었지요. 오전에 남편이 공부하러 가면 아이를 보고 남편이 들어온 다음 공부하러 나갔지요. 거기에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까지 벌어야 했으니 사실 쉽지 않은 생활이었죠.”
그렇게 6남매를 키우며 박사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자리 잡기까지 그는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오히려 제가 바빠서 아이들이 잘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아이들에게 일일이 잔소리하며 아이들 인생에 관여할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아진 거죠.”
공부하느라 바쁜 엄마 아빠였지만, 이들 부부는 아이들이 공부할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남편은 책상을 좋아해 집안에 책상이 가득했어요. 8명이 사는 집에 책상만 18개가 넘으니 그야말로 온 집안이 도서관이었어요. 어디든 앉으면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전 박사 부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를 먼저 한다’라는 원칙만 세워놓고 다른 건 아이들에게 맡겼다고 한다. 늘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본 여섯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공부와 친해졌다고 한다.
일흔 살이 넘었지만 전 박사는 여전히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한국과 동양의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고 차세대 리더를 육성하는 동암문화연구소의 이사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 최근엔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자녀교육 에세이를 발간하기도 했다. 젊은 학자들 못지않게 왕성한 저술, 강연 활동을 펼치는 전 박사는 이 땅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한 가지 당부를 잊지 않는다.
“밥을 잘 챙겨주는 엄마도 좋지만 아이가 원할 때 식사를 미루고서라도 대화할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더 중요해요. 아이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확실한 정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바로서야 합니다.”
전 박사가 아이들을 키울 때 강조하는 원칙 중 하나는 바로 ‘자식을 위해 엄마의 인생을 희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섯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지만 학자로서 자신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몸은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선택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사회활동을 하는 엄마를 좋아합니다. 대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저는 아이들과 수업에 대해 토론했는데, ‘어떻게 법학, 의학 분야를 부모와 함께 토론할 수 있냐’며 아이들의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 박사는 이 말이 반드시 부모가 학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봉사활동을 하건, 지역사회 일을 하건 ‘우리 엄마가 집이 아닌 다른 환경에서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하고 생각할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즉 자녀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죠. 결국 아이들은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우니까요.”
봉사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것도 부모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다. 부모가 먼저 나서서 남을 배려하고 봉사한다면 아이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부모를 본받게 된다고 한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로 키우는 7가지 덕목
전 박사는 자녀들을 ‘진정한 지도자’로 키우고자 했다. 그저 높은 자리에만 오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스스로도 성취감을 높일 수 있는 ‘진정한 리더십’을 지닌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전 박사가 꿈꾸는 자녀교육의 목표였다고. 전 박사는 자녀를 ‘진정한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7가지 덕목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뚜렷한 목적과 열정을 가르치라
전 박사는 아이들에게 특별히 무엇이 되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아이들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족회의를 정기적으로 열었고 아이들은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찾아냈다.
“형제들이 많은 집이 유리해요.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 무언가를 얻으려면 그걸 얼마나 열렬히 원하는지를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알려야 해요. 예를 들어 첼로를 배우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겨우 기회를 줬는데, 아이가 몇 달이 지나도 첼로를 한 곡도 연주할 수 없다면 아무도 그의 진심을 믿어주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음번 기회는 다른 형제자매에게 돌아가는 거죠.”
이렇게 기회를 잃은 아이는 다음엔 자신이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고 한다.
▼ 맡은 바를 충분히 다할 때 자기완성도 이룬다
전 박사는 평소 자녀들에게 “당장의 이익을 쫓기보다는 신념을 갖고 자신의 맡은 일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넷째 홍주씨는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미국 주류사회의 리더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예일대 법대 학장인 것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아이티 난민과 관련된 소송으로 더 유명하다고 한다.
“예일대 석좌교수 시절, 홍주에게 아이티 난민문제 해결에 대한 의뢰가 들어왔어요. 구태여 골치 아픈 사건을 떠맡을 필요는 없었지만, 홍주는 미국에 사는 모든 소수계의 인권문제로 보고 기꺼이 그 짐을 맡았어요. 그 후 18개월 동안 목숨을 걸고 일했지요. 예일대 법대 학생들과 여러 변호사 등 총 80여 명이 홍주와 함께 2만 시간이 넘는 자원봉사를 했어요. 미국 정부를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을 한 거죠. 중간에 협박도 받았고 재판에서 질 경우 1천만 달러에 이르는 벌금까지 물어야 했지만 홍주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어요. 이 소송을 계기로 홍주는 5년 뒤 클린턴 정부의 인권 담당 차관보로 일하게 됐습니다.”

‘우리 아이 글로벌 리더로   키우는 교육법’

전혜성 박사는 “부모가 먼저 나서서 남을 배려하고 봉사한다면 아이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부모를 본받게 된다”고 말한다.


▼ 자녀의 정체성을 확립시켜라
미국에서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끊임없이 다른 문화의 사람들로부터 ‘너는 누구냐?’는 식의 질문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은 작은 어려움에 부딪혀도 쉽게 좌절하기 마련이다.
전 박사는 여섯 아이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한국문화를 적극적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한국으로 자주 여행을 떠나고 심지어 ‘고씨’ 성의 유래를 알려주기 위해 제주도 삼성혈을 방문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자란 아이들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더라도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을 부하 직원으로 거느리는 리더 역할을 해야 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럴 때 문화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면 남 앞에 당당할 수 없고 다른 문화권의 직원과 화합하기는커녕 혼란만 겪게 됩니다.”
클린턴 정부 인권차관보로 일했던 홍주씨는 43개국을 방문해 협상을 벌여야 했는데, 이때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미국 내 동양인으로서 확실한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홍주가 반미 분위기가 고조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에 가게 됐을 때 신변이 위험하다면서 모두들 말렸어요. 하지만 홍주는 반미 감정을 가진 동티모르 사람들을 향해 자기는 ‘한국계 미국인이며 자신의 부모도 공산당 치하에서 굉장한 압박을 받은 분들로 당신들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고 말해공감을 이끌어냈어요. 이런 식으로 자신의 뿌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쉽고 빨라져요.”
▼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
다섯째 경은씨는 “덕승재(德勝才)해야 한다”는 어머니 전 박사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며 자랐다. 덕승재(德勝才)란 덕이 재주를 앞서야 한다는 뜻. ‘재능 있는 사람보다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자’는 다짐은 경은씨가 전공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경은씨는 현재 유명한 아동법 전문 변호사다. 하지만 그가 전공을 선택할 때만 해도 아동법은 법조계에서 그리 인정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경은씨는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유명 로펌에 들어가는 대신 아동법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법이 성인 기준으로 마련돼 있어 힘없는 어린아이들을 보호하기 어려운 현실인 만큼, 아동법 연구가 절실하다고 느꼈기 때문. 전 박사는 돈보다 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딸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 창의적인 통합력이 아이를 살린다
전 박사는 “6남매가 다인종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얼굴색이 다른 사람을 위해 변호하고 봉사하는 것은 창의적 상상력이 발휘됐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유색 인종으로 차별받는 게 기분 나쁘다거나 동양인이니 포기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면 전 박사의 자녀들은 지금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 유연한 사고로 다양한 문화와 가치관을 흡수·통합하고 이를 자신에 맞게 창조하는 능력을 갖출 때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 세계적인 안목과 시야를 길러줘라
“아이들을 키울 때 뒷마당에 미끄럼틀을 갖다 놓고 놀이터를 만들었더니 동네 아이들이 자주 놀러 왔어요. 저와 남편은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어만 했기 때문에 아이들도 늘 한국어로 말하며 놀았지요. 어느 날 옆집에 사는 미국인 아줌마가 오더니 서투른 한국어로 운동화가 뭐냐고 묻더라고요. 자기 아이가 자꾸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알려달라는 거죠. 이처럼 아이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 정체성을 지키면서 다른 문화의 아이와 교류하는 방법을 터득해요.”
전 박사는 아이들을 다양한 여름 캠프나 학교 내 특별활동에 참가시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고 접촉하며 이해할 기회를 만들어줬다고 한다.
“동네에서 잘하면 그 동네 골목대장이 되고, 학교에서 잘하면 학교 친구들을 통솔하는 정도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사회에 진출해 리더로서 더 높이 올라가면 세계 각국에서 모인 뛰어난 사람들을 통솔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 조율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 진실한 마음을 얻는 대인관계의 힘을 경험하게 하라
“홍주는 예일대 법대 학장이 됐을 때 학교 직원 70여 명을 자기 집에 초대했어요. 그때 한 할머니가 ‘예일대에서 30년간 일했지만 학장이 자신을 초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정원사에서 경비, 비서까지 모두 집에 초대한 학장은 홍주가 처음이었다는 거지요.”
전 박사는 장남 경주씨 역시 매사추세츠주 보건후생부 장관으로 재직 중일 때 모든 곳을 발로 뛰어다니며 일했다고 전한다. 혹시나 언어장벽 때문에 소수 민족이 차별을 받을까봐 모든 법률과 정책을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로 번역해 식당 같은 곳에 대대적으로 붙이기도 했다는 것. 이렇게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할 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 힘은 진정한 리더의 자리에 오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전 박사는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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