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럭셔리한 슈트 차림으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마크 저커버그(왼쪽 두 번째). 왼쪽은 보테가베네타
니트 투피스를 입은 아내 프리실라 챈. 오른쪽은 아마존 CEO 제프 베이조스와 그의 여자친구 로렌 산체스.
실리콘밸리의 몇몇 성공한 사업가에겐 ‘괴짜 조상’ 아인슈타인에게서 물려받은 전통이 있다.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데 쓰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한 가지 스타일의 의상을 고수한 것. 아인슈타인의 허름한 단벌 양복은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의 검정색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 메타 창업주 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 엔비디아 창업주 젠슨 황의 가죽 재킷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저커버그는 2012년 “내 인생에서 어리석거나 경솔한 일에 에너지를 쏟으면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고 설명하며 페이스북 본사 서랍에 똑같은 티셔츠 20장을 보관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 마크 저커버그가 후줄근한 너드 스타일의 회색 셔츠를 벗어던지고 ‘억만장자 상남자’ 스타일로 변신, 스스로 실리콘밸리의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무너뜨리고 있다.
요즘 저커버그의 인스타그램은 IT 회사 경영인이 아닌 패션 인플루언서 계정처럼 보인다. 지난해 2월 전용기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부티’ 나는 양가죽 시어링 코트를 입었다. 3월 아내 프리실라 챈과 함께 인도 재벌 아난트 암바니의 결혼식 전 파티에 참석했을 당시엔 부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했다. 저커버그는 황금 잠자리가 수놓인 알렉산더맥퀸의 슈트에 로퍼를 매치했고, 프리실라는 가슴 부분을 황금색으로 장식한 알렉산더맥퀸 드레스에 까르띠에 목걸이와 브레이슬릿을 착용한 것. 부부가 입고 걸친 것만 해도 5억 원 상당이다. 지난여름에는 스페인 휴양지에서 발망 셔츠를 입고 휴가를 보내는 모습이 포착됐다. 4000억 원짜리 초대형 요트를 구매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인도 재벌 아난트 암바니 결혼식 전 파티에 참석한 저커버그 부부. 각각 알렌산더 맥퀸의 슈트와 드레스를 입었다.
300조 원 이상을 가진 자산가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브랜드가 드러나지 않는, 무난하다 못해 지루한 스타일을 즐기던 부부의 ‘시끄러운 럭셔리 패션’은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들 부부는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고급스러운 정장을 차려입었다. 저커버그의 슈트와 코트 브랜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프리실라는 이탈리아 브랜드 보테가베네타의 페일 블루 컬러 니트 카디건과 스커트 셋업에 알이 굵은 진주 목걸이를 매치했다. 심지어 스스로 브랜드를 노출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한 기자가 그가 입은 셔츠를 두고 “LVMH 계열사 로로피아나의 제품”이라고 쓴 기사에 “미국 클래식에 중점을 둔 로스앤젤레스 브랜드 벅메이슨의 크루넥”이라고 직접 정정 댓글을 단 것이다.
격투기로 벌크업, 명품으로 치장해 더 강하고 패셔너블하게

요즘 그는 격투기와 서핑을 취미로 삼고, 체인 목걸이를 하는 등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있다.
겸손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던 저커버그의 스타일에 변화가 시작된 건 불혹(不惑)을 맞은 지난해 초부터다. 학생처럼 바짝 깎은 머리를 고수하던 그는 곱슬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브루넬로쿠치넬리의 회색 티셔츠 대신 다양한 명품 브랜드의 갖가지 컬러 셔츠로 옷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는 개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레터링 티셔츠와 블링블링한 액세서리로 스왜그를 과시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 메타의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에선 ‘AUT ZUCK AUT NIHIL’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나왔다. 고대 로마 황제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최고 통치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를 표현할 때 썼던 라틴어 문구 ‘카이사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Aut Caesar aut nihil)’에 카이사르 대신 자기 이름의 일부(Zuck)를 넣어 존재감을 과시한 것이다.
지난 1월 7일 메타의 팩트 체크 종료를 선언하는 영상에는 금색 펜던트가 달린 체인 목걸이와 함께 스위스 시계 브랜드 그뢰벨포시의 핸드메이드 1을 차고 등장했다. 이 시계는 1년에 2~3개만 제작되는 제품으로, 가격은 90만 달러(약 13억 원) 상당이다. 지난해부터는 파텍필립, F.P.쥬른 등을 찬 저커버그의 모습도 포착됐다. 그는 패션 스타일뿐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전반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하와이에 지하 벙커가 딸린 3500억 원짜리 대저택을 짓는가 하면, 아내에겐 커스터마이징한 포르쉐를 선물한 뒤 SNS에 공공연히 자랑했다. 그는 주짓수와 격투기로 신체를 단련하고 몸집을 키웠으며, 주말엔 서핑과 야생 멧돼지 사냥을 즐긴다.

‘저커버그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셔츠를 입은 저커버그.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런 그의 외적 변화를 사업적 리브랜딩과 연결 짓는 시각이 우세하다. 메타버스에 주력하겠다며 2021년 페이스북에서 사명을 바꾼 이후 메타의 사업적 성과는 지지부진하고 웹3 프로젝트들도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또 개인정보보호 관련 복잡한 소송에 휘말려 있으며, 2022년과 2023년에 이어 올해도 수많은 직원을 정리 해고해야 할 상황이다. 이에 따라 리더십에 치명상을 입은 마크 저커버그가 얌전한 모범생 이미지 대신 강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로 위기 돌파에 나섰다는 것이다. 실제 저커버그는 얼마 전 미국 유명 인플루언서 조 로건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해 “요즘 기업문화가 지나치게 중립적이고 신중한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다”면서 “기업 운영에 있어 ‘남성적 에너지’도 중요하다. 격투기와 사냥에서 그런 에너지를 얻는다”고 말했다. 강하고 남성적인 이미지는 새로 출범한 트럼프 정부와도 코드가 잘 맞는다. 메타는 2021년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폭동 사태 당시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트럼프의 페이스북 계정을 차단한 후 트럼프의 눈 밖에 났다. 이후 저커버그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 뒤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가 하면, 격투기를 통해 인연을 쌓은 데이나 화이트 UFC CEO를 메타의 이사로 발탁하는 등 적극적으로 화해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화이트 CEO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페이스북 계정 차단을 두고 트럼프가 제기한 소송에는 360억 원을 물어주고 통 크게 합의했다. 이 외에도 저커버그는 트럼프와 접촉 기회를 늘리기 위해 백악관이 있는 미국 워싱턴DC에서 호화 부동산 구매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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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회색 셔츠만 입었던 마크 저거버그.
SNS 플랫폼, 커머스 같은 대중을 상대로 한 사업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젊고 트렌디한 이미지가 필요하다. 메타는 발렌시아가, 프라다, 톰브라운 같은 명품 패션 하우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디지털 아바타용 의상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이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 그는 패셔너블해야만 한다. 한때 ‘검소한 억만장자’라 불렸던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수도사처럼 소박한 의상을 벗어던지고 근육이 밖으로 터져나올 듯한 타이트한 바지와 셔츠, 명품 시계와 호화 요트로 부를 과시하는데, 이 역시 저커버그와 비슷한 이유로 풀이된다.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황제’가 대업을 이룬 후 스스로를 리브랜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열정으로 똘똘 뭉친 순수한 청년의 퇴장이 아쉽기도 하다.
#마크 저커버그 #제프 베이조스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뉴시스사진출처 마크 저커버그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