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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큰 스님 맑은 언행

50여년간 불우아동 2백여명 돌봐온 천운스님의 따뜻한 삶

■ 기획·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글·임소영 ■ 사진·박성배

2002. 11. 14

“어려서 가출했을 때 스님을 만나 도움을 얻었듯 힘든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플 뿐입니다” ‘아이들의 부처님’ ‘큰스님’ ‘영원한 현역’. 광주광역시 치평동 향림사 조실인 천운스님을 칭하는 수식어다. 1947년 출가한 천운스님은 지금까지 2백여명의 불우 아동과 장애인, 그리고 갈 곳 없는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봐왔다. 중학교에 가고 싶어 가출, 우연히 만난 비구니 스님을 따라 불자가 된 후 50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불우이웃과 함께해온 큰스님을 만나보았다.

50여년간 불우아동 2백여명 돌봐온 천운스님의 따뜻한 삶

그는 버림받은 아이들을 인내로써 대한다.

천운스님(73)은 ‘아이들의 부처님’으로 유명하다. 47년 출가한 후 지금까지 전쟁과 가난, 혹은 부모의 이혼 등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천운스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란 아이들은 2백여명. 비록 여러가지 이유로 버려졌지만 천운스님을 만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자라난 아이들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 교사, 의사, 사업가 등 사회 곳곳에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처럼 50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불우 아동들을 돌봐온 천운스님의 선행이 세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곧 부처를 키우는 것이지요.”
향림사에서 만난 천운스님은 아이들만큼이나 해맑은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부처의 뜻을 따르는 불자가 선행을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겸손해 했다.
1930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천운스님은 엄격한 유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났다. 해방이 되던 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에서 중학교에 보내주질 않았다. 완고한 한학자였던 할아버지가 “한학을 공부하면 됐지 무슨 중학교엘 가냐”며 진학을 반대한 것. 그래도 서당보다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그는 가족 몰래 중학교 시험에 응시했다. 결과는 합격. 그의 마음은 더욱 애가 탔다. 부모님을 설득해보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고 할 뿐이었다.
“그때 처음 가출을 했어요. 배꼽친구들이 중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는 것도 샘이 나고 제가 계속 우겨봤자 학교에 보내줄 것 같지 않아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났죠.”
무일푼으로 집을 나온 그는 무작정 정읍으로 갔다. 하지만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어 정읍시내에서 몇날며칠을 방황했다. 그래도 ‘집에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독한 마음으로 버티던 중 우연히 내장사에서 내려온 비구니 스님을 만나게 됐다.
“먹을 것을 좀 달라고 했어요. 스님은 두말없이 보따리를 풀어서 먹을 것을 나눠주더군요. 그러고는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함께 내장사로 가자고 했어요.”
그의 인생은 이날부터 새롭게 시작됐다.
“당시 내장사엔 한영스님이 주지스님으로 계셨죠. 비구니 스님 뒤를 졸졸 따라온 나에게 ‘왜 왔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학교에 가고 싶은데 부모님이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 가출했다’고 당돌하게 대꾸했죠.”
중학교 가고 싶어 가출했던 길에 우연히 비구니 스님 만나
가출한 것을 무슨 벼슬처럼 당당하게 말하던 그를 한영스님은 무척 인상깊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지스님 방에 함께 머물 수 있도록 특별한 혜택을 베풀었다. 또한 스님을 잘 시봉하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도 해주었다.
“그때부터 새벽부터 밤늦도록 스님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요. 조석예불 드리는 것부터 독경 공부하는 것, 마을 사람들에게 포교하는 것까지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변화가 느껴지더군요.”
처음엔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중학교까지 보내준다는 말에 내장사에 머물렀던 그가 점차 불가의 생활에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는 한영스님의 독경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렇게 애달플 수가 없었어요. 그동안 제 마음을 괴롭혀왔던 원망과 미움이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때 결심했죠. ‘불자의 길을 가야겠다’고요.”

이렇게 불가와 인연을 맺은 그는 한영스님이 입적한 후 강원도 평창 월정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지암스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본격적인 승려의 길을 걷게 됐다. 6·25전쟁이 터지자 군에 입대해 4년여 동안 군생활을 하고 선운사에서 지암스님을 다시 시봉했다. 지암스님이 입적한 후로는 조계산 토굴, 도갑사, 대흥사, 용암사를 전전하며 10년 동안 참선을 했다. 그리고 구례 화엄사와 해남 대둔사 주지스님을 역임했고 지난 70년 초, 당시 광주시 외곽지역인 상무대 인근에 향림사를 지어 30년이 넘도록 이곳 주민들에게 포교 활동을 펴오고 있다.
“한영스님을 통해 일주문에 들어섰다면 지암스님은 제게 수행의 불꽃을 피워준 분이죠. 이 두분 노스님과의 인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입니다.”
한영스님에게 배운 세 가지 원칙은 ‘앞만 보고 다닌다’ ‘아무데나 앉아서 먹는다’ ‘있는 대로 내어준다’이다. 내장사 아랫마을로 마실가는 것을 유난히 좋아한 한영스님은 가난한 서민들에게 인기만점이었다. 마실갈 때마다 절에서 준비한 곡식과 먹을 것을 한 보따리씩 풀어놓고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의 모습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산중에서 근엄하게 앉아있는 전통적인 스님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지암스님은 또 어떤가. “불교가 산중에만 있지 말고 도시와 농촌으로 나와서 교화사업을 활발히 해야 한다”며 그에게 불자의 권리이자 의무인 ‘포교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적인 실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복지에 있다’는 것이다. ‘청출어람’이라고 그가 불우아동을 돌보고 어려운 이웃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노스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한 것은 6·25전쟁 때부터였습니다. 제가 어렵고 곤궁에 처했을 때 스님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잖아요. 저 역시 아이들에게 같은 역할을 해주고 싶었어요.”
그는 한영스님처럼 이웃마을로 마실가기를 즐겨했다. 예전의 자신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이 없나 살펴보기 위해서다.
“부모한테 버림받거나 집을 나온 아이들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죠. 배고픔과 사랑에 굶주려 공격적이고 거칠지만 실은 누구보다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죠.”
그가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방법 역시 스승에게 배운 그대로. 예전에 한영스님이 그랬듯 절에서 가지고 온 보따리부터 풀어놓았다. 그래서 일단 주린 배를 채워준 뒤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들은 어느새 마음의 빗장을 연다. 집안형편 때문에 가출한 아이, 가정불화나 부모이혼 때문에 버려진 아이 등 가출의 사연도 가지가지다. 그렇게 한두명씩 아이들을 절로 인도하기 시작해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금껏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80년대 이전에는 가난 때문에 버려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이 아이들은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주면 금세 마음을 잡아요.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네요. 특히 가정불화로 인해 버려진 아이들은 마음잡기가 힘들어요.”
예전보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물질의 풍요를 못 따라간다는 것. 그래서 결손가정이나 미혼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이 많은 요즘 아이들 키우기가 쉽지 않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런 아이들이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는 심신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눈치를 자주 보고 손버릇도 나쁘죠.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해요.”
그럴수록 그는 인내를 강조한다. 한번 버림받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제2의 ‘아버지’를 자청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오래 참음’이라는 것.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가끔은 불전함을 훔쳐서까지) PC방으로 가는 것을 보고 아예 절에서 컴퓨터게임을 하라고 컴퓨터 10대를 사다주었다. 그래서 요즘은 아이들이 절에서 밤늦도록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또한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물놀이나 붓글씨 등 별도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아이들 교육엔 매보다는 말,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고예요. 어른생각에 아이들에게 해롭다 싶은 것도 아이가 가지고 싶어하면 사주고, 스스로 그 해악을 깨닫게 하는 것도 괜찮아요. 조급한 것은 항상 어른들이지 아이들이 아니거든요.”

이처럼 “사람 하나하나를 귀히 여기고 길러야 한다”는 인권과 교육에 대한 그의 투철한 믿음이 불우한 가족사로 인해 버려진 2백여명의 아이들에게 새 희망을 심어주었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이중 10%는 예전의 자신이 그랬듯 출가 수행자가 되어 그의 뒤를 잇고 있다. 현재 향림사에는 37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구김살 없이 자라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 10명은 동국대와 승가대에서 예비불자의 길을 가고 있다.
“70년대만 해도 절들이 대부분 불공 중심이었어요. 법문이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져 신도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니 맹신에 가까울 수밖에요. 또한 신도 대부분이 할머니들이었고요.”
이 같은 현상을 바꾸기 위해 그는 청년들과 아이들이 법회에 친근해질 수 있도록 직접 찬불가를 만들어 불렀다. 어린이법회, 중고등학생회법회, 대학생법회를 만들어 불교와 맺어주고 수련회도 직접 주관했다. 쉬운 말로 법문을 했고 한글경전 읽기를 권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시간을 신도들과 만나는 데 보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일일이 마음을 위로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다보니 향림사에는 3대가 함께 신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4대가 다니는 사람도 있다. 모두들 그를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고 고민을 이야기한다. 칠순이 넘은 지금도 그는 각종 법회를 자상하게 돌보고 한달에 20여일을 전국 법당을 돌며 법문을 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를 일컬어 ‘언제나 현역’ ‘실천하는 큰스님’ 이라며 존경을 표하고 있다.
천운스님은 무엇보다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하다. “일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는 자는 주지가 될 자격이 없다”며 수행과 공부를 동시에 강조한다. 대부분의 중진 원로스님들이 ‘대학에 가고 현대식 교육을 받으면 환속하기 쉽다’며 스님들의 교육의지를 꺾을 때도 그는 전통적 수행도 중요하지만 현대적 교육도 중요하다며 동국대나 승가대에 진학하기를 적극 권장했다. 또한 기회가 닿는 대로 외국 유학도 보내주었다. 비록 다른 문중의 스님일지라고 인연이 있거나 공부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으면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다.
불자들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킬 수 있게 납골당 짓고 싶어
이처럼 스님의 높은 교육열 덕분에 향림사는 산중에 있는 절과는 달리 부속기관이 많다. 광주 불교 교양대학, 불교대학원, 정광학원, 그리고 향림 어린이집과 유치원까지 남녀노소 모두 이곳에서 하루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다. 또한 장애우들을 위한 장애인복지관과 갈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노인복지관 등 복지시설도 갖추고 있다. 특히 향림사 내 부속시설에 근무하는 50여명 직원들은 자녀들의 학비걱정을 하지 않는다. 교육을 강조하는 스님이 학비일체를 대주기 때문이다. 직원 자녀 교육비와 이곳에서 기거하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한해 교육비가 만만치 않지만 스님은 전국사찰을 돌며 법문한 후 받는 여비와 평소 검소한 생활로 이 돈을 충당하고 있다.
“앞으로 숙원사업이 있다면 불자들을 위한 납골당을 만드는 것이에요.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편안하게 마련해놓아야 비로소 제 역할을 다한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는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3천여평의 땅을 구입해 건물 신축문제로 현재 화순군과 협의중이다. 출가 후 지금까지 ‘아이들의 부처님’으로 불우 아동을 보살피고 장애우와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해온 천운스님. 이제는 불자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납골당을 준비하고 있는 그의 삶이 더욱 빛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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