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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 흑인·여성·성소수자 백악관 대변인 카린 장피에르

이승원 ‘바이든 플랜’ 저자

입력 2022.05.25 10:30:02

5월 13일 공식 업무를 시작한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흑인이고, 여성이며,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힌 동성애자다. 다층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그의 존재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뭘까.
카린 장피에르. 그는 이민자 가정의 흑인 여성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힌 최초의 백악관 대변인이다.

카린 장피에르. 그는 이민자 가정의 흑인 여성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힌 최초의 백악관 대변인이다.

“누군가는 곧 ‘유리천장’을 깰 수 있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더 빠를 수 있다. 지금 이 연설을 보는 소녀들은 자신이 강하다는 것 그리고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선 안 된다.” 
- 2016년 11월 9일,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뒤 “우리가 유리천장에 가장 큰 금을 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환호했다. 몇 달 뒤 치러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힐러리가 수십 년간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한 유리천장은 조금씩 그러나 묵직하게 깨지고 있다. 이번에는 백악관에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5월 5일 성명을 통해 젠 사키 대변인 후임으로 카린 장피에르(Karine Jean-Pierre·44) 수석 부대변인을 임명한다고 밝혔다. 세계 최강대국의 ‘입’인 백악관 대변인이 누가 되느냐는 늘 국제적 관심사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파장과 의미가 특히 남달랐다. 장피에르는 1789년 미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임명된 흑인 여성 대변인이자, 스스로 성소수자임을 공개한 인물이기 때문. 바이든은 임명 발표 성명에서 “카린은 백악관 대변인이라는 어려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경험·재능·성실함을 다 가진 사람”이라며 “그가 나와 우리 행정부를 대신해 강력한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사키 전임 대변인 역시 브리핑에서 장피에르를 직접 소개하며 “환상적”이라는 말로 기대감을 표현했다.

“트럼프가 증오하는 요소의 집합체”

트럼프 행정부 4년 내내 백악관 대변인은 모두 백인이 맡았다. 당시 장피에르는 “나는 트럼프가 증오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흑인 여성이고, 게이이며, 내 부모님은 모두 아이티에서 태어났다”는 말로 트럼프를 직격하기도 했다. 이민자 출신의 성소수자 유색인종 여성이 백악관 대변인이 된 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사건인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후 ‘미국을 닮은 정부’를 지향하며 공직자 인선 때마다 인종·민족·성별 등을 두루 고려해왔다. 지난 2월, 미국 연방대법원 233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여성 커탄지 브라운 잭슨 판사를 대법관 후보에 지명한 게 한 사례다. 5월 10일에는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에 최초의 흑인 여성 이사가 탄생했다. 이 또한 Fed 출범 109년 만의 일이다. 바이든 행정부에는 이 외에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위시해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내정책위원회(DPC) 위원장,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 등 많은 흑인 여성이 포진해 있다.



그 일원이 된 장피에르는 1977년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섬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뉴욕에 왔다. 아이티 출신 프랑스계 아버지는 택시 기사, 같은 배경의 어머니는 간병인으로 일하며 세 자녀를 키웠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가난한 이민자 가정의 장녀로서 장피에르는 일찍부터 두 명의 동생을 돌봐야 했다. 이후 뉴욕대 공대를 졸업하고 컬럼비아대에서 공공행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뉴욕시 정부에서 경력을 쌓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2008년과 2012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 캠프에서 활동했고, 오바마 1기 행정부 때 백악관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장피에르는 2018년 트위터에 “내가 ‘아메리칸드림’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다”며 “사랑스러운 세 자녀에게 더 좋은 삶을 물려주고자 밀려드는 청구서의 공포에 맞서 열심히 일했던 부모님께 감사한다”고 적었다.

장피에르는 2020년 대선 당시 바이든 후보 캠프에 합류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후보 비서실장을 지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특히 장피에르의 존재를 대중에 각인시킨 사건은 2019년 6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기간 발생했다. 당시 한 포럼에 참석해 발언하던 해리스 후보를 향해 한 사람이 달려들어 마이크를 빼앗으며 위협하자 장피에르가 온몸으로 해리스를 보호하며 습격을 저지한 일이 유명하다.

장피에르의 삶을 이야기할 때 그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외신에 따르면 장피에르는 열여섯 살 때 어머니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처음 알렸다. 이 사실은 몇 년 동안 “가족 사이의 비밀”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주변 사람 모두 이를 존중한다. 장피에르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흑인 퀴어 여성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점이 자랑스럽다”면서 “지금 내 어머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자랑스러워하고, 내 파트너와 내가 함께 기르는 딸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정부 당시 백악관에서 일하던 때를 회상하며 “놀라운 것은 내가 그 안에서 유일한 사람(동성애자)이 아니라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은 LGBT 직원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LGBT인 경험 많은 사람을 고용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LGBT는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등 다양한 성소수자를 일컫는 용어다.

“다양한 공동체의 어깨 위에 내가 서 있다”

장피에르(왼쪽) 백악관 대변인이 전임자 젠 사키와 나란히 서있다. 사키는 장피에르를 기자들에게 소개하며 “환상적”이라는 말로 기대를 표현했다.

장피에르(왼쪽) 백악관 대변인이 전임자 젠 사키와 나란히 서있다. 사키는 장피에르를 기자들에게 소개하며 “환상적”이라는 말로 기대를 표현했다.

현재 장피에르는 CNN 방송기자 수전 말보와 결혼하고, 딸 솔레이(프랑스어로 ‘태양’이라는 뜻)를 입양해 함께 키우고 있다. 말보 기자는 빌 클린턴·조지 W. 부시·오바마 정부에 이르기까지 약 10년간 백악관을 출입한 베테랑 언론인이다. 장피에르 임명 후 일각에서 ‘백악관 대변인·기자 부부’의 ‘이해 충돌’ 발생 가능성을 제기하자 CNN은 “말보 기자가 당분간 백악관과 의회 등 정치 분야를 취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5월 13일부터 공식적으로 백악관 대변인 활동을 시작한 장피에르에게는 앞으로도 계속 흑인, 여성, 성소수자 등 여러 키워드가 따라다닐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장피에르의 다음 발언은 깊은 울림을 준다.

“내가 맡은 일이 밖에 있는 저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다양한 공동체의 어깨 위에 내가 서 있다. 이 (백악관) 연단 앞에 서 있다는 것은 영광이자 특혜다.”

백악관 대변인은 말 그대로 정치 최전선에서 매일같이 싸우는 사람이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의 운명을 좌우할 11월 중간선거(상·하원 의원 선출 선거)를 앞두고 장피에르는 기자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게 분명하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외정책에 큰 부담을 안고 있고, 내부적으로도 인플레이션과 낙태권을 둘러싼 논쟁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 지지율이 40% 이하로 떨어지면서 대변인의 어깨가 더욱 무거워진 상황이다. 게다가 ‘최초’ 타이틀을 갖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가혹한 평가에 놓이기 십상이다. 최초의 성소수자·흑인·여성 대변인이 만들어갈 미래에 일단 응원을 보내본다.

#장피에르 #백악관대변인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 뉴시스 



여성동아 2022년 6월 7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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