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움 라운지의 초대형 오르골
1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우연히 방송실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LP판을 발견한 그는 간수를 화장실에 가두고 모든 수감자가 들을 수 있도록 음악을 튼다. 2명의 소프라노가 부르는 ‘편지의 이중창’은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게 교도소를 감싸고, 수감자들은 난생처음 듣는 천상의 소리에 넋을 잃는다. 듀프레인은 이 일로 2주 독방 신세를 지게 됐지만 덕분에 수감자들은 차가운 교도소 밖, 용기와 희망 그리고 인간다움이 있는 또 다른 세상에 한발 다가간다.
여기, 소리와 음악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나누고자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정몽진(64) KCC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정 회장은 스스로 ‘오또(오디오 덕후를 뜻하는 은어)’라 칭할 만큼 소리에 진심이다. 사춘기 소년 시절 오디오의 세계에 빠진 그는 이후 50년 가까이 빈티지 오디오를 모아왔다. ‘오디오인들의 축제’로 통하는 독일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쇼에서 매년 대형 웨스턴 일렉트릭(Western Electric) 스피커를 전시하고 직접 음악을 시연하기도 했다. 그의 컬렉션의 기증으로 꾸려진 오디오 박물관 ‘오디움’이 지난 6월 서울 서초동에 개관했다. 정 회장은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서 최고급으로 통하는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 제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웨스턴 일렉트릭은 20세기 중반 원가와 타협하지 않고 최고 품질의 오디오를 만들어낸 회사로, 대부분 소량 생산이었던 탓에 제품이 귀하다. 오디움을 운영하는 서전문화재단의 ‘서전(西電)’이란 글자도 웨스턴 일렉트릭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서전문화재단은 음향기기를 기반으로 한 음향 및 청각 콘텐츠를 매개로 문화예술의 보급과 연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공익 목적의 재단이다.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의 손길로 탄생한 오디움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안도 다다오 이후 일본 건축을 대표하는 구마 겐고는 일본의 산토리미술관, 도쿄 올림픽 주경기장, 가도카와 무사시노 박물관, 와세다대학의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 등을 설계한 인물이다. 은색 알루미늄 파이프 2만 개를 수직으로 드리운 오디움의 외관은 마치 숲을 연상시킨다. 길이와 굵기가 각각 다른 파이프들은 시간과 날씨,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드러내며 자연의 변화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실내는 알래스카에서 공수한 편백나무를 사용했다. 향이 강한 알래스카 편백나무 덕분에 자연 속으로 한 걸음 들어온 듯하다. 구마 겐고는 “관람객들이 (외관을 통해) 시각과 (편백나무를 통해) 후각을 경험하면서 점진적으로 소리와 만나도록 했다”며 “이곳의 특별한 질감과 빛, 바람, 향기를 모두 느끼고 청각을 통해 치유하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50년 가까이 모은 빈티지 오디오와 카메라, 10만 장의 음반 큐레이션
1층 전시실에선 빈티지 카메라 700여 대와 함께 후카오 다이키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오디움은 7개의 전시실과 2개의 특별전시실에서 19세기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부터 음악 재생 기계, 웨스턴 일렉트릭 라우드 스피커 등의 음향 시스템까지 폭넓은 소장품을 선보여 1877년 유성기 발명 이후 오디오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관람객들은 3층에서 관람을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의 오디오들과 만나게 된다.
1930년대 미국 극장에서 사용된 ‘혼 스피커 16-A, 16-B’ 사운드 시스템.
3층에 위치한 1〜4전시실에서는 1930〜60년대 오디오 시스템을 만날 수 있다. 1전시실에선 1950〜60년대 가정용 하이파이 스피커와 앰프를 소개한다. 오디오 마니아라면 심장이 뛸 마란츠, 매킨토시, JBL이 망라돼 있다. 이 가운데 JBL 하츠필드는 1953년 미국 ’라이프‘지에 ’궁극의 환상적인 스피커‘로 묘사되며 표지를 장식한 제품이다. 2전시실에선 제2차세계대전 격동기였던 1940년대 영화 음향 시스템의 양대 산맥이었던 미국 웨스턴 일렉트릭과 독일 클랑필름의 음향 시스템을 비교하며 청음할 수 있어 흥미롭다. 이 시기에 제작된 클랑필름의 스피커들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선전, 선동 도구도 사용되기도 했다. 5전시실에선 1930년 미국의 극장에서 사용하던 ‘혼 스피커 16-A, 16-B’를 원형 그대로 관람하고 청음도 할 수 있다. 사람 크기의 스피커 3대에서 나오는 소리가 관람객을 압도한다. 웨스턴 일렉트릭의 혼 스피커는 넓은 공간에서 고음질의 음향을 전달, 몰입감을 높이며 영화 산업의 발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한편 1층에선 오디움의 소장품을 카메라에 담은 일본 사진작가 후카오 다이키의 ‘수집과 기록’전이 열리고 있다. 그의 작품은 컬렉션 하나하나의 존재를 부각하는 동시에, 대상의 형태미와 공간의 조응을 통해 소리의 시각화를 경험하게 한다. 아울러 정몽진 회장이 빈티지 오디오와 함께 수집한 빈티지 카메라 컬렉션도 만날 수 있다. 2012년 라이카가 에르메스와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출시한 M9-P는 전 세계에 300대만 출시된 희귀한 아이템이다. 에르메스의 상징인 송아지 가죽을 손잡이와 스트랩에 사용한 것이 특징. 양쪽 벽면을 가득 채운 700여 대의 카메라에서 정몽진 회장의 수집에 대한 열정을 실감할 수 있다.
빈티지 오르골들을 전시해 놓은 엑시트 갤러리.
1층 엑시트 갤러리에선 다양한 형태의 뮤직 박스를 만나볼 수 있다. 뮤직 박스는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매체가 없던 시절에 저렴한 비용으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탄생한 기계인데, 우리에겐 ’오르골(orgel)‘이란 명칭으로 더 익숙하다. 이 중 1920년대 독일 하노버에서 제작된 하모니팬 오르골은 직접 손으로 휠을 돌려 음악을 재생시키는데, “오디움에서 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 정몽진 회장”이라는 것이 도슨트의 설명이다.
10만 장의 음반이 소장된 청음 공간 라운지.
지하 2층에 마련된 라운지는 청음을 위한 공간이다. 패브릭 자재를 사용해 음향을 부드럽고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한 이곳에는 미국 ’뉴욕매거진‘의 유명 음악 칼럼니스트였던 피터 G. 데이비스의 컬렉션을 비롯해 10만 장의 음반이 소장돼 있다. 비틀스의 초기 프레싱 음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에 소개된 음반들도 큐레이션해두었다. 100년 전 벨기에에서 만들어졌다는 초대형 오르골, 웨스턴 일렉트릭의 모회사였던 벨 시스템의 종 모양 로고 등도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귀한 보물이다.
빈티지 오디오와 뮤직 박스 제품은 구하기도 어렵지만 관련 기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어 수리와 정비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오디움은 전시품들의 상태를 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운영시간을 매주 목~토요일로 제한하고 있다.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예약하고 해당 날짜에 방문하면 전문 도슨트로부터 오디오의 역사와 소리의 세계에 대한 흥미롭고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소요 시간은 100분이며, 관람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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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사진제공 오디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