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한의원 건물 입구에 놓인 ‘갑산’ 현판에 선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액자 옆 책장에는 한방 관련 서적이 빼곡히 꽂혀 있는데, 유독 조선시대 침의(鍼醫)였던 허임과 관련된 책이 많다. 허임은 선조와 광해군 당시 침의(치종교수)로 활약한 인물로,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침을 잘 놓아 ‘조선제일침(朝鮮第一鍼)’ ‘태의(太醫)’로 불렸다. 어의 허준이 편두통을 호소하는 선조에게 “침은 허임이 저보다 잘 놓는다. 허임에게 침을 맞으라”고 했을 정도. 허임이 고안한 ‘보사침법(補瀉鍼法)’은 한중일 침법을 집대성한 독창적 침법으로,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에 이르기까지 조선 임금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말년에 보사침법의 사례를 바탕으로 쓴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은 중국과 일본에서도 극찬을 받고 각 나라의 침법에 큰 영향을 줬다.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얻었던 허임의 보사침법은 조선시대 유림의 견제 속에 우리 한방 역사에서 잊혀갔다. 그런 허임의 보사침법을 400년 만에 복원해낸 인물이 바로 이 박사다. 중국에서 명맥을 유지하던 보사침법과 각종 문헌, 구전을 종합하고 자신의 치료 경험을 더해 허임의 침법을 복원한 것.
드라마 모티프 된 허임 보사침법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이 이명 환자에게 보사침법으로 침을 놓고 있다. 원 안은 이명 치료를 위해 침을 놓은 귀 옆의 청궁혈 혈자리이다.
이명과 어지럼증은 치료가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혹 전조 증상이 있나.
귀 막힘 증상이 먼저 찾아오는 환자가 많다. 이때 잘 대응하면 본격적인 귀 질환이 오기 전 예방할 수 있다.
귀 막힘 증상은 어떤 것인가.
귀가 “먹먹하다” “답답하다” “멍하다”고 호소한다. 특히 내 목소리가 귓속에서 울리거나 내가 호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경우도 있다. 소리가 잘 안 들리는 환자가 제일 많은데, 이 때문에 돌발성난청이나 메니에르증후군과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귀 막힘 증상을 방치하면 이명과 어지럼증이 갑자기 찾아온다.
귀 막힘 증상의 원인 질병이 있나.
귀 막힘이 일어나는 부위는 코와 귀 사이에 있는 귀인두관이다. 코나 편도 근처에 있다 보니 비염이나 편도 상인두염의 후유증으로 생기기도 하고, 장기간의 과로나 스트레스로 발생하기도 한다. 여성들의 경우 여성호르몬 이상이나 피임약 등과 관련해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심한 다이어트 후에 생긴 이관개방증이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은 귀 막힘에 대해 “오장(五臟)의 기(氣)가 궐역(厥逆)하면 귀가 꽉 막혀 잘 들리지 않는데, 이때 어지러운 증상을 동반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궐역은 혈맥이 정상적으로 돌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요즘 말로 하면 과로나 스트레스가 극심해 진이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명의 주요 증상과 원인은 무엇인가.
자각적 이명이 제일 많다. 몸 안팎 어디에도 소리원이 없는데 자신의 귀에만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증상이다. 실제 환자의 귀에 청진기를 대어봐도 그 소리(이명)를 들을 순 없다. 이명의 소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붕’ ‘고’ ‘보’ 하는 낮은 소리가 들리거나 귀가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을 저음성 이명이라고 하고, 반대로 ‘딱딱’ ‘삐’ 등 금속음이나 전자음과 비슷한 높은 소리가 나는 것을 고음성 이명이라고 한다. 고음성 이명의 경우는 난청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는 메니에르증후군과 이관협착증(이관이 닫힌 채로 막혀버린 상태) 등의 귀 질환이 원인인 경우도 있고, 신경과 뇌의 장애나 당뇨병·고혈압증·동맥경화증 등의 전신성 질환이 원인일 때도 있다. 폐경기 여성은 갱년기장애로 발생하거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실제 소리원이 있는 이명도 있나.
타각적 이명 환자도 적지 않다. 실제 몸 어딘가에 소리원이 있고 다른 사람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환자의 귀 주변에 청진기를 대면 실제 ‘좔좔’ ‘윙윙’ ‘부스럭부스럭’ 등의 잡음이 들린다. 심지어 청진기를 대지 않았는데 이명이 들리는 사람도 있다. 타각적 이명의 음원은 심장의 고동, 혈관 내를 흐르는 혈액, 호흡 등의 생명 활동 시 나오는 소리가 대부분이다.
보사침법의 한의학적 치료 원리
한의학에선 이명을 ‘귀울음(귀울림)’이라고 한다던데.이명은 한자로 ‘耳鳴’이라 쓴다. 한의학이 이명을 ‘귀소리’라 하지 않고 ‘귀울음’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생기면 교감신경계가 흥분하고 우리 몸은 긴장한다. 싸울 때 주먹을 움켜쥐듯 혈관이 좁아지면서 몸이 굳고 저리게 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흥분하거나 열받는 상태가 된다. 한방에선 귀가 차가워야 건강하다고 본다. 뜨거운 것에 손을 데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귓불을 만지는 것도 귀가 차기 때문이다. 차가워야 정상인 귀가 열받아 더워지면 병적인 상태로 간다. 이게 바로 이명이다. ‘동의보감’에서는 귀울음의 원인을 스트레스와 과로, 원기 허약으로 규정한다. 차가워야할 귀가 열을 받으면 소리를 내고, 심신이 허약해지면 몸의 보일러 역할을 하는 신장 명문의 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어지럼증이 귀와도 관계가 깊은가.
현대 의학에서는 어지럼증의 원인으로 귀에 돌이 생기는 이석증, 메니에르증후군, 전정신경 이상이 가장 많다고 말한다. 한의학에서는 어지럼증을 실증(實症)과 허증(虛症)으로 나누는데, 실증은 스트레스나 화증(火症)으로 인한 것이 많고 허증은 소화기의 허약과 관련짓는 경우가 많다. 소화기가 약했던 조선시대 영조는 곰탕을 먹으면서 어지럼증을 치료했고 백성은 지금의 소, 돼지의 지라를 먹고 치료했다. 특히 노인성 어지럼증은 원기 허약과 관련이 많다. 뇌는 심장으로부터 양수기처럼 혈액을 퍼 올려야 하는데, 심장의 박출 능력이 떨어지면 뇌가 허혈 상태가 돼 어지럼증이 온다.
허임의 보사침법과 그 치료 원리는 무엇인가.
깊이에 따라 상중하로 찌르고 빼는 과정이 하늘, 땅, 사람에게서 기를 얻고 빼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에 착안해 나는 이 침법을 ‘천지인 침법’이라 부르고 있다. 예를 들어 5푼(1.5cm) 깊이로 침을 찌른다면 먼저 2푼(0.6cm) 찌르고 멈췄다 다시 2푼 찌른 뒤 또 잠시 쉬고 1푼(0.3cm)을 찌르는 방식이다. 그런 다음 환자에게 숨을 들이쉬게 한 뒤 침을 빼고 손가락으로 침구멍을 막는다. 그럼 풍선에 바람이 들어가듯 몸의 기가 보(補·가득 참) 된다. 사법(瀉法)은 이와 반대로 5푼 깊이로 찌른 다음 2푼 빼고 다시 2푼 빼고 나머지를 들어 올려 침구멍을 연 다음 환자에게 숨을 내쉬게 한다. 이렇게 하면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기가 빠져나가게 된다.
보사침법이 이명 · 어지럼증 치료와 어떤 관계가 있나.
침법의 복원 과정에서 보사침법이 이명, 어지럼증, 알레르기비염과 같은 면역계 질환에 특히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침을 통해 기를 넣고 빼는 과정, 즉 보사 과정이 일어나는 곳이 폐의 영역이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인 비염, 축농증, 기침, 천식 등의 치료에 효과가 크다. 또 사법을 쓰면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듯 소리의 진동을 감지하는 귓속 유모세포의 비정상적 흔들림이 진정되면서 귀울림(이명) 현상이 치료된다.
침으로 이명과 어지럼증을 치료한 대표적 조선의 임금은 누구인가.
허임의 침을 맞았던 선조와 인조를 들 수 있다. 선조와 인조는 똑같이 전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내향성이고 소심한 탓에 심각한 이명 증상을 보였다. 조선 최초의 방계 왕족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선조는 전란 중에 왼쪽 귀가 심하게 울리고 들리지 않는 증세에 시달렸는데, “침을 맞지 않으면 낫지 않을 듯하다”며 침의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반정으로 임금 자리에 올라 ‘자신도 반정을 당할 수 있다’며 노심초사하던 인조는 매미 소리, 종소리, 큰물이 흐르는 소리 등의 이명 증상으로 고생했다. 인조 또한 이명 치료에 침을 놓을 것을 명하기도 했다. 두 임금 모두 침을 맞고 이명 증상이 사라졌다.
임금과 백성의 이명·어지럼증 치료한 침법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은 이명·어지럼증 치료를 위해 침 이외에 귀 뒤편에 붙이거나(맨 아래, 붙이는 청음고) 귓속에 바르는 외용 약물(검은색, 바르는 청음고)도 사용한다. 흰색은 용뇌고, 노란색은 통기고이다.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
연구 기관에 다니던 60대 남성 환자 사례다. 그때가 2016년이었는데, “귀에서 ‘웅웅’ 소리가 나더니 그 소리가 양쪽 귀를 옮겨 다닌다”고 이명 증상을 호소해 침 치료를 시행했고 상태는 금방 호전됐다. 원인은 스트레스였다. 그러다 퇴직 후인 지난해 좌절감과 허탈감 때문에 이명이 재발했다. 귀가 먹먹하고 뭔가 가득 찬 느낌이 들면서 어지럼증이 생겼다. 메니에르증후군에 가까운 증상이었다. 호남 지역에서는 먼 거리라 참다가 올라왔다는데, 3회 정도 침을 맞고 좋아졌다. 심장의 과잉 반응을 내관이라는 혈로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어지럼증으로 고생하는 수험생들이 많다던데.
갑자기 심하게 어지럽고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전정신경염 증세를 보이는 19세 여성 재수생환자가 있었다. 미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였다. 전반적으로 소화능력이 떨어지면서 설사가 자주 나고 종아리 부분에 부종이 있었다. 한의학적으로 볼 때 이 환자의 어지럼증 원인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수독(水毒)이었다. 체액이 오래 머물거나 넘쳐나면서 어지럼증이 생긴 경우다. 현대 의학에서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항이뇨호르몬이 나온다고 말한다. 부종은 수분이 정체하거나 넘칠 때 나타나는 대표적 증상으로, 소변으로 배출되지 못한 수분이 귀에까지 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침 치료 후 어지럼증이 사라진 것은 물론, 부종이 줄면서 다리도 날씬해지고 몸이 가벼워져 시험공부가 쉬워졌다고 한다.
이명과 어지럼증 치료에 쓰는 외용 약물이 있다면.
외용 약물에는 먼저 스트레스성 이명 치료제이자 투관통기약(套管通氣藥)인 ‘청음고’가 있다. 이 이름은 막힌 기를 열어줘 통하게 하는 약이라는 뜻이다. 사향과 용뇌를 대표적으로 쓰는데, 사향은 사향노루의 배꼽에 형성된 향료로 ‘마음속에 생긴 번열을 해소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는 지렁이(蚓)와 여러 약물을 아울러 귀 뒤에 붙이거나, 귓속에 솜으로 감싸 넣으면 스트레스로 인한 열이 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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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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