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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최미선기자의 여행스케치

<야인시대> 촬영지로 떠나는 ‘백 투더 타임’ 여행

■ 글·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사진·박해윤 기자

2002. 11. 11

경기도 부천시에 1930년대 종로거리가 옛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인기를 모으고 있다. 주먹 하나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김두한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 <야인시대> 세트장이 바로 그곳. 11월 초 정식으로 개방하여 일반인도 드라마 촬영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옛 종로거리를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 있다. 어른들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아이들에겐 새롭고 신기함을 안겨주는 30년대로의 백투더 타임 여행 체험.

 촬영지로 떠나는 ‘백 투더 타임’ 여행

건달, 협객, 풍운아, 야인… 김두한에게 따라다니는 별칭은 많기도 하다. 때론 무모하지만 불의 앞에서 언제나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용기로 보통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던 그가 다시 돌아와 세상을 흔들고 있다.
요즘 드라마 <야인시대>를 모르면 간첩(?)이라나? 직장인들 술자리에선 야인시대 주먹들의 얘기가 일등 안주거리인데다 청소년들 사이에선 ‘긴또깡(김두한의 일본식 발음)’ ‘쌍칼’ ‘하야시’ 등이 인기 있는 별명으로 떠오르고, 드라마 방영시간 대엔 거리가 썰렁해진다고 하니 열풍은 열풍인 모양이다.
그동안 영화, 드라마, 소설, 만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등장했던 김두한. 이제는 식상할 법도 하련만 ‘김두한 시리즈’가 여전히 인기를 끄는 비결은 뭘까?
<야인시대> 작가 이환경씨는 “김두한은 말 그대로 야인(野人)”이라고 단언하며 “야성이야말로 인기의 요인”이라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권력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언제든 이로부터 뛰쳐나올 수 있는 자유로움과 주먹, 의리, 정의 등 매력적인 요소를 갖춘 인물로 점점 왜소해지는 요즘 사람들에게 그의 거칠 것 없는 야성과 어떤 상황에서든 의연할 것 같은 강인함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거라고 한다.
자동차를 한 손에 들 만큼 힘이 장사라는 구마적을 우미관 뒷골목으로 불러내 ‘아침밥도 못 먹는 애들을 때리는 사람을 선배로 여길 수 없다’며 두발차기 단 한방으로 쓰러뜨리고, 종로거리에서 칼을 들고 덤비는 10여명의 일본 하야시 패거리를 단숨에 해치우고, 한국사람을 못살게 구는 종로경찰서 형사를 보기좋게 때려눕히는 그의 실력에 다들 혀를 내두를 수밖에.
<야인시대>는 이처럼 내용도 시선을 끌지만 종로를 중심으로 김두한이 누비고 다녔던 30년대의 서울거리를 재현한 촬영 세트장도 관광명소로 떠오르면서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우미관, 순수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돼 일제 강점기 조선인 상권의 상징이었던 화신백화점, 당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를 비롯, 1백50개가 넘는 건물에 파고다공원, 5일장터 등 당시 사람들이 자주 찾았던 명소가 고스란히 살아나 나이 든 사람들에겐 과거의 서울을 회상하는 추억의 장소로, 아이들에겐 신기하고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경기도 부천시 상동에 위치한 <야인시대> 촬영무대는 찾아가는 길도 아주 쉽다. 서울외곽순환도로(판교 방향) 중동인터체인지를 빠져나오다 보면 오른쪽에 마련된 세트장이 바로 보이기 때문.
1만여평의 부지에 추억 어린 30년대 건물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야인시대> 오픈세트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대략 40억원. 비용이 가장 많이 든 건물은 지금의 국세청 자리에 있던 5층짜리 화신백화점(5천여만원)이라고 한다. 세트장 부지 및 건립비는 모두 부천시에서 투자한 것으로 영화제 개최 등 영상도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부천시가 장기적인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하고 있는 영상문화단지 안에 있다.

세트장에 들어서니 완전히 ‘딴 세상’이 펼쳐지면서 뭐랄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몇 걸음 안 가서 가장 먼저 펼쳐지는 거리는 종로통. 화신백화점 앞에 서 있는 전차(배터리로 작동되는 전차는 평소에는 ‘쉬다가’ 촬영이 있는 날에만 움직인다고 한다)를 보니 기자 역시 어릴 때 타보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잠시 아련한 향수에 젖기도 했다.
유치원생들이(유치원이 열 군데는 충분히 넘는 듯했다) 올망졸망 줄을 서서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저마다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니 마치 살아있는 학습장 같은 느낌이다. 또한 여기저기에서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감회가 새로운 듯 찬찬히 둘러보는 모습도 보인다.
“이봐. 이 청계천 다리 밑 판자촌을 보니 가슴이 찡하네. 예전엔 정말 가난하게 살았잖아. 아, 이 다리 밑에 거지들이 얼마나 많았어.”
“그러게 말이여. 저 풍미당 빵집이나 우미관도 옛날 모습 그대로네.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건물 하나하나, 거리 한군데 한군데 지나면서 옛시절을 떠올리며 얘기를 나누다 눈시울을 적시는 노인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비교적 널찍한 종로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형성된 골목길로 들어서면 30년대 모습이 더욱 사실감 있게 펼쳐진다. YMCA 건물 1층에는 김두한의 아지트였던 종로회관의 내부를 재현했고 빵집으로 유명했던 풍미당, 비단가게, 이불집, 포목점, 주막집, 팥죽집, 김두한이 즐겨 들렀다는 설렁탕집, 한약방, 전당포… 거리마다 촌스럽고 낯설게 느껴지는 간판과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모습이 참으로 독특한 느낌을 준다.
뿐만 아니라 “참 좋은 세상이구려. 백인(백명)이면 백인이 모다(모두) 희망하고 있는 독특한 약 출현. 무좀의 뿌리를 뽑는 세계적 무좀약 모두좀”이라는 문구와 함께 허름한 이불집 벽에 붙어있는 무좀약 광고 포스터는 웃음을 자아내는 동시에 당시의 시대 상황을 말해주기도 한다.
극중에서 한바탕 격투를 벌이는 단골 장소로 나오는 우미관의 모습도 이채롭다. 요즘 극장에 걸리는 영화 간판은 마치 사진처럼 얼마나 정교한가. 하지만 이곳에 걸려있는 배우의 그림을 보면 이를 테면 ‘신성일’인지 ‘신송일’인지 도통 알 수 없을 만큼 엉성하고 촌스러운 모습(우미관에 걸려있는 간판도 미국 영화배우 게리쿠퍼라고 하지만 게리쿠퍼가 보면 울고갈 일이다)이지만 오히려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매표소에 관람료를 일일이 적어놓은 모습도 재미있다. 특등석 1원50전, 1등석 1원, 2등석 60전, 3등석 40전. 요즘은 어느 자리든 상관없이 같은 요금을 받는데 그 시절에는 자리에 따라 요금이 달랐던 모양이다.
청계천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어릴 때 어른들로부터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소리 하나, “너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그만큼 서울사람들에게 청계천은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수표교, 졸졸졸 물도 제법 흐르는 청계천 다리 밑으론 거지들의 아지트였다는 허름한 판잣집도 보인다.
이곳에선 보통 1주일에 3일 정도 드라마 촬영이 이루어진다. 기자가 갔던 날에도 <야인시대> 촬영이 있던 터라 군데군데 거지 차림을 한 아이들, 도포에 갓을 쓴 노인들, 한복차림에 쪽진 머리를 한 아낙네들, 검은 양복에 중절모를 쓴 청년들의 모습도 보였다. 막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해 쉬고 있는 출연진을 붙잡고 여기저기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간간이 보인다. 꽤나 익숙한 태도로 사진촬영에 임하는 출연진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한두번 찍혀본 게 아닌 듯싶다.
취재 당시(9월 말) 촬영장을 정식으로 오픈한 상태가 아님에도 세트장 안은 생각보다 붐볐다.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온 사람들을 매정하게 돌려보낼 수 없어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입장시켰다는데, 이곳을 찾는 관람객 수는 평일엔 1천명에 이르며 주말에는 무려 1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10월초부터 한달여 동안은 관람객 출입이 전면 금지된다. 기존의 세트장을 좀더 손보고 주차장 공사를 마무리한 후 11월 초에 정식으로 오픈할 예정이기 때문. 지금까지는 드라마 촬영을 위한 세트장만 달랑 들어선 상태였기에 이색적이긴 하나 사실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주차장도 제대로 만들지 않아 흙먼지가 펄펄 날리고 목이 말라도 음료수 하나 사 먹을 곳도 변변하게 없었던 것.

그동안은 무료로 개방했지만 공식 오픈하게 되면 시설관리비용 차원에서 입장료(3천원 정도)를 받는다. 모든 건물이 가건축물이다보니 바람이 분다거나 비가 오면 간판이 떨어지고 건물 자체가 망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손볼 곳이 많다는 것.
대신 지금처럼 세트장만 달랑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각종 이벤트 프로그램을 같이 선보일 예정이다. 이를테면 ‘야인시대 퍼레이드’ 라는 이름으로 극중에 나오는 인물들을 분장시켜 보여주고 김두한이 상대방을 물리치는 모습을 본떠 액션 장면도 보여줄 참이다. 뿐만 아니라 김좌진 장군과 김두한에 관한 실제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김두한의 딸 김을동씨와 협의중인 상태다.
아울러 패스트푸드 개념이 아니라 30년대 당시의 음식점 모습 그대로 꾸며놓은 곳에서 옛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주먹밥, 국밥 등을 맛볼 수 있게 된다. 또한 드라마 촬영시에만 움직이던 전차도 관람객을 위한 이벤트로 직접 타고 돌 수 있게 하는 것도 구상중이라고 한다. 한번에 40명을 태우고 달리는 전차의 속도는 시속 20km.
1백부작으로 방영되고 있는 <야인시대>는 내년 7월까지 촬영이 지속돼 세트장에 오면 촬영현장을 엿볼 수 있는 재미도 주어지고 드라마 촬영이 없는 날에는 뮤직비디오나 CF 촬영이 이루어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울러 내년 6월까지는 1만평의 부지에 세계 유명건축물을 미니어처로 제작해 전시하는 ‘월드빌리지’를 갖춘 테마파크도 선보이게 된다.
이곳은 뭘 먹으러 온다거나 타러 오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놀러온다기보다 전체적으로 그 시대를 느끼면서 옛시간을 더듬어본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 1주일 만에 건물이 여러 개 생겼다 없어지고 소품도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한번 보고 마는 곳도 아니다. 아흔아홉칸짜리 집도 2박3일이면 완성되는데 어차피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좋은 재료로 지을 수는 없지만 한옥 기술자들이 충청도에서 올라와 실제와 똑 같은 기법으로 지어 자료적 가치로도 충분하다는 것.
어쨌거나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부천의 명물이 될 <야인시대> 세트장은 가족과 함께 찾아볼 만한 매력적인 곳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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