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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화제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된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의 ‘문화적 감수성 키우는 자녀교육법’

“문화적 감수성 키우기 위해선 어린시절부터 생활 속 문화체험해야 합니다”

■ 글·이영래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3. 10. 07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자 호암미술관 관장인 홍라희 관장이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됐다. 재벌가 미술관 관장 중 유일한 미대 출신인 홍관장은 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했던 고 이병철 회장의 총애를 받으며 미술관장으로 키워진 인물. 선대의 후광을 벗고 국내 미술계의 거목으로 성장한 그의 독특한 인생 이력과 문화적 감수성 키우는 자녀교육법에 대해 취재해보았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된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의 ‘문화적 감수성 키우는 자녀교육법’

홍라희 관장(58)이 국내 미술계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90년대말 우리나라에 미니멀리즘 바람이 일어났을 때 미술계 인사들은 “서구에서 70년대에 유행한 미니멀리즘이 국내에 이제 와 유행하는 것은 순전히 홍라희 관장이 미니멀리즘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가 국내 미술계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홍라희 여사가 한국 미술계의 핵심적 인물로 부각된 것은 삼성이라는 모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든든한 구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도 큰 요인이겠지만, 이른바 ‘재벌 미술관’ 관장으로선 유일하게 미대 출신이라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미술품 애호가였던 고 이병철 회장은 미대 출신 며느리인 홍라희씨를 일찌감치 미술관장으로 점찍어놓고 트레이닝을 시켰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홍라희 관장은 일찍이 미술관장으로 키워진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홍관장은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2녀4남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는 해방 한달 전에 전주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고 홍진기 회장은 그곳에서 판사로 재직중이었다. 그의 이름 ‘라희(羅喜)’는 한자 뜻으로 보면 ‘전라도에서 얻은 기쁨’이고, 발음으로 보면 일본말로 ‘라희’의 발음이 ‘락키’인 터라 7월생인 그를 축복하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맏딸인 터라 고 홍회장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큰 그는, 자유당 초기 법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 신문로로 이사, 덕수초등학교, 경기여중고를 거쳐 서울미대 응용미술과에 진학했다. 홍관장의 집안은 그뿐만 아니라 밑의 네 남동생까지도 모두 서울대를 졸업했을 정도로 당시로서도 보기 드문 엘리트 집안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꿈꾸었지만 이건희 회장과 결혼하게 되면서 그 꿈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이건희 회장과의 결혼은 양가 부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시아버지께 처음 인사를 드린 곳이 국전 전시장이었다는 점이다. 어느날 홍관장의 아버지인 고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은 홍관장에게 “이병철 회장을 모시고 국전을 안내하라”고 일렀다. 당시 대학 3학년이던 홍관장은 국전 공예부문에 티테이블을 출품해 입선했던 터라 별 생각없이 이회장을 안내했다. 그때까지 홍관장은 그것이 며느리감을 보러온 자리였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몇달후 자신이 ‘이병철 회장의 셋째아들과 약혼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홍관장은 강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이제껏 누구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유명세를 충분히 치렀다. 누구의 며느리 소리까지 듣고 싶지 않다. 내가 선택한 남자가 성공했을 때 누구의 부인이란 소리를 듣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된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의 ‘문화적 감수성 키우는 자녀교육법’

지난 67년 이건희 회장과 결혼한 홍라희 관장은 슬하에 현재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를 비롯해 부진, 서현, 윤형씨 등 1남3녀를 두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가 내린 결혼 결정을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와세다대학 상학부를 졸업한 후 조지워싱턴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이건희 회장과 하네다 공항에서 맞선을 보게 된다. 그때가 66년 9월이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식을 올렸다.
국전 전시장에서 며느리를 처음 본 탓일까, 미대 출신이란 점 때문이었을까, 시아버지인 고 이병철 회장은 일찌감치 홍관장에게 미술관장직을 맡길 결심이었던 듯 기이한(?) 수련을 시켰다. 70년대 중반, 고 이병철 회장은 홍관장에게 매일 10만원 한도에서 인사동에서 마음에 드는 골동품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당시 시아버지의 심중을 짐작할 길 없던 그는 그저 묵묵히 민화나 토기, 자기 같은 소품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10만원은 큰돈이었지만 골동품 등을 사기엔 부족한 돈. 그래도 재주껏 이것저것 샀는데 석달쯤 지나자 집안은 온통 잡동사니 천지가 되고 말았다. 그제서야 고 이병철 회장은 “이제 됐다”고 말했다. 미술관을 세울 계획을 심중에 감추고 있던 이병철 회장은 며느리의 미술품을 보는 안목을 테스트해보는 한편, 미술품을 사는 요령 등을 훈련시킨 셈이다.
미술품 애호가로서의 안목은 이때 그의 남편 이건희 회장에게도 전수됐다. 홍관장이 미술품을 사들이기 시작하자 같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건희 회장은 호암 컬렉션의 반수 이상을 사들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미술품에 대한 애정은 곧 미술관에 대한 애정으로도 이어져 삼성그룹은 현재 용인 에버랜드에 있는 한국 최대의 사립 미술관인 호암미술관과 호암갤러리(중앙일보내), 로댕 갤러리(삼성생명본관 1층) 등을 운영하고 있다. 로댕 갤러리는 로댕의 작품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로 세계에서 열번째로 문을 연 것. 프랑스 정부가 국보급 문화재로 관리하는 ‘지옥의 문’이나 ‘칼레의 시민’같은 작품 등이 로댕 갤러리에 전시돼 눈길을 끈다.
시아버지의 뜻대로 호암미술관은 그가 맡게 되었다. 지난 92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로 참여한 그는 95년 미술관 관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96년엔 한국과 프랑스 문화교류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화훈장 1등급 ‘코망되르’를 받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홍관장은 미국 유학을 가 미대 교수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그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의 둘째딸 서현씨가 이런 어머니의 꿈을 이어받아 미술을 공부했다.

96년엔 한불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받기도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던 서현씨는 미술대회에서 몇 차례 상을 타기도 하는 등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서울예고에 진학해 미술을 전공한 그는 졸업후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스쿨에 진학해 디자인을 배웠다. 서현씨는 지난 2002년 7월부터 제일모직 안에 있는 삼성패션연구소에 근무하며 현대 패션의 흐름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고 이병철 회장 때부터 내려온 가풍의 영향인 듯, 삼성가는 미술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이라 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나아갈 바를 이야기하며 “이젠 삼성의 제품이 해외 브랜드와 비교해 기술적으로는 뒤지지 않는데, 디자인이 떨어져 경쟁력이 없다. 21세기는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세기다” 하고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는 홍관장도 마찬가지. 홍관장은 삼성디자인연구원(IDS)이나 디자인 교육기관 SADI 등을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고, 맘에 드는 옷을 산 뒤엔 그 디자인을 분석해 디자인실에 조언하기도 하는 등 많은 애정을 보여왔다. 골프의류 ‘아스트라’가 나왔을 때는 직접 골프모자의 디자인을 제안해 ‘홍라희 캡’이라는 별칭이 붙은 모자가 나오기도 했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에 선정된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의 ‘문화적 감수성 키우는 자녀교육법’

홍관장은 백남준의 뉴욕 구겐하임 전시를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게 했고, 로댕의 작품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로댕 갤러리를 세계에서 열번째로 여는 등 국내 미술관 문화 발달에 크게 기여해왔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자라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늘 아이들의 뺨을 부빌 정도로 잔정이 많은 이건희 회장은 공부에 시달리는 아들 재용씨에게 “굳이 서울대를 가야하느냐? 운동도 하면서 다양하게 살아라”고 충고할 정도로 자유방임적인 교육을 중시했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 자녀 교육의 세세한 부분은 모두 홍관장의 몫이 되고 말았다.
홍관장은 자녀들의 교육법에 대해 “아이들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퍽 자상하다. 나는 잔소리가 좀 많은 편인데 아빠는 아이 편에서 대화로 문제를 풀어간다. 그래서인지 네 남매가 모두 나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해 어떤 때는 외로움 같은 걸 느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그 또한 자녀들의 진로 선택에 있어 깊이 관여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는 미리 간섭하지 않으며 자녀들이 스스로 선택하기를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고 이병철 회장은 자녀들에게 ‘늘 검소하게 절제하며 살라’고 강조했고, 이건희 회장은 ‘남의 입장에 서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을 자주했다. 홍관장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고 삼성가의 가정 교육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다. 그는 덧붙여 “진로 선택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삼성가의 가풍상 홍관장이 딸이 미술을 선택하는 데 특별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미술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딸에게 이어졌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홍관장은 문화 교육법에 대해 언급하며 “문화를 대하는 자세는 결국 문화적 감수성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감수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길러져야 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체험한 어린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문화를 특별한 것이 아닌 그저 생활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생활 속에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재계 안팎에서는 어머니의 재능을 이어받아 미술 감각이 뛰어난 서현씨가 나중엔 어머니의 뒤를 이어 호암미술관을 맡지 않겠느냐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어찌됐건 삼성가의 미술에 대한 애정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듯싶다. 이번에 홍관장이 서울대학교가 선정한 제1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이길녀 경원대 총장과 함께 선정된 것도 미술에 대한 그의 애정을 높이 산 것. 서울대측은 홍라희 관장이 국내의 각종 문화사업 발전과 한불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하였고, 국내 최초의 대학교 미술관인 서울대학교 미술관 건립에 크게 공헌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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