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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SEXOLOGY

PAGE.166

글 · 조진혁 | 일러스트 · 곤드리 | 디자인 · 김영화

2016. 02. 23

J는 밸런타인데이에 직접 만든 초콜릿을 예쁘게 포장해 내밀었다. 나는 답례로 화장품 세트를 선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내가 받고 싶은 건 초콜릿이 아닌데.

전 여자친구가 고백했다. 꿈에 내가 나왔다고.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 꿈에서 한 철 동안 주연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내 꿈을 꿨다고 했다. 꿈에서 우리는 이별 모르는 연인처럼 다정했고, 뜨거웠다. 하지만 꿈에서 나와 섹스하고 나면 괴롭다고 했다. 죄책감이 밀려와서 고독해진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준 편지들을 모두 불태웠다. 노끈으로 묶은 한 뭉치의 편지 더미를 통째로 태웠다. 다시 읽어보지도 않았다. 연기가 꽤 높이 올라갔는데, 그때 내게 연락하기로 했다고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편지를 태운 지 몇 년이 흘러서야 우리는 다시 만났다. 서먹하게, 근황을 물으며 술을 마셨다. 그녀가 다시 연락한 것보다, 편지를 태웠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사실 많이 슬펐다. 이루지 못한 우리 사랑이 애달파서가 아니라 불타버린 문장들 때문에 슬펐다. 사랑해서 사랑을 글로 새겼는데,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내 자식들이 재가 됐다. 사랑을 담은 글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내가 다시 진심으로 연애편지를 쓸 수 있을까? 타버린 문장들이 그리웠다.
집으로 돌아와 그녀가 준 선물들을 꺼내 뒷마당으로 갔다. 바닥에 내려놓고, 한참을 쳐다봤다. 라이터를 매만지다가 담배만 태웠다. 그녀에게 나는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은 어떤 존재일까? 나를 기억하는 게 그토록 불행한 걸까? 쓸데없는 고민들이 꼬리를 물었고, 결국 나는 선물에 불을 붙일 수 없었다. 내겐 아직 소중하니까. 지금의 그녀보다 그녀가 남긴 오래된 선물들이 더 각별하니까. 그건 특별한 시기의 물건들이다. 내가 그녀에게 사랑받았다는 증거이자, 한때 반짝이던 내 청춘이다. 나는 내 청춘을 태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의 연애를 부정하고, 지워버릴 수는 없다. 흐트러진 선물을 다시 상자에 담을 때 생각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반짝이던 시절은 갔다. 이제 선물에 연연하지 않지만 이따금 전국적인 이벤트 데이에 편의점에서 빼빼로를 사거나, 사탕 바구니 정도는 산다. 담배 사러 간 김에 말이다. 선물을 주면 J는 말한다. “에이, 뭐 하러 이런 걸 사와.” 그러면서도 웃는다. 그 모습이 귀엽다. 처음 J와 자고 나서, 좋은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좋은 사람이 되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결혼도 생각했다. 좋은 날들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예쁜 물건을 보면 J를 먼저 떠올렸고, 해외 출장을 가면 엽서를 사서 삐뚤빼뚤한 글자로 편지를 썼다. 기념품은 J 것을 먼저 골랐다. 특별한 순간,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사귄 지 1년이 되던 날, 우리는 싸웠다. 한강공원 주차장에서 J가 울었다. 나는 담배를 태웠고, 그녀는 춥다며 창문을 닫으라고 했다. J를 위로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J가 왜 선물을 안 주냐고 소리친 것만 떠오른다. 뜬금없어서 놀랐고, 할 말이 없었다. 완전한 나의 패배였다. J는 승리의 눈물을 흘렸다. 남자친구로서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자주 하지 못한 게 죄처럼 느껴졌다. 선물은 남자친구가 해야 할 의무에 속했다. J가 평소에 하지 않았던 말,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라는 배려들에 나는 속아 넘어갔다. 그녀의 본심이 수면을 박차고 분수처럼 터지니 나는 죄인이 됐다. 무능력한 남자친구 말이다.
“왜 남자가 선물해야 해? 그냥 적당히 넘어갈 수는 없어?” 친한 동생이 물었다. 우리는 함께 백화점을 걷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에 맛없는 초콜릿과 교환할 물품을 사기 위해 화장품 매장을 살폈다. 동생의 여자친구는 원하는 브랜드와 모델명을 미리 알려줬다고 한다. 몇 번 흘리듯 얘기했겠지만, 동생이 그걸 캐치할 리 없었다. 여자는 그런 걸로 답답해하고, 서운해한다. 원하는 게 있으면 또박또박 문장으로 써서 말하면 될 텐데, 그걸 싫어한다. 문자는 그러라고 발명했는데 말이다. 괜히 자존심 상해한다. 매 순간 자신을 관찰하는 스토커라면 흘리듯 한 소리를 모두 기억하겠지만, 우리는 사랑할 뿐 스토커는 아니다. 매 순간을 복기할 순 없다. 게다가 우리는 여자의 속마음은 모른다. 불 꺼놓고 섹스해서 가슴 모양도 가물가물한데, 그 속을 어찌 알겠나? 왜 관심법을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궁예가 아니라고 답하겠다. 어쨌든 우리는 투덜거리며 문화센터 주민들처럼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동생은 이것저것 살피다가 하나를 점찍었고 직원은 알겠다며 제품을 포장했다. 그사이 나는 명품 브랜드 매장을 살펴봤다. 가격을 보니 엄두가 안 났다. 무엇보다 J가 필요하다고 했던 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한 번쯤 눈치를 준 것 같은데, 도저히 생각이 안 났다. J와 싸우기 싫어서 비싼 선물을 주기로 했다. 가격이 노력을 대신하는 법이다. 동생이 산 것과 색깔이 조금 다르고, 더 큰 화장품을 세트로 구입했다. 직원은 묻지도 않고 선물 포장을 시작했다.
“아, 그냥 맞춰줘. 피곤하잖아.” 유부남 선배가 말했다. 동생과 나는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마시면서 선배의 잔소리를 들었다. 싸우며 살지 말라고, 그냥 선물하고 잊으라고. 오늘 하루도 잘 버텼다고, 안심하면서 잠들면 그게 행복이라고. 그 순간 선배는 꼰대 같았고,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한 사람처럼 보였다. 2년을 연애하고, 결혼한지 3년이 됐다. 평소 선배는 결혼하면 삶이 안정된다고 말했다. 돈 버는 일은 어렵고, 사회생활은 복잡하다. 사색할 틈이 없는데, 그 사이에 연애까지 끼어들면 자신의 삶은 사라진다고. 그러니 얼른 결혼하라고 말하던 선배다. 동생은 선배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럴 바엔 혼자 사는 편이 낫겠다며 웃었고, 선배는 너희가 옳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나는 싸우려는 게 아니다. 그냥 억울한 게 싫을 뿐이다.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할까? 아니, 손해라고 부르고 싶진 않다. 우린 비즈니스를 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사랑하기에 연애를 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 데이트를 한다. 선물을 주고받기 위해 만나는 게 아니다. 혹여나 상대의 감정을 손으로 만져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라 선물이 받고 싶은 거라면…. 글쎄 그런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고 싶진 않다.
다행히 J는 명품 가방을 요구한 적 없다. 다른 여자들처럼 선물을 받고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뿐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비교당하는 게 싫다고 했다. 나는 J의 자존감을 위해 선물하는 셈이다. 하지만 왜 남자가 여자의 자존감을 위해 희생해야 하나? 그게 의무니까? 납득할 수 없다. 논리도 목적도 없다. 차라리 로비라면 목적이라도 있을 텐데. 잠자리를 위해 로비하는 단계는 아니다. 우린 벌써 1년이 넘은 커플이니까. 솔직히 거의 매일 만나는 사이에 선물까지 요구하는 건 무리한 처사 같기도 하다. 탄원하고 싶지만 내 마음을 읽어줄 사람이 없었다. 여자한테 이런 얘길 하면 ‘쪼잔한다’는 소리나 듣겠지. 직장인 둘이 연애를 하는데, 소비는 남자의 몫이다. 솔직히 연봉도 그녀가 더 높다. 결국 밸런타인데이에 외로워지기 싫어서 선물을 샀다. 싸우기 싫었다. J를 사랑하지만 매 순간 사랑스러운 건 아니다. 내가 이상한 걸까? 진심이 담긴 선물이라면 어렵지 않다. J가 사랑스러울 때 편지를 써줄 의향이 있다. 내 진심이 공산품보다 가치 있으니까. 이런 내 마음을 이해받고 싶어서 전 여친에게 전화했다.

조진혁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에게 할애했다. 많이 차이고, 가끔 고백을 받았다. 체력은 줄어드는데 성욕이 증가하는 기묘한 현상을 겪고 있다.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이번 칼럼에선 요즘 남자의 솔직한 연애와 섹스 후일담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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