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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숨겨진 사연

일본 대표선수로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딴 재일동포 추성훈

■ 기획·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 글·류재순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2. 11. 21

“꿈에도 그리던 조국이 제게 준 것은 편견과 차별뿐이었습니다”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81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일본의 아키야마 요시히로. 그는 재일동포 4세로 한때 추성훈이라는 이름의 한국 국가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9월 “좀더 좋은 환경에서 유도를 하고 싶다”며 일본으로의 귀화를 선택했다. 그가 추성훈이 아닌 아키야마 요시히로가 된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일본 대표선수로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딴 재일동포 추성훈
10월1일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경기장에서는 81kg급 결승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의 안동진 선수와 일장기를 가슴에 단 일본 국가대표 선수 아키야마 요시히로(秋山成勳·27). 두 선수는 계속 엎치락뒤치락 접전을 벌이다가 승부를 내지 못하고 경기를 끝냈다. 이제 남은 것은 심판들의 판정뿐. 관중석에서는 일방적으로 ‘안동진’을 외쳤다. 그 순간 아키야마 요시히로 머릿속에는 ‘쏴아’ 하는 회오리 바람이 비수처럼 훑고 지나갔다.
아키야마는 비록 한판승을 따내진 못했지만 안선수보다 훨씬 더 많은 공격을 했고 시종일관 경기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하지만 안선수에게는 홈팀이란 이점이 있었다.
“괜찮을 거야. 정말 이번에는 괜찮을 거야. 심판들이 모두 외국인이니까.”
이윽고 점수가 매겨진 메모를 든 주심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아키야마를 가리켰다. 그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제게는 그 순간이 가장 긴 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얻은 아키야마의 판정승. 관중석에서는 우우~ 야유가 터져나왔다. 그래도 아키야마는 자신에게 판정승이 내려진 순간 포효하듯 관중석에 있는 자신의 가족을 향해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활짝 웃었다. 그에게는 관중석의 야유조차 자신을 축하해주는 또 하나의 세리머니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위해 그는 오랜 시간을 너무도 힘들게 기다려왔기 때문이다.
아키야마 요시히로. 이번 부산 아시아대회에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했지만 불과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추성훈이란 이름을 가진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4세였다. 그런데 그가 돌연 일본귀화를 결심한 것은 고국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온갖 비애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태극마크를 단 한국 국가대표 선수가 되리라고 결심해
그는 고국의 유도선수가 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에 왔다. 부산시청에 둥지를 틀고 한국 유도선수로 첫발을 내딛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국제대회에 서 당당히 정상에 오르고 싶었던 것. 하지만 고국은 그를 따뜻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어가 서툴렀고 의식구조 및 문화적으로도 한국인들과 많이 달랐기 때문. 이로 인해 고국 동포로부터 무시와 편견,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3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그는 자신에게 ‘조국’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게 됐다. 여러 번 가족회의를 거치고 심사숙고 끝에 그는 일본으로 귀화하기로 결심했다. 가족 중 누구도 그의 귀화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아! 이제부터는 국적이라는 멍에에서 해방되는구나.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편견과 차별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구나.”
일본으로 귀화하는 날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너무도 많이 생각했고, 그만큼 충분히 아파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3년간 소속팀으로 있었던 부산시청을 떠나면서 그는 굳게 결심했다.
‘이젠 유도만 생각하자. 그동안 그렇게 짝사랑해왔던 조국이라든가 민족심, 정체성 같은 것은 이제 접어두자. 오직 젖먹이 세 살부터 해왔던 유도만을 생각하고 살아가자.’
그래서 그는 미련 없이 부산을 떠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일본 오사카로 되돌아올 수가 있었다. 귀화를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그리고 일본 국적으로 아시아 대회에 나가 그토록 염원하던 대망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으로 그는 정체성에 대한 갈등과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냥 유도인으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일본 대표선수로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딴 재일동포 추성훈
하지만 그의 금메달 획득은 한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고 그의 귀화사실은 더욱 부각됐다. 인터넷상에서는 그의 귀화에 대한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벌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 반응은 이미 각오했어요. 야유한 관중에게 섭섭한 마음도 없고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제가 국적을 일본으로 바꿨다고 해서 제가 일본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옷을 갈아입듯이 국적만 바꿨을 뿐이죠. 사람은 옛날의 추성훈 그대로예요.”
그가 금메달을 획득하자 일본 언론 역시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지난 10월2일, 아사히 신문 사회면에는, ‘가므사하므니다’라는 타이틀로 재일 한국인 4세 아키야마 요시히로가 부산 아시안게임 유도 부문에서 우승했다는 기사를 큼지막하게 실었다. 이 신문은 시합 전에도 재일한국인이 일장기를 달고 일본 국가대표 선수로서 부산 아시아대회에 출전한다고 크게 보도했다. 요미우리 신문도 그의 성장과정과 부산시청 소속 선수, 한국 국가대표 선수로 있다가 갑자기 귀화하게 된 동기, 그의 유도인생 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스포츠 신문들도 마찬가지였다.
추성훈이 유도를 시작한 것은 아직 엄마의 품속을 벗어나지 못한 세살 때. 유도 7단인 아버지 추계이씨(51)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버지 추씨는 74년 전국체전에서 재일동포 대표선수로 출전해 우승했고, 한국대표에 선발될 만큼 기량이 뛰어난 선수였다. 그만큼 그에게는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추씨는 응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일본으로 국적을 바꿔야 하기 때문. 당시만 해도 스포츠계가 재일동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편견 사회였다.
추씨는 결국 일본으로 귀화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아들 성훈에게 기대를 걸었다. 훗날 성인이 되면 태극마크를 단 한국 국가대표 선수가 되라고 귀가 닳도록 이야기했다. 뿐만 아니라 딸 정화(22)에게도 똑같이 유도를 시켰다. 추씨는 도장에 갈 때마다 이들 남매를 데리고 다녔다. 성훈은 대학시절 차세대 유망주로 각광받았다. 그런 만큼 실업팀이나 국가 대표팀에서 유혹의 손길이 그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훈은 단 한번도 일본 팀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태극마크를 단 한국 국가대표 선수가 되리라고 다짐해왔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성훈은 망설일 것도 없이 자신을 불러주는 한국의 부산시청으로 갔다. 정화 역시 부산에 있는 모 대학에 유도선수로 들어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추씨 가족은 무지갯빛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고국에서 유도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성훈이 각종 시합에 출전하면서부터 산산조각이 났다. 누가 봐도 분명히 성훈이 이긴 경기였는데도 결과는 항상 판정패였다.
“처음에는 실력이 모자라나보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죠.”
성훈의 주변에는 ‘경기에 이기고 판정에 진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성훈 대신 분통을 터뜨린 사람이 있었다. 바로 부산시청의 유종호 감독. 그는 심판들과 주최측에게 강하게 따져 물었다. ‘판정이 왜 이렇게 나오냐’고. 그들은 대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유도계는 ㅇ대학, ㅊ대학이 꽉 잡고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다른 대학 출신의 출전 선수는 확실한 한판 승부가 아니면 이기기가 어렵다고.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때부터 추씨 가족은 고민에 휩싸였다. 과거 재일동포 출신 이철씨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한 말이 떠 올랐다.
“조국이라고 찾아와 보니 감옥이었습니다.”
정말 그랬다. 온갖 유혹 다 뿌리치고 조국이라고 찾아와 보니 재일동포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훈의 좌절과 상처는 깊어만 갔다. 그러는 사이 2000년 한국 국제대회 81kg급에서 우승, 한국 대표가 될 수 있었다. 2001년에는 아시아 선수권대회, 일본 구도관배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81kg급 국제대회 우승을 싹쓸이했다. 아시아 선수권 대회는 한국대표로 출전해 우승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난해 9월에 귀화를 했다. 왜 그랬을까? 그토록 달고 싶어하던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는데 왜 구태여 일본으로 국적을 바꾸었을까? 이에 대해 그는 상당히 말을 아꼈다.
“정말 유도 때문에 귀화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한국에서 받은 차별 때문에 상처도 받았지만 전 유도만 생각했습니다. 일본 유도계 환경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요. 유도 외에 다른 생각은 안해도 되거든요.”
그가 말하는 좋은 환경이란 선수가 훈련하기 좋은 곳을 선택해 전지훈련을 하는 것. 사실 일본은 비단 유도뿐만 아니라 각 분야 스포츠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외국에서 곧잘 전지 훈련을 받는다. 이는 국제대회 어느 곳에서건 적응을 잘하기 위한 훈련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태릉 선수촌 외에는 마음대로 개인 전지훈련을 할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유도 관계자와 갈등이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귀화를 결정할 만큼 큰 갈등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귀화하게 만든 것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정화가 조국에 대해 정이 똑 떨어질 만큼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여동생 역시 추선수 못지않게 민족심이 대단했다. 그녀도 귀화하지 않고 조국에서 유도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 부산의 모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2년전 그녀가 다니던 대학 유도 코치의 남편이 그 대학 유도선수들과 함께 수영을 하다가 여학생 한명이 익사했는데, 그때 마침 정화씨가 익사 현장에 있었다.
그런데 대학 코치와 남편이 여학생이 혼자 수영을 하다가 익사한 것으로 경찰에게 진술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는 협박성 압력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후배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어떻게 교육자가 책임회피를 하기 위해 학생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때부터 노골적인 냉대가 시작된 것. 결국 이 일로 그녀는 더 이상 학교 생활을 지탱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만 입은 채 오사카로 돌아갔다. 이때 추선수의 가족들은 한국 이야기만 나와도 예민하게 반응할 만큼 큰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이번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한국과 일본 언론들이 추선수의 귀화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자 그는 곤혹스러운 듯 이렇게 말했다.
“국적이 바뀌었어도 저 자신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처음 한국에 갔을 때 많이 당황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경험이었어요. 특히 3년 동안 살았던 부산에는 친구들도 많습니다. 한일 양국의 가치관에 대응할 수 있는 적응력을 길렀기 때문에 두 나라 간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는 일본의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젠 국적문제에서 벗어나 오직 유도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듯 추성훈 선수를 아키야마 요시히로가 되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과 편견, 무시 그리고 한국 유도계의 고질병인 학연을 중심으로 한 텃세, 부적절한 판정 등이었다.
일본의 민단계 신문인 통일일보 기자 출신 김모씨는 추씨의 귀화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차라리 진작 귀화를 했더라면 맘 고생 안하고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텐데. 고국에 대한 짝사랑이 너무 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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