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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물 & 화제 │ 이제야 밝혀진 사연

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미당과의 각별한 인연, 북쪽 가족에 대한 그리움, 그 동안 겪은 고생… 이제야 말합니다”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지재만, 조영철 기자

2002. 10. 09

우리 민족의 애환을 서정적인 민요조 운율에 담아낸 시들로 당대는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시인’ 김소월.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여 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행사들이 열리는 가운데, 남한 내 소월의 유일한 유족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3남 김정호씨와 자녀들을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젊어서 고생했다는 김정호씨는 아들 영돈씨와 며느리, 두 손자와 다복하게 살고 있다.

우리나라 시인 평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꼽은 김소월. 소리 내어 읽기 좋은 가락 위에 평이한 언어로 깊은 시상을 드러내는 소월의 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평북 출생으로 남한에 이렇다 할 연고지가 없는 소월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념사업회나 단체가 없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남산에 소월의 이름을 딴 ‘소월로’와 ‘시비’ 정도가 그를 기리는 상징물 정도일까. 이는 소월과 마찬가지로 올해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하는 정지용 시인의 경우와 퍽 대조가 된다. 정지용 시인은 고향인 충북 옥천의 자치단체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문학예술제 등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것.
이런 상태에서 남한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소월의 아들과 손자들의 근황을 전하는 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소월의 유족들은 의외로 취재를 반기질 않았다. 그간 ‘미당이 소월의 후손을 먹여 살렸다’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등의 과장된 보도에 마음이 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확한 기사’를 약속하고서야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소월은 부인 홍실단과의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3남 김정호씨(70)만이 남한에 생존해 있다. 현재 김씨는 부평에서 아들 영돈씨(41·대건정보기술 대표)와 며느리 이진옥씨(36), 그리고 규형(10), 도형(7) 두 손자와 함께 살고 있으며, 딸 은숙씨(43)는 충남 온양 송악 저수지 부근에서 ‘송일정’이라는 음식점을 경영하며 아들 하나를 두고 살고 있다고 했다. 기자는 아들 정호씨와 그의 가족들을 만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제 나이 세살 때 돌아가셨어요. 제 위로 구생, 구원이라는 누님이 두 분 계셨고, 큰형님 준호, 둘째형님 은호, 그리고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 낙호와 제가 있었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저와 동생 손을 이끌고 본가로 들어갔지요. 아주 억척스러운 분이셨어요.”
정호씨가 19세 되던 해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으로 남하한 그는 참전한 지 얼마 안돼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인천 형무소, 부산, 거제도 포로 수용소를 거쳐 반공포로로 남한에 남게 되었다. 석방 후에는 전남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당시는 그의 말마따나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바뀌던” 극심한 좌우대립의 시기. 남하한 지 2년 후에 그는 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55년 만기제대한 정호씨는 혈혈단신으로 연고지 없는 서울땅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보직은 교통부 자재부서의 임시직. 3년여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평생의 반려자가 될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리고 58년경 사글셋방에서 근근이 살고 있는 정호씨를 안타깝게 여긴 외가 쪽 친척의 말에 따라 당시 동아일보 사회부 박현태 기자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이 ‘소월의 친자’임을 밝혔다.
19세에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혈혈단신 남쪽에 남아 고생 많이 해
“이북 5도도민회, 직장 할 것 없이 다각도로 확인하더군요. 그래서 맞다는 걸 확인한 후 기사가 나갔지요. 그랬더니 문인들과 출판사 분들이 저를 찾아오고 그랬습니다.”
당시는 저작권이나 인세가 제도적으로 잘 보장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음사와 같은 출판사에서는 소정의 ‘사례금’을 전달하며 ‘소월의 아들’에게 미안함을 전할 뿐이었다. 당시 기억 나는 일화 중에 하나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를 노래로 만든 작곡가가 그를 찾아왔던 일이다.
“아버지의 시는 노래로도 많이 만들어졌잖아요. 전 아버지의 시중에서도 ‘부모’를 가장 좋아해요. ‘낙엽이 우수수~’ 하는 거 있잖아요. 노래 부를 자리가 있으면 항상 그걸 부르지요.”
그후 재단법인 홍익회에서 4년을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나와 얻은 직업은 레코드 외판원. 성문사에서 발매하는 <가요 60년사>라는 레코드판을 방문 판매하러 다녔다.
“나름대로 열심히 해도 외판일이라는 게 크게 돈이 되지는 않잖 아요. 그러던 중 평소 안면이 있던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이 일을 아시고, 마음 아파하시면서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소월의 손녀’ 은숙씨는 자신이 경영하는 식당에 훈장을 진열해 두었다.

당시 미당은 “소월의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남쪽에서 외판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북한이 안다면 얼마나 악선전에 이용하겠느냐”면서, 당시 예술원 회장직을 맡고 있는 월탄 박종화, 시인 구상과 함께 추천서를 만들어 이효상 국회의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석달 후 정호씨는 국회의사당 총무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8년 가까이 성실하게 근무했으나 아내의 신부전증이 악화되자, 치료비 마련을 위해 퇴직금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직장을 그만뒀다. 그 후 홍익회로 다시 재취업,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그곳에서 근무를 했다고 한다. 결혼 후 스무번도 넘게 이사를 다닐 만큼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었다. 딸 은숙씨는 그때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혈혈단신이셨으니 의지할 곳도 없고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하지만 너무 성품이 맑으세요. 아기 같은 분이에요. 누굴 짓밟고 올라가거나 하는 건 꿈에도 못 꿀 양반이세요. 그래서 아마 손해도 더 많이 보셨을 거예요. 아버지는 아코디언, 그림, 서예, 글… 뭐든지 잘하세요. 젊어서 고생만 안 하셨다면 나름대로 그쪽 분야로 나가셨을 텐데, 속상해요. 아버진 지금도 일기를 쓰고 계시거든요? 아버지 필체를 볼 때마다 전 깜짝 놀라요. 할아버지 육필과 너무 유사해서 말이지요.”
식당 곳곳에 김소월이 남긴 육필 원고를 액자로 만들어 진열해둔 은숙씨가 글씨를 손으로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신부전증으로 아픈 아내를 성심껏 간호했던 성품 따스한 소월의 아들
정호씨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소월에 얽힌 직접적인 추억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나 어머니 홍여사로부터 가끔씩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진 당시 동아일보 지국장이셨잖아요? 남 보기엔 깐깐해보이는 양반이었다는데, 어머니에게는 안 그랬대요. 아주 잘하셨죠. 두 분이 반주 삼아 술도 잘 하셨고요. 원래 어머니 존함이 홍상일인데, 여자이름으로 안 좋다고 ‘실단’으로 지은 게 아버지세요. 가끔 시를 보고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다른 여자는 없었어요.”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는 소월을 닮아설까. 정호씨 역시 아내 사랑이 끔찍했다고 자식들은 입을 모은다. 며느리 이씨의 경험담. “아버님이 몸이 아프신 어머님께 하시는 행동이 그렇게 극진할 수가 없었어요. 짜증내는 거 다 받아주시고, 잡숫고 싶다는 거 어떻게든 구해서 가져다주시고요. 어머님 씻겨드리는 거나, 밤새 주물러주시는 건 모두 아버님 몫이었지요. 그래서 하루는 제가 여쭈었어요. ‘아버님은 어떻게 그렇게 어머님을 위하실 수 있어요?’ 그러자 아버님이 그러시더군요. ‘나는 결혼할 당시에 이 사람을 평생 사랑하기로 서약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켜서야 되겠느냐’고요.”
정호씨의 아내는 순천향병원에서 혈액 투척만 무려 8년을 받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딸 은숙씨도 “부부간에 금슬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아버진 지금도 가끔 엄마 꿈을 꾸신다고 하더군요”라며 부모님 사이가 각별했음을 전했다.
영광스럽기 때문에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이름 ‘김소월’. 남한의 혈육에게 그 이름은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부담감을 느끼게 한 이름이었다.
“소월의 자식이라는 게 영광스럽지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어요. 제가 아버지 뒤를 잇고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 모임이나 술자리에 가도 늘 처신에 신경써야 했죠. 선친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요즘도 친구들과 여행이라도 가면, 친구들이 꼭 ‘김소월 시인의 아들’ 운운하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요. 그럴 때마다 친구들을 막 나무랐어요. 왜 그런 소릴 하냐고.”

소월 탄생 1백주년 맞아 돌아본 ‘소월의 아들’ 김정호씨 가족의 근황

소월의 유고시.

정호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들 영돈씨도 말을 거들었다.
“저 역시 자랑스러운 마음이 왜 없겠어요. 저도 원래 문학을 하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할아버지라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느낀 다음 그냥 포기했어요. 그만큼 후손에겐 어려움이 있어요.”
어려서부터 무슨 기념일만 되면 카메라를 들고 막무가내로 몰려오는 취재진들에게 시달렸다는 영돈씨는 “아직 어린 아들들은 증조 할아버지가 위대한 시인이라니까 그저 좋아만 해요. 하지만 전 자식들이 있으니까 이제 더 신경이 써져요. 특히 과장 보도된 기사를 보면 화가 나고요”라고 말했다.
과장되게 보도된 내용 중 하나는 미당 서정주와의 인연. 물론 미당이 ‘소월의 아들’인 정호씨를 각별하게 챙겼고, 또 그 자식들인 영돈, 은숙씨를 예뻐한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러나 은숙씨의 고등학교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거나, 마치 ‘소월 일가’를 먹여 살린 것처럼 보도된 건 지나치다는 것.
“망둥어 낚시를 같이 다니기도 하고, 명절이면 세배 가고 그랬지요. 우리 아들을 보면 늘 할아버지를 쏙 뺐다고 입버릇처럼 그러셨고요. 딸이 결혼할 땐 주례도 서주셨지요. 그런데 어느 해인가 수해를 입었을 때, 힘 내라고 쌀 한 가마니 보내주신 적이 있는데, 그게 마치 먹여 살린 것처럼 부풀려진 겁니다.” 정호씨의 회고다.
미당이 주례를 섰던 딸 은숙씨는 미당이 세상을 떠나기 두 해 전에 남편 김원배씨와 함께 찾아간 일을 떠올렸다.
“고기를 잔뜩 준비해갔는데 고기는 안 먹는다고 하시더군요. 당시엔 죽만 드셨나 봐요. 그래서 산나물을 보냈는데, ‘이렇게 많이는 못 먹으니 자네들이 먹게’ 하시더군요.”
정호씨는 우리나이로 일흔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운 건 북의 가족들일 수밖에 없다. 81년 10월 김소월 시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될 당시, 신문을 통해 가족들 소식을 간신히 알 수 있었다. 동생 낙호는 설계기사로 둘째형 은호는 중공업청 간부로 있다고 하는데, 그후 동정은 전혀 모른다. 그동안 수차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음에도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2년 전 방북 신청서를 작성했는데 여태 안되네요. 우리 고향이 곽산면 남단동인데, 그 밤나무 숲이 눈에 선해요. 보고 싶지요, 정말….”
변변한 소월 기념사업 하나 없는 게 안타까워
소월의 유족들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건 소월이 ‘국민시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이름을 단 조촐한 문학관 하나 없다는 점이다. 비록 북쪽 출신 문인이라 자료가 적고, 기념사업이라는 게 워낙 돈이 들지만 말이다. 정호씨는 뜻 있는 독지가나 국가가 나서주지 않는 한 영영 요원한 일이 아닐까 걱정스러워했다.
“10년 전에 정길복 선생이라고, 라이온스 클럽 회장을 하셨던 분이 소월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그 분이 정계, 문학계 열심히 뛰어다니며 약 10억원을 기탁금으로 모으셨거든요. 그런데 덜컥 지병으로 쓰러지시면서 사업이 무산됐어요. 인계자가 나와주질 않아 기탁금은 전부 반환했고, 결국 유야무야 되어버렸어요. 돌이켜보면 마음만 아프지요.”
올해는 소월이 탄생 1백주년을 맞은 해.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는 9월 26, 27일 탄생 1백주년을 맞은 김소월, 정지용, 나도향, 주요섭, 채만식 등 6인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심포지엄을 연다. 또한 9월27일 시인들의 시와 산문 낭송 대회가 열리는 ‘명동 문학카페’ 행사에 6인의 유가족을 초청한 상태다.
중요한 건 이런 행사가 ‘반짝 행사’로 끝날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소월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평생을 어렵게 살아온 정호씨와 그의 가족들에게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정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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