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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지난 2월 12일 이화여대 종합과학관 연구실에서 만난 최재천 교수가 들려준 부친의 이야기다. 평생 청렴하게 살아온 부친은 어느 날 만취한 상태로 아들을 붙잡고 이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최 교수는 “아버지도 사과가 먹고 싶었을 테지만 먹지 않은 것”이라며 “청렴해서라기보다는 마음이 약하고 실수 한 번에 끝장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신중하게 살았던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 또한 양심”이라며 “양심은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삶의 태도”라고 읊조렸다.
최 교수는 지난 1월 그의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 제작팀과 함께 신간 ‘양심’을 펴냈다. 동강댐 건설 반대, 호주제 폐지 운동, 제돌이 야생 방류 등에 기꺼이 나선 그의 삶의 궤적이 모두 양심에서 출발했다는 데서 찾은 화두다. 여전히 스스로를 비굴한 인간이라고 겸손히 말하는 최 교수는 “우선 숨고, 다치고 싶지 않았지만 그놈의 얼어 죽을 양심 때문에 결국 나서고 말았다”며 “양심은 아무리 불어도 이상하게 안 꺼지는 내 마음속 촛불”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 불빛은 꺼지지도 않고 계속 내 안에서 나를 따끔따끔 찌르며 괴롭힌다”며 “세상 사람들을 모두 속일 수 있어도 딱 한 사람, 나를 속이지 못하기 때문에 끝내 양심과 마주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오늘날 비양심적인 행동이 이익이 되고, 무책임한 태도가 묵인되는 분위기 속에서 양심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는 아직 촛불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그 작은 불씨를 어떻게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그와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양심을 지키면 손해가 되는 세상

최재천 교수는 2013년 ‘제돌이 야생 방류를 위한 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남방돌고래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냈다.
농담 삼아 제 전공이 ‘관찰학’이라고 말할 만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늘 관찰하고 있어요. 그러다 문득 하루는 온종일 ‘양심’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못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릴 적만 해도 ‘양심의 가책’ ‘양심이 밥 먹여주냐’ 같은 표현을 하루에도 여러 번 들었었죠. 왜 양심을 잘 말하지 않게 됐을까를 고민하다가 단어를 한번 부활시켜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왜 ‘양심’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줄었을까요.
언어학자들은 단어의 소멸을 2가지 이유로 설명합니다. 첫째, 시대 변화에 따라 단어가 순화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 미국에서 흑인을 ‘니그로(Negro)’라고 불렀지만 이후 ‘블랙(Black)’, 지금은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으로 바뀌었죠. 둘째, 단어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경우입니다. 사회 변화로 인해 특정 개념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분석해보니 ‘양심’이라는 단어는 후자의 경우, 즉 용도 폐기됐어요.
구체적으로 설명 부탁드립니다.
예전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어요. 한 동네에서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냈기 때문에 누군가를 속여서 밥 벌어먹고 산다는 건 불가능했죠. 이제는 익명성을 무기로 한 보이스 피싱이나 온라인 사기 등이 너무 쉽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갑질도 대놓고 하고, 잘못을 지적받아도 뻔뻔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죠. 사회의 행동 양식에는 되먹임(feedback) 작용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거나 오히려 이득이 된다면 사람들은 그 행동을 계속 강화하죠. 최근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는 느낌이 들 만큼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염치없이 야비한 사회로 변해갈 것이라는 걱정이 들죠.
양심적으로 살면 손해라는 생각도 팽배합니다. 이를 시스템적으로 개선할 방법이 있을까요.
‘양심청’ 같은 기관을 만들어 비양심적이면 처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웃음). 많은 이가 사회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사회는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진화(evolution)를 통해 변화하는 법입니다. 즉, 사회는 한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양심’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리고 자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비양심적인 행동을 할 때 주변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계속 들리면 그 사람이 더 괴로워지겠죠. 그렇게 조금씩 사회가 변화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법이 더 엄격해지면 사람들이 더 양심적이 될까요.
아니요. 서양에서는 양심적이라는 것이 곧 법을 잘 지킨다는 것과 일맥상통해요. ‘conscience’라는 단어를 보면, ‘con(함께) + science(지식·규범)’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최소한의 지식과 규범, 즉 법을 의미하죠. 따라서 서양에서는 법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윤리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법까지만 지키면 된다’는 태도가 형성되기도 합니다. 즉,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도덕적으로 더 높은 수준을 요구받지 않는 것이죠. 반면 동양에서 양심은 법 이상의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합니다.
동양의 양심은 어떤 의미인가요.
동양의 양심은 ‘어진 마음(어질 양(良) + 마음 심(心))’이라는 개념으로 포괄적이고 이상적인 도덕적 기준입니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착하고 너그럽고 온갖 좋은 덕목이 다 포함돼 있죠. 사실상 세종대왕 정도라야 어진 사람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기준입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 법조차도 잘 안 지키고 있지만요.
어떻게 해야 양심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영화 ‘광해’의 한 장면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주인공은 원래 저잣거리의 만담꾼이었죠. 그러다 갑자기 왕 역할을 맡게 되면서 생전 처음으로 수라상을 받습니다. 그릇을 싹싹 비운 그에게 내관이 조용히 한마디 합니다. “상감마마가 남기신 음식으로 수라간 궁녀들이 배를 채웁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다음번 수라상에서 팥죽 한 숟갈만 뜨고 숟가락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왠지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하죠. 이 장면은 양심이란 어쩌면 아주 간단한 깨달음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경험, 단 한마디의 말만으로도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죠. 이게 옳은 일인지 아닌지 고민이 된다면, 가장 순수한 자기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태도가 양심적인 삶을 사는 가장 단순하고 실천하기 쉬운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선행학습을 비양심적으로 보는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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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 과연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듭니다. 책 ‘공감의 시대’에 따르면 양심은 공감과 깊이 연결된 개념입니다. 양심의 기준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됩니다. 남에게 공감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철저히 비양심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공감은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 충남 서천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봤어요. 본인 딸이 다문화가정 친구와 손을 잡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물티슈로 딸 손을 벅벅 닦더라고요. 충격적이어서 한참을 서서 봤습니다. 딸에게는 친구의 피부색이 다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이를 문제 삼아버리면서 아이들이 원래 갖고 있던 양심과 공감을 잃어버리고 무뎌지게 되는 거죠.
이를 교육으로는 기를 수 없나요.
지금도 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하고 있지만 실은 참 이상한 소리예요. 인성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지 않도록 해야 하죠. 그런데 교육이 출세의 무기가 된 현실 속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런 생각할 때냐’ ‘공부나 한 줄 더 해’라고 일갈하죠. 교육의 원래 목적은 먼저 살아본 어른들이 사회에 나오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함께 잘 사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는데, 입시 위주의 아주 야박한 교육으로 변질된 거죠.
함께 잘 살 수 있게 교육하는 해외 사례가 있다면요.
독일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에서는 조기교육에 집착해서 ‘우리 아이가 남들보다 먼저 배우고 치고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죠. 그런데 독일에서는 미리 배워 온 아이가 있으면 학교에서 문제 삼습니다. 실제로 “아이가 미리 배워 와서 수업 진행이 어렵다. 이런 식으로 하면 처벌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지인도 있습니다. 모든 아이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죠.
생성형 인공지능(AI)도 양심을 학습하기는 어렵겠네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능(intelligence)과 지성(intellect)은 다릅니다. 전자는 두뇌 작용에 의해 해결하는 능력이라면 후자는 머리로 계산이 다 끝난 후에도 한 번 더 생각하는 거예요. 예컨대 친구와 게임을 할 때도 내가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때때로 져줍니다. 그런데 너무 눈에 띄게 져주면 기분 나쁠 테니 실수인 척 자연스럽게요. AI는 승패를 계산하고,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할 뿐입니다. 이처럼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어요. 기술 발전이 워낙 빠르다 보니 그렇게 보이게끔 프로그래밍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진실로 상대를 위하는 마음은 오직 인간만이 가질 수 있죠.
양심이 무뎌지지 않게 하려면 가정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나치게 엄하게 훈육하면 아이가 비양심적이 됩니다. 저는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 밑에서 굉장히 엄격하게 자랐어요. 아침에 아버지 기침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일어나서 이불을 칼 각으로 개야 했죠. 아버지가 무섭다 보니 잘못을 저지르면 인정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거짓말하거나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가 몸에 뱄습니다.
그렇다 하기엔 양심적으로 잘 살아오고 계신 것 아닌가요.
아내 덕분에 바뀌었습니다. 신혼 초 아내는 제가 늘 거짓말하고 핑계를 대고 상황을 피해가려는 태도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어요. 깔끔하게 사과하면 끝날 일인데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죠. 그런데 아내와 살아가면서 잘못을 고백해도 흔쾌히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험이 쌓였어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정당한 대접을 받기 시작하니까 당당해지더라고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현장을 모면하는 것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살았던 아이가 이제는 손해 볼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나서게 됐습니다. 가끔 집에서 혼자 생각해보며 뿌듯해하곤 해요. 지금도 비굴한 면모가 남아 있긴 합니다(웃음).
교수님 마음속 ‘촛불’이 특별히 크고 강했기 때문에 양심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아닐까요.
아니요. 저라고 특별하지 않습니다. 가끔 TV를 보다가 ‘커피 한 잔 값이면 아프리카 아이들이 예방접종을 받을 수 있다’는 후원 광고가 나오면 화면을 돌리기도 해요. 보고 있으면 죄책감이 들고 마음이 힘드니까 안 보고 싶어져서요. 이미 양심이 무뎌진 거죠. 그렇지만 아무리 작은 촛불이라도 꺼지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사람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촛불이 다시 타오르는 거죠. 지금 비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분명 어느 순간 혼자 있을 때 마음 한구석이 찔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라는 마음이 들 때, 이를 애써 짓누르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만 행동해도 대체로 양심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요.
#양심 #최재천교수 #여성동아
사진 박해윤 기자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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