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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생존기: ‘덕업일치’의 자발적 노예

김유림 번개장터 PR 매니저

입력 2022.06.15 10:30:01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인도 영화 ‘런치박스(Lunchbox)’에 나오는 대사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IT 스타트업 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8년 차 시니어가 돼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분명 잘못 탄 기차였는데 그 기차가 어느새 내게 꼭 맞는, 내가 꼭 있어야 하는 자리에 데려다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취업 준비를 하던 10년 전만 해도 제조·유통업 중심의 전통적인 대기업이 취준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 나는 무역회사와 방송국에서 각각 인턴과 통역이라는 직책을 달고 일했다. 이를 발판 삼아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비록 인턴 신분이지만 보수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 주어진 일을 반복하는 것에 금세 흥미를 잃었고, 지쳐가는 선배들을 보며 ‘직장은 본래 괴로운 곳이니 연봉이 제일’이라는 나름의 (그릇된) 기준이 생겼다.

그러던 중 지인 소개로 작은 게임 회사에서 면접 기회를 얻었다. 당시만 해도 스타트업이라는 용어가 생소했기 때문에 경험이나 해보자는 마음으로 갔는데 웬걸, 회사 라운지에 들어서니 신세계가 펼쳐졌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후드 티에 반바지를 입고 삭발한 사람, 냉장고 바지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람들이 사내 바리스타가 만들어준 커피를 받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게 뭐지, 이게 회사야?’ 놀란 것도 잠시, 뒤이어진 면접도 당황스러웠다. 정해진 대로 비슷비슷한 질문을 하는 그간 면접들과 다르게 어렵고 황당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이게 뭐지, 왜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지?’ 첫 느낌과 달리 그 회사가 궁금해졌고 집으로 돌아가며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했다.

회사 동료와 ‘불금’ 보내는 이상한 회사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면접에 합격했다. 입사 후에는 더 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 회사는 그동안 내가 경험한 전통적인 회사라기보다 마치 대학 동아리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 친구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호기심을 채워주는 매일이 만족스러웠다. 돌아보면 이때 ‘스타트업 직장인’으로서 앞으로의 삶을 헤쳐 나가기 위한 중요한 가치를 모두 배우고 얻었다.

먼저 스스로 즐기며 일하는 법을 배웠다. ‘덕업일치’. ‘덕질’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말로, 자기가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분야의 일을 직업으로 삼는 걸 뜻한다. 그 회사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좋아서 일했고, 금요일 밤에는 퇴근하지 않고 라운지에 모여 동료들과 게임을 즐겼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도대체 왜 회사에 있지?’ ‘심지어 불금에 회사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을까?’ ‘게다가 왜 회사에서 놀아?’ 주어진 일을 정해진 시간만큼, 받은 만큼만 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던 필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타트업의 자유롭고 수평적인 문화에 빠르게 감염되면서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찾아서, 알아서 일하는 시니어로 성장했다.

수평적인 조직 문화에서는 주니어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업무에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자신이 공들인 만큼 발전된 결과물을 보면 더욱 애착이 생겨 일에 대한 오너십을 갖게 된다. 필자는 정말 즐겁게 일했다.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재미있어서 밤새 일했다. 내 머릿속의 아이디어를 회사의 자원을 활용해 현실로 구현해볼 수 있었다. 달랑 텍스트 한 줄이던 아이디어가 3D 동영상으로 구현되는 것과 같다. 아이디어가 어디까지 들어맞는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과정은 짜릿했다.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일하다 보니 늘 퇴근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지만 신기하게도 그 과정이 전혀 괴롭지 않았다. 늦은 시간까지 동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뚝딱뚝딱 뭔가 만들다 보면 깊은 동지애나 전우애 같은 감정이 생겼다.



늘 성과가 있는 건 아니었다. 분명한 건 이때 가진 몰입의 시간이 개인의 성장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또한 주니어 시절 수많은 고민의 시간이 시니어가 된 지금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재미가 없다. 필자는 지금도 재미있는 만큼만 열심히 일한다. 더 정확히는 내가 재미를 느끼는 영역과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부분을 일치시키려 노력한다. 능력만 된다면 내가 먼저 제안하는 것도 좋다. 물론 회사에 다니며 좋아하는 일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재미없는 일은 최소한의 자원을 들여 효율적으로 최대한 빨리 끝내고자 노력한다. 사람은 진심이 없으면 무언가를 오래 하기 힘들다. 내 진심과 만족, 자아실현의 방향과 회사가 추구하는 목표가 얼라인(align·가지런하다)되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나도 회사도 행복하다. 사견이지만, 비자발적 노예는 불행하지만 자발적 노예는 행복한 법이다.

언제가 끝인지 알 수 없는 고통

‘스타트업 문화’에 장점만 있는 건 결코 아니다. 시간이 아닌 미션 단위로 일하기 때문에 하루 8시간 자리에 앉아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만큼의 자유가 주어지지만 무거운 책임도 뒤따른다. 업력이 짧아 업무에 참고할 수 있는 레퍼런스(reference)가 없는 점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 찾아서 공부하지 않으면 일을 마무리할 수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건 일의 완결을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끝이 없다는 건 고통스럽다.

대신 스타트업은 특별한 보상 체계를 갖추고 있다. 최근 IT 스타트업의 약진으로 대기업 이상의 급여를 제공하는 ‘유니콘(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로 평가받는 기업)’ 스타트업이 많아졌다. 유니콘 기업이 아니더라도 인재 확보를 위해 스타트업 급여 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아진 상황이다.

스타트업은 사람이 곧 자원이라, 역량을 갖춘 인재를 영입하고자 다양한 보상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를 받되 회사를 함께 성장시켜 후에 큰 보상을 얻는 형태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힘을 합쳐 성과를 내고 그 열매를 구성원들과 함께 나눈다는 취지는 얼마나 멋진가. 이마저도 조직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장벽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이 적성에 맞는다면 해볼 만한 도전이다.

돌이켜 보면 필자는 조직 생활보다는 프리랜서가 적합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향하다 보니 운 좋게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라는 게임으로 유니콘이 된 ‘크래프톤’에서 처음 스타트업을 경험하게 됐다. 운 좋게 일찍 기회를 발견하고 내게 꼭 맞는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승부욕이 강하고 도전적인 일을 좋아하는 성향이 자율과 책임을 바탕으로 한 스타트업 문화와 잘 맞았다. 늘 자극과 영감을 주는 동료와 선후배들 덕분에 ‘맨땅에 헤딩’도 즐겁게 해낼 수 있었다. 결과론일지 모르지만 즐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서 일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즐거움과 보상이 모두 따랐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지금은 첫 회사를 떠나 ‘경단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취향 중심의 중고 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에서 일하고 있다(나는 ‘PR’ 매니저다^^). 같은 IT 스타트업이라고 해도 게임 산업과 플랫폼 산업은 천양지차라 처음 경험하는 일도 많고 아직 매일이 도전의 연속이다. 시니어로 일하면서 주니어 때와 다르게 시험대 위에 올려지는 일도 많아졌다.

다행히 이곳도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최상의 업무 환경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챕터 2를 맞이하는 설렘이 크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슴이 설레는 방향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보면 되니까. 잘못 탄 기차가 때로는 목적지에 데려다주기도 하니까! 걱정은 필요 없다. 김연아 선수의 인터뷰 중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답변이 있다. 그의 연습 장면을 촬영하던 다큐멘터리 PD가 물었다.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하세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스타트업 #번개장터 #김유림 #직장인칼럼 #여성동아

필자소개
김유림 번개장터 PR 매니저는 8년 경력의 스타트업 전문 홍보인이다. 게임 회사 크래프톤의 홍보 담당자로 IT 스타트업 업계에 입문해 스타트업이 성장하며 겪는 다양한 경험을 했다. 현재 취향 중고거래 앱을 운영하며 급성장하는 스타트업, 번개장터에서 홍보를 담당하고 있다.

사진제공 김유림



여성동아 2022년 6월 7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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